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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6화 (66/100)
  • 66화

    “너!”

    “손가락질하지 마세요. 공주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예의가 없나요?”

    아일라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저도 부모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이렇게 예의가 없지는 않은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예의가 없지.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너 하지 마.”

    “너, 지금 내게 감히.”

    상대가 내게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는데 나라고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만 예의를 지키는 건 왠지 억울해. 나도 부모님께 사랑받고 자란 공주님이란 말이야.

    “상대가 예의를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데 제가 당신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 때문에 나는 죽다가 살아났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시녀장이 저지른 일인데!”

    “당신이 시킨 거잖아.”

    “증거 있어!”

    “아직도 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윌리엄 러셀 후작.”

    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느낌에 아일리의 눈이 조금 커지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카시스.”

    윌리엄은 저를 부르는 호칭에 얼굴에 잠시 낭패감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화가 나셨군. 우리 대공 전하께서.’ 하는 윌리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제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공주. 공주는 무사히 모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미 진짜 카르마의 독을 먹여서 온전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저도 많이 봐준 거다.

    “전 대공 전하의 약혼녀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형식적으로도 우리는 약혼 관계가 아니게 될 겁니다.”

    예의를 갖춰 존중은 해 주는데, 표정과 목소리는 카시스가 화가 나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폐하께서.”

    “폐하와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파혼하겠다 정했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파르미온 국왕의 협력을 받기 위해서라지만 처음부터 황명은 아니었기에 제가 이 약혼을 끝까지 거부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폐하께서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파혼을 허락하고 다른 방법으로 환영족을 찾는다 하셨으니 그 약속 지키십시오.

    “공주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돌려보내.”

    카시스는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일라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화났어요?”

    “그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그쯤은 저도 알아요.”

    아일라와 눈을 맞추고 있던 카시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였다.

    “제가 수도에 다녀와야 해서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저도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아일라는 여기에 계시면 됩니다. 다녀와서 앞으로의 일을 제대로 상의합시다.”

    나는 안 가도 되는 거구나.

    “안 좋은 일로 가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다니엘 경이 보이지 않던데, 어디 간 건가요?”

    “다니엘은 다녀올 곳이 있다고 해서 보냈습니다.”

    “음, 그럼 내 훈련을 봐 줄 사람이 없는 거군요.”

    훈련을 한참 동안 하지 못할 걸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여전히 늘지 않는 제 실력이 걱정되었다. 어느 쪽으로든 카시스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힘을 제대로 다루면 분명히 카시스를 도울 일이 있을 거야. 그전에 아버지를 구하고 설득하는 것이 먼저겠지만. 바다로 돌아간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제이드와 앤드류가의 가주인 제랄드 경이 함께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들이 어머니를 지켜 줄 거야.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대화를 하는 사이에 방에 도착했는지 카시스가 방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나더러 더 자라고?

    “아니요, 더 자고 싶지 않아요. 씻고 혼자 조용히 연습해 볼래요.”

    그동안은 다니엘이 봐 줬지만 지금은 없으니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혼자서 조금만 연습해야지.

    “그러고 보니 마린족이 전부 돌아간 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 맞다! 멜로디가 있었지!”

    멜로디에게 봐 달라고 해야겠다.

    “기사뿐 아니라 고용인들도 숲속 연못 근처에는 가지 못하게 할 테니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제가 힘을 제대로 다루게 되면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말해 줘요. 당신에게 신세 진 걸 갚을게요.”

    “신세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에요.”

    “떠나지 않고 제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뭐지? 이 느낌? 이런 기분 처음이야.

    가슴이 간질거려.

    “언제 가는 거예요?”

    “오늘 갈 겁니다. 이동 마법진으로 갈 거기 때문에 다녀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열흘 안에는 돌아올 겁니다.”

    이동 마법진이라는 말에 아일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곳에 올 때 이용해 봤지만 머리도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냈던,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창피해서 카시스를 피해 다녔었지.

    “다시는 이용하고 싶지 않네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겁니다. 그때도 말했지만, 처음에는 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준비하고 바로 출발할 거라서 따로 인사는 못 하고 갈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요.”

    “다칠 일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폐하를 뵈러 가는 것뿐입니다. 잠이 안 오더라도 조금 더 누워 계십시오.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알았어요.”

    아일라를 방안으로 들여보낸 카시스는 제 방으로 돌아가 탁자 위에 올려진 편지를 들어 무심히 바라봤다.

    파혼한다고 서신을 보냈더니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아일라라면 또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일라를 놓아 버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제 마음은 이미 아일라에게로 향했으니까.

    “내가 직접 파르미온 왕국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파혼 허락을 받아야겠어. 그리고 누가 도와주고 있는지도 알아내야겠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고서야 환영족의 잔당이 이리로 잡히지 않을 리가 없으니.”

    언제나 수도로 가는 것이 싫어서 늦장을 부리고, 부러 마법진을 이용하지 않고 육로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느낌이 좋지 않아.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는 게 좋겠어.

    방으로 돌아간 카시스는 수도로 떠날 채비를 했다.

    * * *

    카시스는 갔으려나?

    아일라는 정원에서 멜로디와 차를 마시며 카시스가 출발했는지 신경 쓰고 있다가 멜로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정말 그 인간 남자와 각인이 된 건가요?”

    “그렇게 됐어.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라니요?”

    “정말 어쩌다 보니 된 거니까.”

    카시스를 만나고 그의 이마와 내 이마에 나타난 각인을 보고 나서야 그와 각인 됐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데 멜로디는 왜 남은 거야?”

    제이드를 따라갈 줄 알았는데.

    “공주님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요. 그 머리색과 눈동자색은 어떻게 바꾼 건가요?”

    “마법으로 바꾼 건데 어때? 이상해?”

    카시스가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꿔야 나갈 수 있다고 해서 계속 바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물약으로 바꿨지만 이곳에서는 마법사가 제게 직접 마법을 걸어서 바꿔 줬다.

    뭐 그 덕분에 시간 맞춰서 마법 물약을 먹지 않아서 편하지만.

    “멜로디도 바꾸고 밖에 나가자. 이곳 구경시켜 줄게.”

    “아니요, 굳이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꿀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카시스는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런데 멜로디, 언제까지 존대를 할 거야?”

    “잊으셨나요? 당신은 아틀란의 하나뿐인 공주님이세요. 어릴 때처럼 허물없이 지낼 수는 없어요.”

    “지금은 우리끼리잖아. 뭐 어때서 그래?”

    아일라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하네요. 우리 공주님은.”

    “안녕하세요?”

    낯선 목소리에 아일라가 고개를 돌렸고 멜로디도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일라도 처음 보는 금발의 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

    “벨로체 자작님.”

    벨로체 자작?

    “오랜만이네요. 로체스터 영애.”

    영애? 뭍으로 올라와 배운 것이 있으니 영애가 귀족가의 소녀들을 말한다는 것을 이제 저도 알고 있다. 클로에가 귀족이었어?

    그건 그렇고, 서로 아는 사이인 건가?

    “자작님이 왜 이곳에 계신 건가요?”

    “러셀 후작님께 듣지 못한 건가요?”

    “······.”

    “설마? 아직인가요?”

    클로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못 하자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인가요?”

    응? 뭐지? 분위가 왜 이래?

    아일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뭐야? 뭐냐고?

    “다 지난 일인데. 아직도 영애를 내버려 두고 있는 러셀 후작님이 대단하면서 불쌍하네요. 영애의 잘못이 아닌 걸로 더 이상 죄스러워하지 마세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클로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이며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뭐? 두 사람의 문제이니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가까이에서 한번 보고 싶었어요. 대공 전하의 현재 연인인 아가씨를요.”

    나? 나?

    멜로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일라의 앞을 막으며 경계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나를 왜?

    아일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왜 나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

    “전하의 반응이 저와는 달라서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어요. 대체 어떤 아가씨이기에 대공 전하께서 직접 제 약혼녀를 쳐냈는지 알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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