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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54화 (54/100)
  • 54화

    “멜로디. 제이드 경은 만나 봤나요?”

    “제이드가 이곳에 있나요?”

    “에리얼, 멜로디에게 말하지 않았나요?”

    에리얼은 세레스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고 세레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이드 경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말하지 못한 것이로구나.

    “전부 내 잘못이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왕비님. 왕비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찌 내 잘못이 없다 말하겠는가. 그이의 상태도 눈치채지 못하고 제이드 경이 나를 쫓는 추격자를 막다 그리되었는데.”

    “제이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에리얼, 멜로디를 제이드 경에게 데려가 주게.”

    “예, 왕비님.”

    에리얼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멜로디를 데리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두 사람이 나가고 창가로 다가간 세레스가 창문을 손으로 꾹 누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아슐레이, 내가 당신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당신을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일라가 위험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아일라가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도 않아. 만일 아일라가 위험해지면 나는 아일라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과 맞설 거야. 나는 우리의 소중한 아이를 지키겠어. 당신도 내가 아일라를 지키기를 바라겠지.

    “아일라의 봉인을 풀어야 할까?”

    아일라가 제가 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속상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일라가 물을 조종하는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아일라는 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도, 제어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고 말았다. 아일라가 아직 네 살일 때의 일이었다.

    마린족이라면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노는 나이였고 아일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힘을 제어하지 못한 아일라는 기어이 주변인을 다치게 할 뻔했고, 그걸 발견한 제가 대신 다치고 말았다. 그것을 눈앞에서 본 아일라는 울음을 터트렸고 뒤늦게 달려온 아슐레이가 아일라의 기억과 함께 힘을 봉인해서 묶어 뒀다.

    아일라가 성장하고 제힘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봉인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일라는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을 늘 속상해했다.

    “아일라도 아슐레이의 아이이니 포르세우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일라와 아슐레이가 부딪히게 할 수는 없어. 아슐레이와 싸우는 건 내가 되어야 해.”

    아슐레이, 내가 당신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줘. 다 잘 될 거라고 해 줘. 아일라를 지키고 당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해 줘.

    멜로디는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제이드를 보고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이드?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제이드는 왕비님과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을 막다가 부상을 당했단다.”

    “제이드는 괜찮은 거죠?”

    “외상도 외상이지만 내상도 심각해.”

    “대체 누가······, 누가 제이드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죠? 제가 알기로는 마린족에 제이드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어요.”

    제이드가 당하다니 말도 안 돼. 제이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데.

    “은혼단은 먹인 건가요?”

    “이미 먹였단다.”

    “그런데 왜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

    “그건, 제이드가.”

    “신의 힘에 당했기 때문이란다.”

    에리얼의 뒤에서 세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비님?”

    “은혼단이 웬만하면 모든 상태를 회복시켜 준다고 알고 있지? 하지만 한 가지 더, 회복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지.”

    “신의 힘. 제이드는 왕에게 부상을 당한 거란다. 그리고 마린족의 왕은 바다의 신의 힘을 사용할 수가 있지.”

    “왕께서, 제이드를 공격했다는 말인가요? 대체 왜? 어째서?”

    “지금의 아슐레이는 예전과는 다르단다. 네게 미안하구나. 멜로디.”

    “왕비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래, 이건 왕비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다. 왕비님의 잘못이 아니야.

    제이드 바보. 위험할 것 같으면 빠져나와서 무사히 돌아와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해.

    “나만 혼자 두고 가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빨리 일어나. 그러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 * *

    아일라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방 안에 카시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레안드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라. 넌 분명히 진짜 독이 아니라고 했다.”

    “맞아. 분명히 건넨 건 진짜 독이 아니야.”

    “그런데 아일라가 왜 쓰러지지? 카르마의 독이 아니라 다른 독을 준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목숨이 여러 개도 아니고, 누가 감히 칼리스토 대공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 있나? 파르미온의 왕국의 겁 없는 공주님이.

    “그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거지?”

    “아가씨가 먹은 쿠키와 차에서 독이 검출되지 않았다며. 그러니까 우리가 건넨 건 독이 아니야. 의원도 독이 아니라고 했다며.”

    아일라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와 차와 쿠키에 독이 있는지부터 조사하게 했다. 하지만 레안드로의 말대로 쿠키와 차에는 독이 검출되지 않았고, 그가 건네줬다던 카르마 독의 해독제와 같은 성분이 나왔다.

    아일라가 독에 당해 쓰러진 것이 아니라고. 그럼 과연 아일라가 쓰러진 이유는 뭐지? 독이 아니라면 대체 원인이 뭐라는 말이지? 아니, 독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돼. 뭔가 다른 방법으로 독을 들여와서 아일라가 모르게 독을 쓴 거라면.

    카시스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정말 아니라는 말이지?”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뭐 하려고 그런 짓을 해. 셰도우를 전멸시킬 것도 아니고. 내가 건넨 건 분명히 카르마 독의 해독제라고.”

    “그래, 아니어야 할 거다.”

    카시스의 유리알 같은 은청색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클로에, 분명히 파르미온의 공주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했다는 말이지.”

    “예, 전하.”

    “디오스 경, 그대는 당장 윌리엄 경에게 기사들을 보내 파르미온 공주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전해라.”

    “존명.”

    디오스는 카시스의 명을 듣고 바로 움직였다.

    “모두 나가 봐라. 내가 곁에 있을 거다.”

    카시스의 명에 클로에를 비롯한 방에 있던 모두가 나가고 카시스는 아일라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줬다.

    아일라, 쓰러지는 척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진짜로 쓰러진 것 아닙니까.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독이 아니라면 대체 뭐지? 다니엘이라면 알고 있을까?’

    그래, 다니엘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마린족이니까.

    “미카엘! 밖에 있나!”

    “예, 전하.”

    “다니엘을 불러와라.”

    다니엘이라면 아일라가 쓰러진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다니엘은 카시스의 부름을 받고 와서 아일라를 살피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저기 있는 쿠키와 차를 마시고 쓰러지셨다고 하셨습니까? 독은 검출되지 않았고요.”

    “셰도우에서 건넨 건 어떠한 독도 아니라고 하더군.”

    그런데 이 반응은 뭐지?

    “의원이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아무 이상 없다고 하더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치고······ 뭔가 이상한데. 병이 아니고 독이 아니라 의원이 잡아내지 못한 건가?

    “그럼 독이 아닌 다른 것을 건네주었고 아가씨께서 그것이 들어간 쿠키와 차를 마셨다는 말이군요.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 있습니까?”

    “레안드로.”

    카시스는 다니엘이 오면서 함께 들어오게 한 레안드로를 바라봤다.

    “이거.”

    레안드로가 품에서 병을 꺼내 다니엘에게 건네주고, 다니엘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봤다.

    미약하지만 냄새가 난다. 이 냄새, 내가 알고 있는 냄새인데.

    “바다에서 나는 꽃이 들어간 카르마 독의 해독제다. 그걸 독으로 속여서 줬어.”

    “무슨 꽃인지 아십니까?”

    레안드로는 종이에 열여섯 장의 꽃잎이 있는 연분홍색 꽃과 생긴 것도 비슷하고 색도 비슷한 연보라색의 꽃 두 송이를 그려 다니엘에게 건네줬다.

    “그 두 꽃의 이름은 몰라. 단지 해독 작용을 한다는 것만 알 뿐.”

    “셀레스와 셀레스토군요.”

    “아는 건가?”

    “연분홍 꽃이 셀레스. 연보라 꽃이 셀레스토입니다. 셀레스는 치료제로 셀레스토는 해독을 하는 데 사용하죠.”

    은혼단을 만드는 데는 셀레스와 셀레스토가 들어간다. 하지만 이 냄새는 셀레스와 셀레스토의 냄새가 아니야. 이 냄새를 내가 어디서 맡아 봤더라.

    ‘기억하거라, 샤우드. 셀레스와 세레스토는 우리에게 은혼단을 만드는 좋은 재료지만 절대 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섞이면 우리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이 기억은······. 셀레스와 세레스토, 그리고 섞이면 안 되는 것. 그것이 뭐였지?

    ‘기억해 내, 다니엘. 오랫동안 아틀란으로 가지 못했지만 마린족의 지식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잖아.’

    기억해 내. 떠올려 다니엘.

    “다니엘, 왜 그러지?”

    인간 세상에 그것에 대한 것이 나온 책은 없어. 내가 기억해 내야 해.

    ‘기억하거라, 샤우드. 플라톤은 절대로 셀레스와 셀레스토와 섞이면 안 된다.’

    그래, 플라톤.

    “혹시 여기에 플라톤이 들어갔습니까?”

    “재료에 그런 이름을 가진 것이 있기는 했던 것 같은데.”

    레안드로의 대답에 다니엘은 눈을 감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인은 그거로군요. 인간들에게는 해가 되지 않지만, 저희 마린족에게는 셀레스와 셀레스토 그리고 플라톤을 함께 사용하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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