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렇다면 더 위험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허락해 줘도 되지 않아?”
“레안드로 넌 닥치고 있어. 뭘 잘했다고 끼어드는 거냐.”
레안드로가 아일라의 말에 맞장구까지 치자, 얼굴을 구긴 카시스가 그에게 일갈했다.
이렇게 신세만 지고 있는 것이 싫어. 카시스는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있고 내가 말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려고 하고 있어. 카시스가 정말 내 진정한 반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다는 것이 속상해.
‘그러니까, 도와주고 싶어.’
“반대해도 할 거예요.”
“하아-, 좋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데프리카 시녀장이 건네는 것은 무엇이든 먹지 말고 만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호위 기사를 멀리 떨어트려 놓지 말고 함께 있어야 합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아일라를 보며 카시스는 다시 한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제 영지라고 해서, 제 집이라고 해서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여기저기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려고 드는 것이 인간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아일라의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이용하게 둘 생각은 없고 해를 입게도 하지 않게 제가 미리 차단하면 되는 일이다.
“그대는 제가 반드시 지킬 겁니다.”
“알아요, 당신은 강하잖아요. 당신이 지켜 준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
“레안드로, 파르미온으로 가기 전에 데프리카 백작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고 가.”
“너는 나를 일에 파묻혀 죽게 만들고 싶은 게 분명해.”
“진짜 숨 쉴 틈도 없이 만들어 줄까.”
“빌어먹을.”
레안드로는 카시스의 말에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테라스를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어? 여기 3층 아니었나요?”
“여기서 뛰어내려도 다칠 녀석이 아닙니다. 놀랐습니까?”
“여기는 3층인데 저리로 나가서 조금 놀랐어요.”
문으로 다니라니까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단 말이야.
“윌리엄 경. 경도 그만 나가 봐.”
“존의.”
윌리엄이 집무실을 나가면서 미카엘이 들어왔다.
“아가씨께서 와 계시군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그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아일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카시스가 저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아직 대답 안 했습니다. 제가 화낸 이유를 정말 모르는 겁니까?”
“음, 저를 지켜 줘야 하는데 제가 위험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정말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본인은 감이 좋다고 말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전혀 아니다. 감이 좋은 게 아니라 둔하다.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걱정되어서 왔다고 하셨죠. 방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카시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일라를 방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카시스는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욕심이 생기려고만 해. 그런데 정말 욕심내면 안 되는 거겠지.
원하지도 않는 혼인을 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까.
“아일라.”
“네?”
“다 왔습니다. 오늘은 많이 돌아다녀 피곤했을 테니 편히 쉬십시오.”
“카시스도 쉬세요.”
“그러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카시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일라?”
“네?”
앗, 이런 내가 넋 놓고 카시스를 보고 있었구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요! 너무 잘생겨서요!”
내가 뭐란 거야 지금.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잖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쉬세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일라는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문에 기대고 서서 문밖에서 들리는 카시스의 웃음소리에 창피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아- 창피해. 분명 클로에도, 기사들도 들었을 거야.
“쿡쿡! 제 얼굴이 마음에 든다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걱정을 하지 않다니, 뭐를?
“이제부터 제대로 그대에게 다가갈 생각인데 제가 마음에 든다니 거절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
“저는 그대의 반려를 따로 찾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그대의 반려로 남고 싶어졌으니 말입니다.”
제 방에서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아일라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뭐,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벌컥!
뒤늦게 문을 열었을 때는 카시스는 돌아가고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래, 문이 닫혀 있어서 분명 잘못 들은 거야.
원하지도 않은 각인이 생겼는데 제 반려로 남고 싶을 리가 없잖아.
아일라는 다시 문을 닫고는 침대로 다가가 누웠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면 좋겠지만…… 아냐, 잘못 들은 게 분명해.”
제이드와 멜로디를 찾으러 다니느라 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이렇게 헛소리가 다 들리고.
아일라가 제가 한 말을 헛소리로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집무실로 돌아온 카시스를 이제키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지?”
“미카엘 경에게 들었습니다. 데프리카 백작에 대해 조사한 것들입니다.”
“조금 전에 명을 내린 것 같은데, 빠르군.”
“저번에 이은 보고입니다.”
이제키엘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카시스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감히?”
“예, 공금에 손을 댔더군요.”
“언제부터?”
“손을 댄 것은 최근입니다. 사업이 잘되지 않았는지 도박에도 손을 댔습니다. 그러다 보니 빚이 쌓여 가고 겉잡을 수 없게 된 듯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손을 많이 댄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파르미온 공주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대공비로 앉히려는 시도를 하는 거군. 잘 구슬려서 대공비에게 주어지는 품위 유지비까지 손을 댈 생각이었나 본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쓰레기들이 나온 건가. 아니면 내가 없는 틈을 노린 건가.”
카시스는 서늘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지 다시 알려 줘야겠군.”
“그리고 전하, 이건 말씀드리기가 좀······.”
“뭔데 그러지?”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이자 카시스의 미간에 골이 더 깊이 파였다.
“말해.”
“아무래도 노예 상인과도 연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데프리카 백작가뿐만 아니라 프란츠 백작가도 노예 상인들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프란츠 백작가는 좀 더 조사를 해 봐야 알 듯합니다.”
“노예 상인. 제국 내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지.”
프란츠 백작도 연관이 있다니 잘됐군. 안 그래도 앞뒤 분간 못하고 건방지게 굴던 벤자민 프란츠를 처리하려고 했는데, 노예 상인과 프란츠 백작가가 연관되어 있다면 국법으로 처리할 수 있겠군.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확실하게 조사해. 그리고 이종족 노예들인지 아닌지도.”
노예를 사고파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큰 벌을 받는다. 그런데 만일 그 사고파는 노예가 이종족이라면 더 엄벌을 내릴 수 있지.
내가 누구인지 잊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에 제대로 상기시켜 줘야겠군.
카시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카시스는 이제키엘이 나가고 책상 위에 황금용 인장이 찍힌 서신을 보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찢어 내용을 확인했다.
‘마린족 공주에 대한 네 마음이 진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 마린족 공주에게 마음이 있거든 더 늦기 전에 접거라. 아나스타샤 벨로체를 칼리스타로 보내겠다. -킬리언 라 오벨리스크 플루투스 황제-’
미친 건가? 누구를 보내시겠다고?
제 형님이 미쳤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건 그렇고. 형님 귀에 들어간 건가? 누가? 설마······.
카시스는 제가 아일라와 함께 하면 불행해진다고 말했던 다니엘이 떠올랐다.
다니엘, 네가 나를 말려 달라고 형님께 서신이라도 보낸 것이냐. 하지만 네 생각이 틀렸어.
아무리 형님이라도 제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갖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황위는 내 자리가 아니니 욕심내지 말라는 황태후 폐하의 말에도 수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아나스타샤 벨로체하고는 다르다. 아일라는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고 놓치지 않고 그저 제 품에 두고 싶다. 진심으로 아일라를 원하게 되어 버렸어.
“처음으로 진심으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안 된다고?”
안 될 리가 없어. 나는 아일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아무리 형님이 안 된다고 해도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카시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 * *
카시스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가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임페리얼 숲과 이어진 절벽이 있는 바닷가.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야에 바다에서 물줄기로 그 형상을 이루고 있는 용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꿈인가? 그런데 왠지 낯설지 않은 꿈인데. 분명히 이전에도 같은 꿈을 꾼 적이 있다.
이 꿈을 꾼 것이 분명, 그때로군. 파르미온 왕국에서 공주를 데리고 온 날, 마물이 배를 습격하고 그가 마물의 독에 당했을 때. 그런데 왜 이 꿈을 또 꾸는 것이지.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물려받은 자여.]
지금, 저 용이 내게 말을 건 것인가?
‘내게 말을 한 것인가?’
그때 꿨던 꿈하고 다르다. 그때는 저를 빤히 바라볼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용이 제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렇다. 어둠의 수호룡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물려받은 자여. 나는 바다의 수호신 포르세우스.]
바다의 신이라고?
에류시온 공국에 모시는 신이 따로 있으니 바다의 신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