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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4화 (64/100)

64화

“조금 진정이 됐습니까?”

끄덕끄덕!

“흥분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대를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대가 내게 화를 내도. 비난을 해도 그대가 아틀란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겁니다. 지금 그곳은 그대에게 위험해 보이니 말입니다.”

카시스는 세레스와 제이드를 한 번씩 보고 아일라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저는 아일라를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습니다. 곁에 있어야 제가 그대를 지킬 수 있습니다.”

카시스는 제 시선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어야 지킬 수 있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일라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일라, 너는 이곳에 있는 것이 좋겠구나.”

“어머니?”

“네 아버지하고는 내가 이야기할 거란다.”

아슐레이를 막는 것은 저여야만 한다.

아일라가 그이와 부딪히게 해서는 안 돼. 설득이 안 된다면 맞설 수밖에 없어.

지금의 아슐레이에게 말이 통할지는 모르지만, 시도는 해 봐야겠지. 아직 아슐레이의 마음과 정신이 남아 있기를 바랄 수밖에.

“어머니.”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은 나도 반대란다. 하지만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마음도 있단다. 네게 이야기의 결말을 행복하게 바꿔 들려준 내 잘못도 있겠지. 그에 대한 책임으로 난 인간과 생을 함께 하겠다는 네 선택을 반대하지만, 네 아버지와 함께 너를 몰아붙이는 짓은 하지 않을 거란다. 나는 네 행복을 원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아틀란으로 돌아가야겠구나.”

“어머니?”

“네 아버지는 내가 막을 거란다.”

지금 아틀란은 악시온에게 장악되었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런데 돌아가시겠다고?

“안 돼요. 위험해요.”

“지금 네 아버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아직 내 목소리가 그이에게 닿기를 바랄 수밖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너무 위험해요.”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괜찮을 테니. 물론 네 아버지도 괜찮을 거란다. 어미를 믿어 보렴.”

정말은 괜찮지 않겠지만 지금은 아일라를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유일한 아틀란의 후계자를 악시온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으니까.

“아일라, 아틀란으로 돌아가기 전에 네게 해 줄 말이 있단다. 앞으로는 네가 물을 조종하는 힘을 다루는 게 전보다는 수월할 거란다. 제대로 다루려면 훈련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야.”

“제대로 제어되지 않던 제힘을 이제 다룰 수 있다는 말이에요? 어머니.”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전보다야 힘을 다루기 쉬울 거라는 말이란다.”

아일라가 멍하니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금 어머니의 말씀은, 항상 표적을 빗나가던 것이 연습하면 괜찮아진다는 건가?

여태껏 아무리 연습해도 표적을 맞추질 못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는다는 건가?

“그러니 더 이상 혼자서 물을 다루는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고 속상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말을 들은 카시스는 아일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힘의 봉인을 푼다고 했던 세레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동안은 아일라의 힘이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어하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그럼 이제는 어디로 튈지 모르던 힘을 제어할 수 있다는 말인 건가? 아일라가 힘을 다룰 수 있건 없건 그건 나중에 문제다.

“아일라, 그만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리하면 안 됩니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아요.”

“이 방에 오기 전에 저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지 않아요. 이 정도로 쓰러질 정도로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카시스는 가만 보면 나를 과보호하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저택 안에서도 호위 기사들을 달고 다니라고 하고.

물만 있으면 나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저택 안에 호수도 있고. 카시스는 걱정이 너무 심해.

“그만 방으로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렴. 아일라.”

“저는 어머니와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틀란의 상황도 더 알고 싶고요.”

“지금은 쉬는 것이 좋단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틀란과 아버지에 대한 것은 내게 맡기거라.”

어머니에게 맡기라고 해도…… 나는 아틀란의 공주인걸. 내가 아무리 가출했다고 하지만 아틀란과 아버지 일을 모른 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일라는 고개를 숙이고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일라.”

카시스는 아일라의 턱을 받쳐 들고는 입술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꽉 깨문 입술을 살살 떼어 냈다.

“아일라, 만일 제 도움이 필요하면 돕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제발 쉬십시오.”

카시스는 정말 상냥하고 자상해.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자상하고 상냥해.

“정말 괜찮은데.”

“괜찮지 않습니다. 조금 전보다 안색이 나쁩니다.”

내 안색이 안 좋다고? 그렇다면 그건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악시온에게 넘어가고 아버지가 저주에 걸려 조종당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거다.

아버지가 걱정 돼.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대가 쉬고 나면 천천히 앞으로의 일을 상의합시다.”

상의를 하자고? 카시스가 도와준다고? 도와준다니 고맙지만, 아틀란은 바닷속에 있는데.

카시스가 무슨 수로 도와준다는 것일까.

카시스가 확실히 강하기는 해. 하지만 바닷속에서의 싸움은 카시스에게 불리할 거야. 인간은 우리 마린족처럼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으니까.

“아일라를 방으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당신은 다른 인간들과 다른 것 같군요.”

“다르기는 뭐가. 인간들이 다 똑같지.”

제이드가 불만스럽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세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이드를 불렀다. 카시스는 제이드의 말을 듣고는 상관하지 않고 아일라를 데리고 그녀의 방으로 갔다.

“저 아가씨인가요? 연회장에 나타났었다는 전하의 연인이?”

“언제까지 있을 생각입니까? 벨로체 자작.”

“러셀 후작 각하는 여전히 저를 싫어하시네요.”

“제가 벨로체 자작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습니다.”

당신이 벨로체인 이상, 하고 덧붙이고는 뒤돌아가려고 하다가 멈춰 섰다.

“저는 자작이 여기 있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그대는 이미 전하를 배신했습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정보를 넘겨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지만, 마지막에 전하까지 배신하고 검을 겨누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때나마 전하와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제 마음을 배신한 것도 아나스타샤 벨로체였다.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십시오. 저는 벨로체 자작이 칼리스타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전하와 얽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폐하의 명이지만 후작 각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러셀 후작 각하.”

윌리엄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떼어 냈고 아나스타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도 말씀드렸지만, 대공 전하와 나의 인연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다. 다시 억지로 이어 붙인다고 이어지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파르미온의 공주님이 어리석은 짓을 했네. 사랑받고 자라서 성격도 있고. 제멋대로의 공주님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설마, 파르미온 국왕이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플루투스 제국의 황자이자 대공 전하를. 왕국의 국왕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을.

아나스타샤도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카시스가 아일라를 방으로 데려와 자라며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렇게 이불까지 덮어 주었건만, 아일라는 눈을 멀뚱히 뜨고 누워 있었다.

“자라고 누웠는데 왜 그리 눈이 초롱초롱합니까?”

“잠이 안 오는데 어떻게 자요. 아직 밤도 아니라고요? 밖이 아직 밝은데 어떻게 자라는 거예요.”

“잠이 안 오더라도 눈을 감고 있어 보십시오. 그렇게 눈을 뜨고 있으니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카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커다란 손으로 아일라의 눈을 가려 줬다.

“이거 치워 줘요. 답답하다고요.”

커다란 손이 눈을 가리자 답답함에 아일라가 카시스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 내려는 아일라의 손을 감싼 카시스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지금 안색이 말이 아닙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잠이 오지 않더라도 눈을 감고 계십시오. 오늘 너무 많은 말을 들어 힘들 겁니다.”

“전 아무렇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의 종족과 가족의 일인데. 아무리 말로는 괜찮다고 해도 마음이 힘들 겁니다. 그러니 제 바람은 지금 그대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는 겁니다. 제 부탁이 그리 어려운 겁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너무 상냥하고 자상해요.”

아일라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그건 그대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요, 제가 만난 사람 중 제일 친절하고 자상해요.”

“몇 명이나 만났다고.”

카시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낮게 속삭였다.

그녀는 저에 대해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다. 제가 여태껏 무엇을 감추고 살아왔는지 아일라는 알지 못한다.

저는 지금껏 제 감정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능숙하게 감춰 왔다.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아일라를 만나고는 그게 되지 않는다.

아일라와 연관이 되면 신경 쓰이고 화가 나고 걱정되고 곁에 두고 싶다.

잠이 안 오다고 하더니, 어느새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든 아일라의 위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일라. 진정으로 그대를 곁에 두고 싶고 욕심이 나는 것 압니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그대가 처음입니다.”

아나스타샤 벨로체에게도 들지 않았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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