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황제 폐하께서도 마린족의 왕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설득할 거다. 그리고 허락하지 않는다고 아일라를 놓을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함께할 방법을 찾을 거다. 종족이 다르다고 그녀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제게는 오히려 더 불행할 거다.
“네게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방해만은 하지 마라.”
누가 뭐라고 하든지 저는 아일라를 절대로 놓지 않을 생각이다.
카시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카시스와 아일라가 함께 돌아오는 것을 창문에서 지켜보고 있던 크레타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공주님. 움직이지 마세요.”
키리아가 놀라서 다가가 깨진 찻잔을 치우고, 크레타가 돌아서며 엠버를 불렀다.
“시녀장.”
“네, 공주님.”
“받아 온 독을 사용해. 내가 대공비가 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들어줄 거다.”
“예, 공주님.”
고개를 숙인 엠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당장 그 계집애를 만나.”
엠버가 나가고 크레타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전하께서 다시는 저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어. 그리고 반드시 그 계집애에게 제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여 주고 처참하게 죽여 줄 거야.
‘그 계집애만 없어지면 돼.’
반드시 없애 버리고 말겠어.
* * *
방 밖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아일라의 고개가 문으로 향했다.
“밖이 시끄럽네.”
“무슨 일인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클로에가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시녀장님?”
클로에의 시야에 엠버를 막고 있는 디오스와 아키오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를 만나야겠어.”
“안 됩니다.”
“전하의 명입니다.”
“나는 시녀장이에요. 대공성을 관리하는 시녀장으로서 당연히 성에서 묵는 손님을 만나야 합니다.”
손님? 나를 말하는 건가?
아일라는 고개를 옆으로 빼고 클로에와 기사들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엠버를 보려고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시녀장이라고 했지. 독을 가지고 찾아왔을까?
카시스가 클로에와 내 호위 기사들과 함께면, 만나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왜 막는 거지? 카시스에게 전해 듣지 못한 걸까?
“하오나 시녀장님. 전하께서 시녀장님과 아가씨의 만남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클로에, 지금 감히 시녀장인 내 앞을 막겠다는 것이냐? 건방지게.”
“들여보내세요.”
클로에가 뒤를 돌아봤다.
“아가씨?”
“아직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인데. 카시스는 나와 시녀장이 만나도 된다고 했어요.”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놀란 눈으로 아일라를 보더니 서로를 마주 봤다.
“저희는 전해 들은 것이 없습니다. 아가씨.”
“그러니 시녀장님을 아가씨와 만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게 아닙니다, 하지만······.”
디오스가 말끝을 흐렸다. 거짓은 아니겠지만 저희들은 정말 전해 들은 말이 없어서 비켜서기가 곤란했다.
“단 조건이 있었지만요.”
“조건…… 말입니까?”
“시녀장이라고 했죠? 당신을 제 방에 들이겠어요. 하지만 거기 있는 두 기사님과 클로에와 라피스도 함께 있어야 해요.”
“저는 아가씨하고 독대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럼 곤란해요. 카시스와 혼자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엠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사들과 시녀와 함께 만나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엠버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기사들과 클로에와 함께 아일라를 만나야 한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일라가 계속 카시스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싫다면 그냥 돌아가세요.”
“아닙니다. 그럼 제가 차와 다과를 준비해 와도 될까요? 파르미온의 공주님이 아가씨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선물일 리가 없는데. 나를 싫어하는데 선물을 보낼 리가 없지 않나.
차와 다과에 받아 온 독을 넣으려는 거구나. 진짜 독이 아니라고 했지만 쓰러지는 척은 해야겠지. 카시스에게는 손도 대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그러면 속여 넘길 수 없잖아. 카시스의 사람이 진짜 독이 아니라고 했으니 믿을 거야.
“좋아요, 준비해 오세요.”
엠버는 다과와 차를 준비하러 가기 전에 저를 막아섰던 이들을 노려보고 갔다.
“아가씨, 정말 전하께서 허락하신 건가요?”
클로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제 이야기 끝냈어.”
“하지만 저희는 아무 말도 전해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럼 카시스에게 가서 확인해 봐.”
“저는 아가씨 곁을 지키겠습니다. 전하께서 저도 함께 자리하라고 명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음, 그럼 라피스가 카시스를 만나서 확인하면 되겠다. 라피스, 카시스에게 가서 시녀장이 나를 만나러 왔다고 전하면서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카시스는 라피스도 함께 있으라고 했지만, 클로에와 기사가 둘이나 있는데 괜찮겠지.
라피스가 아일라의 말대로 카시스를 찾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엠버가 차와 다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같이 먹지 않을 건가요?”
“저는 시녀입니다. 아무리 손님이라고 할지라도 함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없습니다.”
“이거 정말 파르미온의 공주님이 보내신 건가요?”
누가 보낸 건지 증인을 만들어 두려면 누가 보냈는지 확인해 둬야지. 그래야 발뺌하지 못하지.
“그것이 중요한가요?”
“당연히 중요하죠. 아니기를 바라지만 제가 이걸 먹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 공주가 범인이 되는 거니까요. 아니면 대공성의 시녀장이 그의 연인인 저를 해치게 되는 거잖아요.”
“다과나 차에 독이라도 들었다는 건가요? 그리고 누가 전하의 연인이라는 건가요?”
“당신의 앞에 있는 저 말고 또 누가 있나요?”
엠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신은 대공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공비로 어울리는 분은 파르미온의 공주님 같은 고귀한 분이십니다.”
“그걸 어째서 시녀장인 당신이 정하나요? 제가 카시스와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당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부터 거슬리는군요. 전하의 이름을 그리 함부로 부르시다니.”
“제가 카시스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어요. 저는 그의 연인이고 제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카시스가 허락했으니까요.”
카시스가 내게 이름을 허락해서 부르는데 시녀장이 제게 뭐라 할 자격은 없었다.
“그리고 고귀한 것은 그 공주님만이 아니랍니다. 저도 귀하게 자랐고 그녀와 같은 공주예요. 시녀장이라면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나?”
저는 존칭으로 말하고 있지만, 아까부터 시녀장이 하는 말에는 아일라에 대한 그 어떤 존중도 예의도 없었다.
“지금 제게 말을 놓으신 겁니까?”
“그대는 시녀고 난 카시스의 연인이자 공주가 아닌가. 상대가 예를 지키지 않는데 나라고 지킬 이유는 없지.”
아일라의 말에 엠버가 입술을 짓씹었다.
예의가 없는 사람에게 지킬 예의는 없어. 상대가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데 나도 존중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존중을 바란다면 그 태도부터 고쳐야 할 거야.”
아일라는 다과에 집어 먹고 찻잔을 들어 마셨다.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화내겠지. 하지만 도와주려면 확실하게 도와주는 것이 좋잖아.
“파르미온의 공주에게 선물 고맙다고 전해 줘요.”
어? 왜 갑자기 어지럽지? 진짜 독이 아니라고 했는데.
투둑, 툭.
이게 뭐야? 피?
“아가씨!”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고 눈을 깜빡이던 아일라가 옆으로 쓰러지자 클로에와 디오스, 아키오스가 놀라서 그녀를 불렀고 클로에가 쓰러지는 아일라를 붙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가씨 왜 이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시녀장!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키오스가 엠버를 제압하며 소리쳤다.
뭔가 잘못됐다. 카르마 독은 독에 당한지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 가며 불구로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반응이 올 리가 없는데.
그 시간, 카시스는 집무실에서 라피스에게 시녀장이 아일라를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만나라고 하기는 했지만…… 바로 만나러 왔다고?”
“예, 아가씨께서 전하께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아-, 나는 분명히 라피스도 함께 만나라고 했는데.
카시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전하! 전하! 클로에입니다.”
다급한 클로에의 말에 카시스의 시선이 미카엘에게로 향했다. 카시스의 시선을 받은 미카엘이 문을 열었다.
“클로에? 무슨 일이지?”
아일라와 함께 있어야 할 클로에가 어째서?
“전하, 아가씨께서 쓰러지셨습니다.”
클로에의 말을 듣자마자 카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큰 소리를 냈다.
아일라가 쓰러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아가씨께서 시녀장님이 가져오신 차를 드시고 갑작스레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뭐를 먹었다고?
카시스는 집무실을 뛰쳐나가 아일라의 방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미카엘, 당장 레안드로에게 오라고 해!”
분명 진짜 독이 아니라고 했다. 배신자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일라가 왜 쓰러진다는 말인가.
레안드로, 내게 거짓을 말했다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다. 아무리 너라고 할지라도 아일라가 잘못되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카시스는 뛰다시피 아일라의 방으로 향했다.
* * *
똑똑똑!
“왕비님, 에리얼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요.”
“왕비님을 뵙습니다.”
“멜로디? 네가 어떻게?”
에리얼은 뒤따라 들어온 멜로디를 보며 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연락이 갑자기 끊어져서 걱정했습니다.”
“멜로디를 만나서 함께 왔습니다.”
에리얼은 마을을 다니며 추격자가 쫓아왔는지 경계하며 살피다가 멜로디를 만나서 함께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