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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9화 (49/100)

49화

세레스는 제 앞에 있는 제랄드를 걱정스럽게 보며 물었다.

“제이드 경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가요?”

“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혼단을 먹였는데도 아직이라니…… 걱정이네요.”

“전하께서는 바다의 신의 힘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그 힘에 당한 상처는 은혼단으로도 치료가 어려워 어쩔 수 없습니다, 왕비 전하.”

은혼단은 병에 걸렸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만 아니라면 대부분 전부 소생시키지만, 신의 힘에 크게 부상당한 경우는 예외였다.

“제 잘못입니다. 페트라의 저주가 그의 생명과 정신을 갉아먹는 것을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악시온 그자가 그것을 먼저 알아채고 접근했을 줄이야.”

“왕비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 욕심 때문에 알리지 않고 이용하려 한 바이칼 악시온 그자가 나쁜 겁니다. 안 그래도 마녀의 저주에 힘겨워하는데 거기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게 약까지 먹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니요, 진작 제가 눈치챘다면 어떻게든지 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게 막았을 겁니다.”

세레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괜찮다고 했더라도 제게 옆에서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제 잘못이었다. 페트라의 저주도 본래 제게 왔어야 했다. 하지만 아슐레이가 저를 감싸면서 그가 대신 저주에 걸려 버렸다.

아무렇지 않다는 말을 믿으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제가 너무도 안일했다. 페트라와 싸움이 있었을 때가 제 배 속에 아일라를 품고 있을 때였다. 저와 아일라를 지키기 위해서 대신 저주에 걸렸을 때 그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버텼을까. 아마 1년 전에 쓰러진 이유도 저주 때문이었겠지. 수년을 그의 생명과 정신을 좀먹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슐레이가 변한 이유도 아마 저주 때문이었을 거다.

“제이드가 멜로디를 찾으라고 했지요. 멜로디를 찾으면서 아일라를 같이 찾아야겠습니다. 아일라는 아틀란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그자들이 먼저 찾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이지요.”

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다음 대의 아틀란의 왕이 될 아일라만은 지켜야 한다.

현재 신고 있는 구두보다 조금 더 편한 구두를 맞춘 아일라는 카시스와 함께 제이드와 멜로디를 찾기 위해서 주변의 여관을 찾아갔다.

아일라는 여관 주인에게 제이드와 멜로디의 인상착의를 말해 봤지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 로브를 눌러 쓰거나 수상한 이인조가 있지 않았나?”

“아, 있었습니다. 이삼일에 한 번 와서 물빛의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손님으로 왔는지 물었습니다.”

카시스의 물음에 여관 주인이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제이드와 멜로디야. 분명해. 그 둘이 나를 찾으러 다닌 거야.

아일라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면서 카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있던 거야?

“제이드와 멜로디가 맞는 것 같아요.”

아일라는 카시스에게만 들리게 입을 벙긋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여관에도 가 보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카시스는 아일라의 어깨를 감싸고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생각처럼 제이드와 멜로디를 만나지는 못했다.

이 근처에서 났으니 분명 이 근처의 여관에 묵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일라.”

두 사람을 찾지 못한 것에 안심 반, 실망 반으로 어깨를 늘어트린 저를 부르는 소리에 아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금만 더 찾아보면 안 될까요?”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더 자세히 찾아보라 지시해 두겠습시다.”

끌려가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쳤으면서도 보고 싶어. 제이드와 멜로디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소식도 듣고 싶고. 하지만 아직 돌아갈 수는 없고. 하아-.

아버지와 어머니도 잘 계실까? 수경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연락은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있는 곳을 더 쉽게 찾을지도 몰라.

“상대가 슈레더 악시온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제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 주시면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슈레더 악시온은 또 누굽니까? 그리고, 역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어? 제가 소리 내서 말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슈레더가 누굽니까?”

표정이 살짝 굳은 카시스가 아일라의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바라보고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가 가출하지 않았으면 언약식으로 제 각인자가 됐을 사람이에요.”

아일라의 대답을 들은 카시스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강제로 혼인하게 될 수도 있다던 그자를 말하는 건가. 그자와 아일라가 혼인할 일은 이제 없어. 제가 그리 놔두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갑시다. 제가 그 둘을 더 빨리 찾아내라 일러 두겠습니다. 발도 아플 테니 그만 돌아갑시다.”

아일라는 제이드와 멜로디를 좀 더 찾고 싶어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둘은 나올 때 타고 나온 마차를 타고 대공성으로 돌아갔다.

대공성으로 돌아와 카시스가 내민 손을 잡고 내린 아일라가 그에게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할 때였다. 미카엘이 카시스를 급히 부르며 다가왔다.

“전하.”

“무슨 일이냐?”

미카엘은 아일라를 슬쩍 바라보더니 카시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미카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시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무슨 일 있어요?”

“별일 아닙니다. 아일라, 피곤할 테니 방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정말 별일 아닌 건가요?”

“아일라가 신경 쓰고 걱정할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아일라가 지금 할 일은 방으로 돌아가 쉬는 일입니다.”

“알았어요. 카시스도 편히 쉬어요.”

“그러겠습니다.”

아일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카시스를 뒤로한 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아일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카시스의 표정이 딱딱해지며 미카엘을 돌아봤다.

“그래서? 파르미온의 공주는 돌아왔나?”

“예,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한 시간 전쯤에 돌아왔습니다.”

“어디에 가서 뭘 구했다고? 레안에게 당장 오라고 전해!”

“안 그래도 수장께서 오늘 찾아오신다 했습니다.”

“그래야지. 살고 싶으면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미카엘, 윌리엄 경도 당장 내 집무실로 오라고 해.”

그리 말한 카시스는 안으로 들어가 제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돌아온 카시스는 책상 앞에 삐딱하게 옆으로 앉아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독······. 독이라, 그것도 카르마의 독이라고? 그게 어떤 독인지 정확하게 알고는 있는 건가? 파르미온의 공주는.

카르마의 독은 불구가 되고 서서히 죽어 가는 독이지만, 소량을 장기간 복용하면 피부가 썩듯이 검게 변하기도 한다.

‘누구에게 그 독을 사용하겠다고?’

분명히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책상을 두드리던 카시스의 손도 멈췄다.

“들어와. 그리고 네 녀석도 들어와라.”

집무실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한 카시스는 테라스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테라스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금 들어오는 것이 좋을 거다, 레안드로.”

“하아,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달라고.”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테라스 문이 열리며 레안드로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말해.”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윌리엄은 카시스의 분위기가 심각한 것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파르미온 공주에게 카르마의 독을 줬나?”

“설마 내가 진짜 독을 줬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목이 네게 날아갈 텐데.”

“말해.”

“가짜야. 먹여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아. 셰도우의 주인이 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를 찾아온 거겠지. 칼리스타에 암살 길드는 셰도우 하나뿐이니까. 파르미온의 공주와 함께 온 사람이 데프리카 백작 부인이었어.”

“가만히만 있어 주면 사지 멀쩡하게 곱게 돌려보내 줄 텐데. 어째서 내 경고를 무시하는 걸까?”

카시스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너희가 말해 봐. 가만히 있어 달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 나를 적으로 돌리고 싶은 걸까?”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대공 전하를 적으로 돌리고 싶겠어? 안 그래? 러셀 경.”

레안드로는 윌리엄이 제 말에 동조해 주기를 바랐건만, 그는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말이야.”

“기사들을 붙여서 다니는 데 제약을 걸고 감시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 미카엘.”

“예, 전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쪽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미카엘은 저를 부르는 시린 목소리에 움찔했다.

“데프리카 백작에 대해 알아보는 건 시간을 더 줘야 하는 건가?”

“윈터우드 경께서 신중하게 조사 중입니다.”

“벤자민 프란츠, 그 자식에 대해서도 알아봐. 내가 바쁘다고 너무 조용히 있었는지 요즘 자꾸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녀석들이 있어. 이번에 한 번에 정리 좀 해야겠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카시스의 목소리와 눈빛이 살얼음판처럼 스산했다.

“레안드로, 파르미온 왕국의 동태를 제대로 살펴서 보고해.”

“시키는 일도 많지. 하아-, 알겠습니다. 전하.”

파혼했을 때 다친 곳 없이 고이 돌려보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 곤란해.

내가 너무 조용히 지냈던 것이 확실하군. 겁을 상실한 것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데프리카 백작에게 감히 황족을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본보기로 알려 줘야겠지. 제 연인을 건드리는 것은 저를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키엘에게 데프리카 백작가의 먼지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털어 내라고 전해.”

미카엘이 묵례를 하고 나가자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카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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