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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55화 (55/100)
  • 55화

    “독이라고?”

    “인간들한테도 아무리 좋은 약재들이라도 서로 섞이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약재들이 있을 겁니다. 저희 마린족에게는 셀레스와 셀레스토, 그리고 플라톤이 섞이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아일라가 쓰러진 건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플라톤은 진통제와 촉진제, 두 가지 효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는 힘을 일순간 높이는 약으로 만들 때 사용합니다. 힘도 높이고 진통제 역할을 같이 하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것도 없지요. 하지만 반작용으로 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잘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공주님의 몸속에서 반작용으로 공주님이 가진 힘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라면······.

    “그래서 아일라의 상태는 어떻지?”

    “솔직히 이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위험하다고?”

    “셀레스와 셀레스토가 플라톤과 섞였을 때 마린족에게 독이 되는 이유는 셀레스와 셀레스토의 효능은 사라지고 플라톤의 효능을 높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힘이 폭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그 세 가지를 함께 사용하지 않습니다.”

    설마 그 세 가지를 섞은 것이 카르마 독의 해독제일 줄이야. 인간들이 먹을 때는 단지 카르마 독의 해독제일 뿐이지만, 하필 마린족인 아일라가 먹은 것이 문제였다.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가씨의 힘을 누르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아틀란으로 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아가씨께서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일라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다니엘의 말대로 이대로 두면 위험한 것이라면 나는······.

    카시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주먹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전에 뭍으로 올라온 마린족을 마주치셨다 하셨습니다.”

    “못 찾았다.”

    “빨리 찾으십시오. 그 둘이라면 아틀란으로 연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내 잘못이니 내가 찾지. 카르마 해독제가 마린족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72시간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찾는다면 아무리 늦어도 20시간 안에 찾아야 할 겁니다.”

    만일 아틀란으로 연락해서 방법을 알아내 여기서 해결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한다면 공주님은 죽고 말 거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가 이곳에서 죽으면 마린족과 인간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레안드로, 지금 당장 찾아라.”

    레안드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 두 사람이 해결 방법을 알고 있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둘이 아틀란과 연락할 수 있기를 바라야죠. 그리고 이곳에서 해결이 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이 누워 있는 아일라에게 손을 뻗자 그녀의 주위를 푸른색 막이 감쌌다.

    “제가 아가씨의 힘을 누르고 있을 겁니다. 이대로 커져서 방출되면 더 위험해집니다. 하나 더 말하자면,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플라톤의 반작용을 아가씨께서 겪으실 수 있습니다.”

    파르미온의 공주.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그러십시오.”

    아일라의 방을 나온 카시스는 크레타의 방으로 향했다.

    “한 발자국도 못 나오게 했겠지.”

    “예, 윌리엄 경이 직접 막고 계십니다.”

    미카엘이 카시스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모국으로 돌아가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크레타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카시스의 얼굴이 차게 식으며 굳어져 갔다.

    “비켜! 비키라는 말 안 들려? 내가 내 발로 못 갈 곳은 없어!”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공주님. 전하의 명입니다. 앞으로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실 수 없습니다.”

    윌리엄이 밖으로 나오려는 크레타를 막고 있었다.

    “뭐라고!? 나는 파르미온의 공주야! 대공비가 될 거라고! 내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윌리엄 경이 무사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네, 공주. 윌리엄 경은 내 명을 따르는 것뿐이니까.”

    크레타를 막아서고 있던 윌리엄이 한발 물러나 비켜서며 목례를 했다.

    “공주야말로 뭐를 믿고 그런 짓을 한 거지?”

    “제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죠?”

    “내 연인 아일라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하-.”

    카시스는 실소를 흘렸다.

    “공주와 내 연인이 쓰러진 것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다라? 셰도우를 찾아가 카르마의 독을 구하려고 했으면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아일라를 해치려 했으면서 저는 아무 상관 없다며 발을 빼시겠다.

    “시녀장이 공주가 보낸 선물이라고 다과와 차를 가져온 것을 먹고 쓰러졌어.”

    “시녀장이 저를 사칭한 겁니다.”

    이용하려다가 이용당한 건가? 둘이 정말 똑같군. 서로 이용하는 면이 말이야.

    “내 연인의 호위 기사로 있는 클라우디스 형제가 들었어. 그리고 그녀의 시녀로 있는 클로에도 들었지.”

    “모함입니다.”

    “공주는 지금 내 기사들이 내게 거짓을 고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거짓을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지금 공주는 내 기사들을 모욕하고 나도 함께 모욕했군. 내 연인이 무사히 깨어나기를 바라야 할 거야. 문을 봉쇄해라! 그 누구도 파르미온의 공주와 만나게 해서는 안 될 거다.”

    “존명.”

    “전하! 전하!”

    카시스는 돌아서서 가고 크레타는 그를 소리쳐 부르며 따라가려고 했지만, 기사들에게 막혀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아일라가 잘못되면 공주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아일라가 무사히 깨어나기를 바라야겠지.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윌리엄 경.”

    크레타의 방에서부터 제 집무실까지 따라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윌리엄에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시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괜찮은 겁니까?”

    “경의 눈에는 내가 괜찮아 보이나?”

    “괜찮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 괜찮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지? 이 녀석 눈에도 괜찮지 않아 보인다니. 다른 녀석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뻔하군.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집무실로 왔는데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말해 뭐 하겠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조금 전에 파르미온의 공주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었어.”

    “잘 참으셨습니다.”

    참은 것이 윌리엄에게 칭찬받을 일인가. 우습군.

    “전하, 잠시 친구로서 한 말씀 올리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해 봐.”

    “아가씨. 마린족 공주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십니까?”

    “왜, 너도 종족이 달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거냐? 나와 아일라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불행해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만둬.”

    “누군가 불행해질 거라 말한 모양이군요.”

    “너까지 반대하지 마라. 너까지 반대하면 내 편은 없는 거니까.”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아.”

    잠시 말끝을 흐리며 끊었던 윌리엄은 낮은 한숨과 함께 오랜 친우에게 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것참 고맙군.”

    “너는 늘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지. 갖고 싶어 하는 것도 없었어. 그러던 네가 처음 마음을 준 것이 그 빌어먹을 벨로체 공작의 딸이었지.”

    빌어먹을 벨로체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보여. 네가 벨로체 공녀에게 줬던 마음과 관심이 마린족 공주에게 주는 마음과 다르다는 것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네 진심이 보여. 그리고 원하고 있지. 너는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던 녀석이었지. 나는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말릴 생각도, 반대할 생각도 없어.”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조금은 든든해지는군.”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네 편이다.”

    “클로에 때문에?”

    “클로에 때문이 아니야. 황제 폐하하고도 어릴 적부터 친우였지만 나는 너를 위해서 움직일 거다.”

    “그런 녀석이 칼리스타로 돌아올 때 그렇게 파르미온의 공주를 보러 가라고 내 속을 그렇게 긁어 놨나.”

    “그때의 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윌리엄이 언제나 내 마음을 제일 먼저 눈치채고는 했었지.

    어릴 때부터 이 녀석만은 속이는 것이 쉽지 않았어. 내가 이 녀석을 잘 알듯이 이 녀석도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거겠지.

    “나는 언제나 네가 더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거겠지.”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파르미온의 공주의 처분에 대한 거라면 이미 정해 놨어. 폐하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다. 아, 폐하께서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벨로체 자작을 보낸다니 네가 내 대신 마중을 가라. 나는 지금 아일라가 저러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어서 말이야.”

    카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윌리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하께서 정말로 미치시기라도 하신 건가?”

    역시 윌리엄도 눈치챈 건가? 나하고 아나스타샤를 다시 이어 주려는 것을.

    “내가 그럴 마음이 없으면 그만 아닌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손님이니 대접은 해 줘야지.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손님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네가 마중 좀 가 줘.”

    “언제쯤 도착하는 거냐.”

    “글쎄, 성문까지만 마중 나가면 될 테니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그때 가면 될 거다.”

    “전하, 이제키엘 윈터우드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문밖에서 미카엘이 고하는 말에 카시스의 허락이 떨어지면서 문이 열리고 이제키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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