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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62화 (62/100)
  • 62화

    카시스가 나가고도 한참을 누워서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던 아일라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잠이 안 와.”

    쉬라고 나가 줬는데 심장이 뛰어서 쉴 수가 없었다. 이유는 카시스가 한 말 때문이었다.

    카시스는 진심일까? 진심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각인을 없애고 싶지 않다고 한 말, 정말일까.”

    나야 반려를 찾지 않아도 돼서 좋고 강한 그가 내 반려가 되는 것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믿기지가 않아.”

    대체 언제부터? 나는 전혀 몰랐는데.

    “믿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카시스가 저를 좋아해 주면 다른 각인자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 너무 좋아! 꺄아!

    아일라는 침대에 다시 누워 이불을 끌어안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뒹굴거렸다.

    뭍으로 올라와 지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그동안 본 사람들 중 카시스보다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잘생기기만 했나? 친절하지, 자상하지, 강하지.”

    그럼 난 이제 각인을 없앨 방법을 찾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어머니께 아버지 설득하는 걸 도와달라고 할까? 어머니라면 내 말을 들어주실 거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 말은 들어주실 테니까. 내가 카시스와 혼인한다고 해서 마린족을 배신하는 게 아니잖아. 난 내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뿐이야. 꿈에 그리던 왕자님을 만난 거라고.

    “나도 카시스와 가짜가 아닌 진짜 연인으로 지내고 싶어.”

    나와 카시스가 맺어지면 마린족이 가진 인간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바꿀 수 있을 거야. 나쁘고 싫은 느낌의 사람들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 카시스처럼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어.

    “카시스가 내 반려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

    난 카시스의 마음이 진심이면 나는 카시스와 혼인해서 마린족과 인간이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어. 그 전에 아틀란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아야 해. 조금만 더 이러고 이따가 어머니께 여쭤보러 가자.

    어머니께서도 이야기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아일라는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가씨. 아일라 아가씨.”

    “으음.”

    “아일라 아가씨, 일어나세요.”

    “음. 클로에.”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하지만 식사는 하고 주무셔야죠.”

    식사?

    “저녁 시간이에요. 그동안 정신을 잃고 있으셔서 드시지 못하셨잖아요.”

    아 참, 그랬지. 그런데 난 왜 배고픈 줄을 몰랐지?

    “꼬르륵!”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배고픔을 알리는 소리에 아일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왜 이렇게 크게 소리가 나는 건데.

    내가 배고픈 걸 몰랐던 은 어머니를 만난 반가움과 카시스가 한 말이 당황스러워서가 아니었을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이렇게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내면 내가 창피하잖아.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클로에의 뒤로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라피스는 클로에와 함께 탁자 위에 식사를 놓아줬다. 그런데.

    “묽은 수프네. 다른 거 없어?”

    “아가씨께서 며칠이나 정신을 잃고 있어서 식사를 못 하셨어요. 갑자기 음식이 들어가면 속이 놀랄 수 있으니 지금은 묽은 수프를 드셔야 돼요.”

    “괜찮은데.”

    “안 돼요. 속병이 날 수 있으니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은 이렇게 드시는 것이 좋아요. 이걸 다 드시면 조금은 더 드릴 수 있어요.”

    “조금만?”

    “아무리 묽은 스프라도 며칠씩 굶은 상태에서 많이 드시면 좋지 않아요.”

    하아, 어쩔 수 없지. 다른 것도 아니고 나를 걱정해서 그러니까. 이것만 먹어서 배가 찰 것 같지는 않지만, 내일 점심부터는 제대로 된 것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아가씨께서 깨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한 줄 몰라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

    셀레스와 세레스토와 플라톤이 섞인 것인 줄 알았으면 나도 손을 안 댔다고.

    우리가 그 세 개를 섞지 않는 건 마린족에겐 독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는데 인간들에게는 정반대인 건가? 해독제로 그 세 가지를 섞은 걸 보면 우리하고는 다르다는 거겠지.

    “클라우디스 경들도 징계를 받았어요.”

    “콜록콜록! 뭐? 왜?”

    아일라는 스프를 막 입 안에 넣었다가 사레에 들려 기침을 하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콜록! 콜록! 징계라니? 대체 왜?”

    “곁에 있었으면서도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대답은 클로에가 아닌 라피스에게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건 기사들 잘못이 아닌데. 나도 내가 쓰러질 줄 몰랐듯이.”

    “그건 핑계일 뿐이에요. 전하께서 기사님들을 아가씨 곁에 두었다는 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키라는 거니까요.”

    ‘그건 저에게도 내려진 명이었고요.’하며 작게 속삭인 말은 아일라에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이 먼저 맛봤을 때는 괜찮았으니 그들 잘못이 아니야.”

    그건 우리 마린족들에게만 독이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그러니 기사들이 먹었을 때는 괜찮았던 것은 당연한 건데. 왜 그런 걸로 징계를 주고 그래?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그건 나한테만 위험한 약이었단 말이야.”

    “네?”

    클로에는 아일라의 말에 무심코 되물었다.

    “카시스를 만나야겠어.”

    “아가씨,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리고 식사를 마저 하셔야죠.”

    “그럼 카시스한테 오라고 해 줘.”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면서 왜 디오스 경과 아키오스 경에게 징계를 내린 거야.

    “지금 당장. 안 오면 내가 간다고 해. 막아도 소용없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을 나가서 찾아갈 거니까.”

    “알았어요. 제가 전하께 아가씨께서 찾으신다 전하겠습니다. 그러니 드시던 것 마저 드시고 계세요.”

    클로에는 라피스에게 아일라를 부탁하고는 방을 나가 카시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카시스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려는데 라피스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아가씨, 아직 방 밖으로 나가시는 것은 무립니다.”

    “카시스가 나를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어? 그래?”

    아일라가 라피스와 클로에를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바쁘셔서 오시지 못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겠다고.”

    네 시간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이 정도면 많이 기다린 거라고.

    달깍!

    “갈 필요 없습니다. 제가 왔으니.”

    그때 문이 열리며 카시스가 들어왔다. 그는 클로에와 라피스에게 나가 보라고 눈짓했다.

    클로에와 라피스가 방을 나가자 카시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디오스 경과 아키오스 경께 징계를 내렸어요?”

    “그것 때문에 저를 보자 했습니까?”

    “당연하죠. 그 두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징계를 내려요.”

    “왜 잘못이 없습니까? 그대와 가까이에 있으면서 호위했음에도 지키지 못했는데.”

    “그건 불가항력이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요. 마린족에게만 위험한 것이었잖아요. 그말을 듣고도 왜 징계를 내려요.”

    “그래서 근신으로 끝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호위로서 그대를 지키지 못한 것은 마찬 가집니다. 그리고 그대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지 않으면 기사단의 기강이 흔들립니다.”

    “겨우 그 정도로……!”

    “겨우 그 정도로가 아닙니다. 몇몇을 봐주면 다른 녀석들도 봐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사단 전체의 기강이 흔들리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둘에게 근신을 내린 겁니다.”

    그래도 그들 잘못이 아닌데 부당한 것 아닌가.

    “마린족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이곳의 군법과 지켜야 할 룰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가 무너져 버리면 겉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럼 기사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죠. 군의 통솔자가 기사들을 통솔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그 가문과 나라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니 카시스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리 오래 근신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은 그들의 잘못도 아닌 일로 징계를 내리는 건 부당하다는 거예요.”

    “기사들은 언제 어떠한 상황이라도 호위대상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기치 못한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클라우디스 경들은 이미 제가 내린 처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클라우디스 경들의 처벌 건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마십시오.”

    미안하다. 그들이 잘못이 아닌 일로 징계를 받는 것이. 하지만 인간 세상에는 인간 세상의 법이 있겠지.

    “그럼 두 기사는 다시 제 호위가 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저와 윌리엄을 제외하고는 그 둘이 제일 뛰어납니다. 그러니 근신이 끝나면 그 둘을 다시 그대의 호위로 붙일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둘의 근신이 풀릴 때까지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째서 말이 그렇게 되는 거지?

    “대답 안 해 줄 겁니까?”

    “제가 함께 나간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시녀장은?”

    “그대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신세를 지고 있으니 도와주고 싶었는데 돕기는커녕 걱정만 시켰어. 설마 그게 나에게 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다음 기회가 있으면 그때는 반드시 도움이 되겠어.

    “시녀장이 감옥에 있으면 시녀장 자리가 비어 있겠네요.”

    “비어 있습니다. 시녀장 자리는 잠시 비워 둘 생각입니다.”

    “미안해요.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걱정만 끼쳐서요.”

    아일라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제가 싫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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