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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5화 (65/100)
  • 65화

    “앞으로도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나의 공주님.”

    잠이 들어 있는 아일라의 이마로 그의 입술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짧은 입맞춤을 한 카시스는 그녀의 방을 나서며 클로에에게 아일라를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에게는 할 일이 태산이었다. 폐하께 파르미온 공주와 파혼하겠다는 서신을 보내고 파르미온 공주를 돌려보내며 파르미온 왕국에도 파혼 통보를 해야 했다.

    데프리카 백작과 그의 부인인 시녀장 데프리카 백작 부인의 일도, 프란츠 백작 영식의 일도 처리해야 했다.

    “할 일이 태산이군.”

    내가 너무 조용히 있기는 했지. 그러니 숨죽이고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겠지.

    “미카엘, 마을 상황은?”

    “웬만큼 정리됐습니다. 윈터우드 경이 아직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만.”

    “칼리스타에 마법사는 이제키엘 혼자니까.”

    보지 않아도 마법으로 갖은 고생을 하며 마을을 복구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선했다.

    “쉬면서 하라고 전해. 가능하면 마을을 복구하는 데 기사들을 더 투입시키고.”

    “예.”

    다른 일도 중요하지만 물바다가 된 영지를 복구시키는 일도 중요했다. 그러니 시간과 인력 낭비라고 할 수는 없지.

    설마 땅 밑에 있는 수로의 물을 끌어올려 터트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마린족은 물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물을 끌어올려 터트릴 수도 있군.

    그러고 보니 아일라도 훈련할 때 주위에 있는 연못의 물을 끌어모았었지.

    바닷가에 있었으면 바닷물 전부를 끌어모으겠어. 마린족과 진심으로 싸우게 되면 제가 아무리 마검사라고 할지라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아니, 승산이 있을까?

    “여태껏 다니엘이 수로를 끌어올려 터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군. 땅 밑에 있는 물도 조종해 끌어올릴 수 있었으면 진작 말해 주지 그랬나.”

    “송구합니다, 전하. 저는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제이드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 못 했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니 어느새 다니엘이 카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 아니 샤우드는 제이드의 어린 동생 시절만 기억에 있었다. 성장해 강해져 있는 제이드는 샤우드에게 낯설었다.

    “가족을 만난 소감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고 그들에게는 저는 죽은 사람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름이 샤우드라고 했던가? 그것이 네 진짜 이름이겠지? 다니엘. 아니 이제 다니엘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조용히 침묵하던 다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하지만 지금은 샤우드라는 이름보다 전하께서 지어 주신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자주 들어서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가족과 함께 돌아갈 생각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제게 더 낯선 존재들입니다.”

    다니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10년이 훨씬 지났는데 낯설지 않을 수야 없겠지.

    “네가 가족들과 돌아가든지 이곳에 남든지 나는 관여하지 않을 거다.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그것은 네가 선택하는 것이니. 하나, 아틀란이 위험하다는데 너라면 그냥 보고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일라는, 아일라만은 붙잡을 거다.

    아일라만은 보낼 수가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해서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역시, 고향이 걱정이 되나 보군.

    “그렇게 해라. 고향으로 가서 되찾는 것을 도울 생각인가 보군.”

    “그것도 중요하지만, 따로 알아볼 것이 있습니다.”

    “따로 알아볼 것?”

    “죽음의 바다에 사는 마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왕비님께서 왕께서 저주에 걸렸다고 하셨으니 마녀에 대해 조사하면서 저주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죽음의 바다로 쫓겨나 살고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그곳에 살아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죽음의 바다는 본래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그곳으로 가서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죽음의 바다, 그리고 마녀.

    “그렇게 하도록 해. 살아 있다면 잡도록 하고.”

    그것이 아일라를 위한 것이겠지. 잡아서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아일라가 힘들어하지 않게 하려면 뭐든 해야 한다.

    그 시각, 아일라는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잠을 조금 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오래 잠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아버지가 변한 게 저주 때문이었다니? 악시온 때문이었다니?”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못 해. 바이칼 악시온과 슈레더 악시온.

    “화가 나.”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괜찮으실 리가 없잖아. 겉으로는 괜찮은 체하시지만.”

    아버지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해.

    “죽음의 바다의 마녀.”

    어릴 적 어머니가 늘 들려주던 인어와 인간과의 사랑 이야기가 어머니의 친구의 이야기였다니. 실은 행복한 결말이 아니었다니. 혹시, 카시스도…….

    아니야. 카시스는 달라. 절대로 배신할 리가 없어.

    아일라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생각을 달리했다.

    “카시스는 배신하지 않을 거야. 카시스는 그 인어족이 만난 사람하고 다를 거야. 그런 느낌이 들어.”

    카시스를 믿고 싶어. 아니, 믿어.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믿어. 각인을 없애지 않고 내 반려로 남고 싶다고 했던 그의 말이 진심일 것이라고 믿어. 나는 불행해지지 않을 거야.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해. 아버지도 아틀란도 되찾을 거야.

    “아버지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실 거야.”

    그러면 카시스는 인정해 달라고, 받아 달라고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인간들과 교류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 미워하는 상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내가 원하던 반려는 카시스 같은 사람이야. 그가 이제 내 반려로 남고 싶다고 했으니까. 각인을 해제할 필요도, 새로운 반려를 찾을 필요도 없어. 나는 카시스와 함께 살아갈 거야.”

    종족이 달라서 이루어질 수 없다니, 그건 말이 안 돼. 이제 생각해 보면 언약식을 하지도 않았는데 카시스와 각인이 됐다는 것은 바다의 신이 카시스를 내 반려로 허락해 줬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 분명 그럴 거야. 바다의 신 포르세우스 님이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각인이 생길 리가 없는데 왜 여태껏 포르세우스 님이 허락했다는 가능성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걸까.

    “카시스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이었을 거야. 원하지도 않은 각인을 만들었다는 미안함. 나는 계속 미안해했으니까.”

    카시스 옆에 계속 있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와 아틀란을 되찾아야 해.

    세레스는 앤드류가와 함께 왔던 병사들을 데리고 바다로 돌아갔다. 지금 이곳에 남은 것은 멜로디뿐이었다. 세레스가 돌아가고 나흘 후, 이른 아침부터 밖에서 들리는 시끄럽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잠에서 깬 아일라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저 여자. 어디 가는 거지? 기사들이 강제로 마차를 태우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나가 볼까?”

    아일라가 밖으로 나갔다. 마차와 가까워질수록 크레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아일라의 예상대로 기사들이 크레타를 강제로 마차에 태우고 있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난 돌아가지 않아! 안 간다고!”

    “대공 전하의 명입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전하를 봬야겠어!!”

    “송구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파르미온의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지금 이 마차를 타고 메르바 항구로 가셔서 파르미온행 배를 타셔야 합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감히 기사들 따위가 누구에게 손대는 거야! 나는 왕족이야!”

    윌리엄은 소리치는 크레타를 보며 속으로 낮은 한숨을 내쉬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다시 크레타를 잡아 마차에 태우려고 했다.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난 대공비가 될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대공비 될 수 없으니 얌전히 돌아가시라는 말입니다.”

    윌리엄이 무심하게 받아쳤지만 크레타는 막무가내였다.

    “네까짓 것이 감히! 내가 대공비가 되는 것을 막겠다고!”

    정말이지 성격도 나쁘고 막무가내야. 아무리 상대가 왕국의 공주이고 제가 기사기는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것도 후작이니 낮은 지위도 아닌데, 이 공주는 눈에 뵈는 것이 없나 보다.

    “전하께서 이미 파르미온 왕국에 파혼서를 보냈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을 리가 없어요!”

    “폐하의 허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공주님의 파혼을 결정하셨으니 그리 될 겁니다.”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면 직접 파르미온 왕국으로 들어가 환영족의 잔당들을 찾는다며 파르미온을 뒤집어 놓을 판이다.

    “공주님께서는 선을 넘었습니다.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린 대가라고 생각하십시오.”

    “건드리면 안 될 것? 그딴 게 어디 있어? 나는 여태껏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어!”

    “그건 파르미온 왕국에서나 그렇지, 여기는 제국입니다. 공주님의 모국에서와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나 보군요.”

    “뭐라고!?”

    “단장님!”

    크레타가 윌리엄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하는 게 어떤가요? 보기 흉합니다. 아무 데나 화풀이하지 마세요.”

    “아가씨?”

    그때 크레타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윌리엄이 미간을 꿈틀대며 아일라를 바라보았다.

    “왜 나오셨습니까?”

    “밖이 시끄러워서요.”

    “죄송합니다. 파르미온의 공주를 보내려는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카시스처럼 정중하고 친절한 것 같아. 언제나 제게 예의를 갖춰 줬다.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카시스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늘 제게 예의를 갖춰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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