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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3화 (63/100)

63화

“제가 다른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 줘요. 이번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돕고 싶어요. 바다에서 마물과 싸운다거나 그럴 때요.”

저는 마린족이니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그 실력으로 말입니까?”

“조, 좋아질 거예요. 계속 연습하고 있으니까요.”

“바다에서 마물과 싸우는 일이 생겨도 그대가 도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발판이 있거나 마법으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하면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도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머니께 갈래요.”

아직 어머니께 아틀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난 마법으로 머리와 눈동자색이 바뀌어 있을 텐데 어머니는 나를 어떻게 알아보신 거지?

“그럼 함께 갑시다.”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세레스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세레스가 머무는 방 앞을 지키는 마린족 병사들이 머리와 눈색이 다른 아일라를 보며 머뭇거리는데 뒤에서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맞으니 문 열어 드려라.”

“제이드.”

아일라가 고개를 돌려 반갑게 제이드를 불렀다. 그러자 카시스의 표정이 굳으며 한쪽 눈썹 끝이 까딱 치켜 올라가 반반한 미간에 실금이 갔다. 아일라는 카시스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카시스의 표정의 본 제이드의 미간이 꿈틀댔다.

“아일라.”

“어?”

카시스는 제이드를 바라보다 아일라의 어깨를 감싸며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다른 사내의 이름을 그렇게 반갑게 부르지 마십시오.”

“제이드는 제 호위이자 친구라니까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습니까?”

“네?”

지금 이거 질투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저번에 제이드는 각인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이러지?

“들어오지 않고 뭐 하니?”

그때 세레스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

“들어오렴. 그대도 들어오세요.”

세레스가 아일라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카시스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세레스의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지만 조용한 적막감이 돌았다. 클로에와 라피스가 차와 다과를 가져와 놓고는 방을 나갔다.

“다행히 안색이 한결 좋아졌구나.”

차를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간들이 마시는 차 맛도 나쁘지 않고.”

“저, 어머니. 제가 깨어나자마자 정신이 없어서 묻지 못했는데. 저인 줄은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머리와 눈동자색이 바뀌어 있었을 텐데요.”

“후후.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니? 설령 머리와 눈동자색이 바뀌었다고 한들 네 모습이 바뀐 것은 아니지 않니? 그러니 당연히 알아볼 수 있단다.”

“머리와 눈동자색이 바뀌어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한 녀석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카시스는 아일라를 막아섰던 제 수하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했다.

“모습이 변했어도 제랄드와 에리얼이 잃어버린 아들 샤우드를 알아봤듯이 말이다.”

세레스의 말에 아일라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샤우드, 그게 누구지?

“여기서는 다르게 부르던가? 이름이 다니엘이었던가?”

“다니엘이요? 그 이름이 왜.”

잠깐만. 방금 어머니가 제랄드 경과 에리얼의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앤드류 가의 잃어버린 아들이면.

아일라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제이드를 돌아봤다.

제이드의 형이잖아! 죽은 게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다니엘 경이 제이드의 이름을 들었을 때 반응이 조금 이상했던 것 같았는데 그래서였구나.

“왜 그렇게 보십니까?”

“형 찾은 거 축하해.”

“웃기지 마십시오! 저는 그자를 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왜 나한테 성질이야? 나는 다니엘 경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이라기에 다시 만나서 축하한다고 한 건데. 형이 살아 있어서 다시 만난 게 기쁘지 않은 건가?

아무튼 성격 나쁘다니까.

뭐, 그래도 나도 처음엔 그가 나와 같은 마린족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으니까.

다니엘 경이 제이드의 친형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그래도 죽은 줄 알았던 형이 살아 있잖아.”

“저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나저나 그 인간은 왜 달고 오신 겁니까?”

“제이드 제발 말 좀 예쁘게 해. 그리고 여기는 카시스의 집이야. 집주인이 제집에 있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잖아. 무례하게 굴지 마.”

아무리 인간들이 싫어도 그렇지, 카시스도 있는데 너무 무례하잖아.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있는데.

“인간들에게 지킬 예의는 없습니다.”

“이건 친우가 아니라 공주로서 하는 명령이야.”

아일라의 말에 제이드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정말이지 입이 험하다니까.

“날 창피하게 만들지 마. 미안해요, 카시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종족이 인간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을 하루 이틀 겪어 본 것이 아니니.”

“그래도 미안해요.”

“저도 대신 사과하죠.”

“왕비님!”

“그만하십시오, 제이드 경. 더 이상 무례하게 굴면 나가라 할 터이니.”

세레스의 엄한 목소리에 제이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께는 꼼짝도 못 하면서 나한텐 안 그런단 말이야. 이래 봬도 공주인데.”

“억울하면 여왕이 되십시오. 제 우선순위는 왕과 왕비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말 안 해도 될 거야.”

“제이드 경. 아일라. 그만하렴. 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아틀란에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되어서겠지.”

세레스는 제이드와 아일라를 제지한 후에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어머니께서 이곳에 오신 게 이상해서요. 아틀란이 악시온에게 장악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그래, 어찌 된 일인지 너도 알아야겠지. 그전에 내가 네가 어릴 적부터 들려준 인어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기억하니?”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인 걸요.”

“그 이야기부터 해 줘야겠구나. 사실은 그건 결말을 내가 마음대로 바꾼 비극적인 이야기란다.”

“네?”

“현실은 그리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레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 속 인어는 내 친구였단다.”

“네?”

“그리고 지금은…… 검은 바다, 죽음의 바다의 마녀란다.”

검은 바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해서 죽음의 바다라고 불리는 곳. 그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나 지금 굉장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속 인어가 어머니 친구라고? 그런데 마녀? 왜?

아일라의 머릿속에는 의문의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다.

“이름은 페트라. 네게 들려준 이야기 속의 인어이며, 인간에게 버림받고 아기까지 잃었지. 미쳐서 제 종족까지 잡아먹어 네 아버지와 내가 죽음의 바다로 쫓아낸 마녀란다.”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네?”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이기에 진실을 말해 줄 수 없었단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 거짓된 결말이 너에게 인간들에 대한 헛된 동경을 품게 만들었고, 허황된 꿈을 꾸게 했단다. 내 잘못이란다.”

“그게, 무슨.”

어릴 적 어머니께서 들려준 이야기가 진짜 있던 일이라고?

“이야기 속의 인어는 내 친구였지만 상대방은 내 친구를 배신했단다. 그리고 화가 난 인어족의 왕은 페트라를 감금했지. 하지만, 페트라는 임신을 한 상태였단다.”

배신을 당했다고? 임신을 했었다고?

“하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말았지. 인어족의 속성을 전혀 타고 나지 못한 아기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페트라는 슬픔과 분노에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단다. 같은 종족을 죽이고 잡아먹는 마녀가 되어 버렸지.”

아일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마린족과 인어족이 힘을 합쳐서 죽음의 바다로 쫓아내고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단다. 그때, 나는 너를 임신하고 있었고 페트라는 마지막에 내게 저주를 걸었단다. 아니, 네게 저주를 걸려고 했던 거겠지. 하지만 그 저주를 네 아버지가 대신 맞고 말았단다.”

아버지가, 저주를 대신 맞았다고?

“저주요? 아버지가요?”

“네 아버지가 변한 이유가, 바로 그 저주 때문이란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괜찮다고, 저주는 효과가 없다고 한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1년 전 쓰러진 이유도 그 저주 때문이었단다. 저주 때문에 약해진 틈을 악시온이 노리고 네 아버지를 뜻대로 움직인 것이지.”

“아버지가 악시온에게 조종당할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는 강한 분이야.

“저주 때문이란다. 저주가 정신을 갉아먹은 틈을 악시온이 노린 거야.”

“아버지가 저주에 당했을 리가 없어요. 저주도 이겨 낼 분이라고요!”

“아일라.”

“제가 아버지와 만나야겠어요.”

아버지가 변한 게 저주 때문이라니. 악시온에게 조종당한 거라니.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믿을 수 없어. 아버지가 악시온의 말대로 할 리가 없다고!

“아일라.”

“아일라,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요. 아틀란으로 가서.”

“진정하십시오, 아일라.”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아일라를 카시스가 붙잡아 품속에 가뒀다.

“이것 좀 놔 봐요. 내가 아틀란으로 돌아가서 직접 봐야겠다고요.”

“보낼 수 없습니다. 보내지 않을 겁니다.”

“내가 가겠다는데 당신이 왜 말려요! 당신이 뭔데!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요!”

“아일라, 지금 너무 흥분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아일라의 등을 쓸어 주며 카시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아일라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나서야 카시스의 팔에 힘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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