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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52화 (52/100)
  • 52화

    [내가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이은 그대의 앞에 나타나 말을 건 것은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서다.]

    바다의 신이 내게 부탁이 있다고?

    ‘제게 말입니까? 바다의 신이 내게 부탁할 것이 뭡니까?’

    [내 힘을 가장 크게 물려받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

    바다의 신의 힘을 가장 크게 물려받은 아이?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

    [그대는 내가 인정한 아틀란 후계자의 반려.]

    생각에 잠겨 있던 카시스는 머릿속에 울리는 포르세우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를 인정했다고요? 아틀란의 후계자라면 아일라를 말하는 건가.’

    바다의 신이 나를 아일라의 반려로 인정했다고? 하지만 인정받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는 아일라를 놓지 않을 거니까.

    [그렇다. 인정하지 않았어도 그대가 그 아이의 진정한 반려였기에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일라와 내가 진정한 반려라고 한 겁니까?’

    [나는 수없이 네게 말을 걸었다. 하나, 그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그대에게 닿지 못했다. 내가 그대의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대에게 내 목소리가 닿은 것도, 이제는 그대가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일라에 대한 마음을 깨달아서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

    ‘그래서 내게 부탁할 것이 뭡니까?’

    [내 아이가 조종당하고 있다. 그러니, 내 아이의 자식을 지켜다오. 그 아이는 유일한 아틀란의 후계자. 바다를 다스릴 아이. 바다의 진정한 왕.]

    ‘그 조종당하는 당신의 아이라는 것이 설마 아일라의 아버지입니까?’

    [그렇다. 그 아이는 제 딸을 대신해 죽음의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 거기에 욕망을 가진 내 또 다른 자식 중 하나가 약해진 틈을 타, 그 아이를 이용하고 있다. 지금 그 아이에겐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또 다른 자식?

    [바다에 사는 생명들은 전부 내 아이들이다.]

    ‘제게 아일라를 지키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제가 그녀를 지킬 겁니다. 그리고, 아일라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지킬 겁니다.’

    [고맙군.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여.]

    ‘그녀를 지키는 것에 감사 인사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제게 그녀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말입니다.’

    [그럼 부탁하지.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선물을 하나 주겠다.]

    부탁하지 않아도 반드시 지킬 거다.

    포르세우스는 모습을 감췄다. 순간 물안개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이내 걷히며 그의 시야가 확보되었지만 주변은 달빛만 비추는 어두운 밤이었다. 절벽 위에 소년이 자객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나?’

    어릴 적 내 모습이군.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습격을 받고 형님하고 헤어져 자객들에게 쫓겨 절벽 끝까지 몰렸었다. 그리고 그 절벽에서 떨어졌었다. 지금 저는 그날의 일을 보고 있었다.

    풍덩!!

    그러고 보니 그날 누가 나를 구해 줬었지? 형님은 나를 찾은 것은 분명 바닷가 바로 이 자리라고 했었지. 파도에 쓸려 오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저를 구했다는 말인데.

    ‘저건?’

    생각의 잠겨 있던 카시스의 시야에 어린 저를 끌고 나오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물빛 머리와 눈동자······.’

    물빛 머리와 눈동자는 마린족의 상징. 그렇다면 마린족. 저 마린족 소녀가 저를 구해 줬다는 말인가.

    그런데, 저 얼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어디선가 본······.

    ‘마치 아일라를 줄여 놓은 것 같은······!!?’

    ‘아일라. 분명히 아일라다. 많이 어리기는 해도 아일라다.’

    하-, 그랬던 건가? 그때 나를 구했던 것도 아일라였던 건가. 그대는 나를 두 번이나 구해 줬던 거군.

    해가 떠오르고 멀찍이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아일라는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다로 들어갔다.

    ‘바다의 신이 선물이라고 했던가. 내가 알지 못하는 기억을 보여 줬으니 확실히 선물이로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실을 알았으니 이제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 * *

    카시스는 집무실 의자에서 눈을 떴다.

    ‘설마, 내가 이렇게 앉아서 잠이 들었던 건가.’

    창밖을 보니 어스름이 사라지며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어릴 적 자객들 때문에 바다에 빠졌을 때, 저를 구해 준 것이 아일라 당신이었습니까.”

    어쩐지 형님과 내가 수소문해도 나오지 않더라니.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마린족이 구해 줬으니 나올 리가 없지. 아일라는 나를 구해 줬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저는 의식을 잃고 있어서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구해 준 것이 저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바다의 신은 내가 아일라의 진정한 반려라고 했었지.

    “아일라, 어쩌면 그대와 저는 운명이었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 그대가 저를 두 번이나 구해 줬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이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쿠웅-!!

    카시스는 바깥의 숲 호수 쪽에서 쿵, 하고 들려온 큰소리에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다니엘이 안 보이는데.”

    가느다란 물줄기가 표적 표시를 해 놓은 나무로 잘 날아가다 두 갈래로 휘었다.

    “어째 저 실력은 전혀 늘지를 않나.”

    집무실에서 나와 곧바로 아일라가 훈련하는 장소로 찾아온 카시스는 나무에 팔짱을 낀 채 기대서서 아일라가 물을 다루는 힘을 사용하는 것을 감상했다.

    “아이씨, 왜 자꾸 안 되는 거지……. 다니엘의 말대로 집중도 잘하고 표적을 제대로 노렸는데.”

    콰지직!! 쿵쿵!!

    바로 그때, 표적이 그려진 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 두 그루가 부러지며 쓰려졌다.

    칼리스타로 돌아와 아일라가 다시 훈련을 시작할 장소로, 더욱 인적이 드문 성 안의 호수가 있는 숲으로 정해 줬다. 하지만 계속 큰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찾아올 것 같았다.

    “아일라.”

    물을 조종하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자 마음이 상한 아일라에게로 카시스가 다가가며 그녀를 불렀다.

    “어? 카시스.”

    “이른 아침부터 훈련입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보이지 않는군요.”

    “혹시 실력이 늘었나 시험해 보고 싶어서 혼자 왔어요. 아직 훈련 시간도 아니고요.”

    물을 다루는 힘이 제어되지 않는 것이 어지간히 기분이 상했는지, 아일라의 얼굴이 부루퉁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카시스는 내 마음을 몰라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력했다고요.”

    “아일라의 부모님이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에 화를 내셨습니까?”

    “아니요, 그런 걸로 화내실 분들이 아니에요. 그냥 나아질 거라고만 하셨어요. 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죠.”

    나아질 거라고만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실력이 나아지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이.

    “다니엘이 아일라의 집중력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표적도 제대로 겨냥한다고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안 되는 걸까요.”

    “집중력이 아니라면 다른 문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그건 알아봐야겠죠.”

    “전하! 아가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카시스와 아일라가 뒤를 돌아봤다. 다니엘이 두 사람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두 분이 함께 계셨던 겁니까?”

    “왜 그러나. 나와 아일라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어?”

    아일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뭔가 이상한데. 뭐지?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은데 내 착각인 건가?

    “아일라, 이쯤하고 그만 돌아갑시다.”

    “조금만 더 하고 싶어요.”

    “연습도 무리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가는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도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아일라는 연습을 더 하고 싶었지만, 카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는 그와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아일라를 방으로 들여보낸 카시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다니엘, 형님께 나와 아일라에 대해 서신을 보냈나?”

    흠칫!

    “하아-.”

    역시 다니엘이었나.

    “네가 언제부터 형님의 첩자 노릇을 한 거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다니엘이 형님의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형님도 저를 감시하기 위해서 첩자 같은 것을 보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화가 났다.

    “전하를 말릴 수 있는 분은 폐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가씨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니엘. 난 여태껏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황태후 폐하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저는 진심으로 황위에 욕심도 없었고 원하는 자리도 아니었기에 형님과 함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아일라는 다르다. 진심으로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졌다.”

    “두 분 모두 불행해지실 겁니다.”

    “아니, 불행해지지 않아. 아일라를 불행하게도 만들지 않을 거다.”

    종족이 다르다고 전부 불행해진다고 하는 건 억측이다. 종족이 달라도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불행해진다 단정 짓지 마라. 네가 말한 인어족과 인간은 서로 그 정도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진심이 아니었겠지. 하나, 난 달라.”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난 아일라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다.

    “내가 인간이고 그녀가 마린족인 건 상관없다. 나는 각인을 없애지 않을 거다.”

    “전하.”

    바다의 신이 아일라의 진정한 각인자는 나라고 했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도 아일라를 빼앗길 생각은 없다.

    “전에 내게 물었지. 내 자리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느냐고? 내 자리는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자리를 버리고 숨는다고 할지라도 나를 찾아내겠지. 그리고 나는 내 영지를 버릴 만큼 무책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아일라를 포기할 생각도 없다. 나는 내 자리에서 아일라와 함께할 거다.”

    저는 아일라가 없으면 안 된다. 이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어.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아일라는 제 곁에 있으니 아직 늦은 것이 아니다. 아일라가 떠나지 못하게 붙잡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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