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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50화 (50/100)

50화

“진짜 독을 건넨 것이 아니어야 할 거다. 그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고 싶으면.”

“진짜 독을 건넸다면 내가 직접 전하께 보고하러 왔겠습니까? 저도 제 목숨은 아깝다고요.”

“깐죽대지 말고, 비꼬지 말고.”

“깐죽댄 적도 비꼰 적도 없는데 너무하네. 내가 건넨 건 카르마 독의 해독제니까 걱정 마시죠, 전하. 해독제가 그 아가씨를 해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레안드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몇 년을 같이 했는데 저를 믿지 못하느냐며 작게 불만을 토해 냈다.

“그런데 내 주인인 대공 전하께서 마린족 아가씨를 감싸는 것이 심상치 않은데. 아무리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 여자 때 하고는 다르잖아. 단지 연인이라서, 이종족이라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쳐. 러셀 경 생각은 어떻습니까?”

레안드로의 시선이 윌리엄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윌리엄도 카시스도 레안드로가 말하는 그 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레안드로가 말한 ‘그 여자’는 아나스타샤를 말하는 것이다.

“레안드로 제노스. 그녀의 신분이 강등되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이다. 네게 성을 준 것은 그때 네 정보력과 공 때문이야.”

“누가 그걸 모르나. 네가 이상하다는 거야, 대공 전하. 그 여자와 마린족 아가씨와 대하는 태도가 다르잖아.”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벨로체는 아일라와 다르게 기사였다.”

“아-, 그래서 지켜 줄 필요가 없었다? 정말 그뿐이야? 그렇게 따지면 마린족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니엘처럼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위험한 일 없을 것 아니야?”

“레안. 전하의 심기를 그만 거슬러라.”

자꾸만 카시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는 레안드로에게 윌리엄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더 이상 갔다가는 아무리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동안 네가 전하의 사람이라 봐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 것 아니냐.”

“예, 예 그러지요. 정말 그만해야지. 안 그러면 정말 죽을 것 같은 분위기니까.”

“파르미온의 공주와 시녀장에게 감시를 더 붙여. 아일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카시스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아일라?”

“어-, 그게······.”

아일라가 대체 왜 여기에? 언제부터 있던 거지?

아니, 내가 문밖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건가?

“아일라, 언제부터 여기 있던 겁니까?”

설마, 지금 이야기를 전부 들은 것은 아니겠지?

“아일라?”

“조금 전에 당신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걱정이 돼서 와 봤어요.”

“저를 걱정해 준 겁니까? 별일 아닙니다.”

실수했다. 화가 나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 아일라가 집무실 앞에 있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기사로서 실격이군.

“시녀장이나 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별일 아니라고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겁니까?”

“이, 일부러 엿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왔다는 것을 알릴 타이밍을 놓친 것뿐이에요. 그, 그리고 말이 끊겨서 들렸어요.”

카시스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아일라는 전부 다 들은 것은 아니라며 변명하며 그의 눈치를 봤다.

내가 뭘 잘못했나? 걱정돼서 와 본 건데 오면 안 되었던 걸까?

“아일라, 잠시만으로 들어오십시오. 안 그래도 그대에게 당부할 말이 있습니다.”

“당부할 말이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목을 붙잡고 부드럽게 안으로 잡아끌었다. 소파로 데려가 앉히고 맞은편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 아일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할 말이 있던 것 아닌가요?”

“······그동안 그대에게 시녀장을 소개시키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녀장? 아, 조금 전 문밖에서 들었던 호칭.

“시녀장은 본래 대공성을 관리하지만, 그대에게 소개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두었습니다. 저는 시녀장이 해 온 일들이 있기에 갑자기 내보낼 수도 없었고 시녀장도 귀족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 시녀장을 이제 내보내려고 하는데 그 전에 시녀장이 그대에게 접근할지도 모릅니다.”

“시녀장이요?”

“그대에게 해를 끼치려 할 겁니다.”

“저는 그녀를 만난 적도 그녀에게 피해를 입힌 적도 없는데요.”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해를 끼친다는 거야.

“시녀장이 스스로 파르미온의 공주에게로 갔습니다.”

“네?”

파르미온의 공주라고? 여기서 그 여자가 왜 나와?

방금까지 시녀장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나.

“그 공주님과 시녀장이 합심해서 제게 무슨 짓을 할 거라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겁니다. 그러니 시녀장이 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받지 마십시오. 그대의 호위들이 막기는 할 거지만 그래도 모르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셰도우에서 건넨 것이 가짜라고 할지라도 조심하는 것이 좋다. 독이 아닐지라도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니까.

“혹시, 아까 들은 독 이야기가 시녀장이 저한테 쓴다는 말인가요?”

“······.”

“말해 줘요.”

문밖에서 들은 말이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게다가 시녀장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을 보니 분명 제게 독을 쓸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제게 독을 먹일 거라는 말인가요?”

“······.”

“대답을 못 하는 것 보니 맞군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시녀장을 내보내는 것을 도울게요.”

“뭐를, 어떻게 돕겠다는 겁니까?”

“시녀장이 제게 접근하는 걸 막지 말아 주세요.”

“막지 말라고요? 설마······.”

카시스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고 굳는 것을 지켜보던 아일라가 빙긋 웃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아요. 시녀장을 쫓아내는 데 확실한 방법이잖아요.”

“미쳤습니까!!”

카시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지?

“좋은 방법이기는 하네.”

“레안드로 제노스, 넌 닥치고 있어.”

닥치라고? 카시스가 험한 말 하는 거 처음 봐.

“진짜 독도 아니고 위험할 일 없어.”

진짜 독이 아니라고?

“독이 진짜가 아니라고요?”

진짜 독이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마시고 쓰러지는 척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진짜 독이 아니라면 다행이네요. 이 방법이 먹힐지도 모르잖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왜 위험한 짓을 합니까?”

“진짜 독이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요?”

“왜 화를 내는지 몰라서 묻는 건가!”

아일라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카시스를 올려다봤다. 카시스가 제게 말을 놓았다는 것은 제게 화가 나 언성을 높이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라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르니까 묻지, 알면 왜 물어.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어.

“독인 줄 알면서 먹겠다고?”

“진짜 독이 아니라면서요. 그럼 괜찮은 거잖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독만이 문제가 아니야. 데프리카 백작 부인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클로에도 기사님들도 같이 있으면 아무 짓도 못하게 저를 지켜 줄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약속을 믿어요.”

“전하, 진정하시죠.”

“하아-!”

카시스가 긴 숨을 토해 내고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가씨. 아가씨도 위험한 일은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진짜 독이 아닐지라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윌리엄은 그 말을 하면서 레안드로를 슬쩍 곁눈질로 봤다. 아무리 레안드로가 파르미온의 공주에게 건네준 것이 진짜 독이 아닐지라도 해로운 것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봐, 후작 각하.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그러면 안 되지. 나 정말 섭섭해지려고 해. 나를 끌어들인 건, 대공 전하와 후작 각하 둘이라는 걸 잊지 마.”

“네가 직접 건네준 건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내 애들 중에 칼리스토 대공 전하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들은 없어. 수년 전 직접 손을 봐주고 잘라 낼 녀석들 전부 잘라 낸 것이 카시스, 바로 너라는 것을 잊지 마라. 의심받으면 나도 상처받는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거참, 너무하네. 몇 년을 네 밑에서 굴렀는데 믿어 주지도 않고.”

“네가 데리고 있는 녀석들 전부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거다. 변심한 녀석들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

“변심하면 네가 가만히 있을 녀석이기는 하고? 그리고, 변심해서 배신하는 녀석들은 나도 가만 안 둬.”

“저기요?”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이 대화가 오가자 아일라가 손을 들어 올리며 불렀다.

저 여기 있어요. 우리 제게 독을 먹이려고 하는 시녀장을 내쫓는 것을 제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갑자기 저는 소외되어 버린 것 같지.

“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요. 일단 해 보자니까요.”

나도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단 말이야. 지낼 곳도 만들어 주고 보호해 주고 옷에 구두에 여태껏 받기만 했잖아. 나도 뭔가를 해 주고 싶어. 도움이 되고 싶어.

“아일라. 정말 제가 왜 반대하는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모른 체하고 싶은 겁니까?”

“알아요. 당신이 제가 마린족이라 보호해 준다는 건 많이 들었으니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하지만 진짜 독이 아닌 이상 제가 독에 당할 일은 없잖아요. 카시스 당신은 걱정이 지나쳐요. 당신이 제 호위로 붙여 준 기사들을 믿어도 되잖아요.”

“맞는 말이네.”

“혼자 만난다는 것도 아니에요. 클로에와 라피스, 그리고 당신이 제 호위로 붙여 준 기사들도 함께 만날 거예요.”

호위와 함께 만나면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 아일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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