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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8화 (48/100)

48화

정말 인간들이 신는 구두는 불편하구나. 대체 어떻게 이런 걸 신고 저렇게 잘 걸어 다니는지 모르겠어.

“아가씨, 발 괜찮으신가요?”

“응, 조금 쓰라린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구두를 조금 더 편하게 맞춰 준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을 것을 괜히 말렸어. 조금 오래 걸으니까 발이 아프네. 발이 안 아프고 이렇게 살갗이 까지지 않는 구두는 없는 건가?

“이봐, 혼자야?”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일라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덩치가 있는 남자가 다가오자 클로에가 아일라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그 앞을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막아섰다.

누구지?

“어느 가문 아가씨야?”

“물러서십시오.”

“뭐야? 비켜. 난 그냥 대화를 하려고 한 것뿐이야. 그보다 내가 누군 줄은 알고 막는 거야?”

디오스가 막아서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군데요?”

이 남자 느낌이 싫어. 어쩐지 슈레더 악시온을 닮은 것 같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벤자민 프란츠다.”

“프란츠 백작가의 영식이었군요. 아무리 영식이라도 아가씨께 이렇게 무례하게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디오스의 말에 아일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프란츠 백작가? 높은 사람인가?

“누가 너희한테 끼어들래? 호위는 빠져. 아까부터 혼자인 것 같은데, 우리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어때?”

“프란츠 영식. 아가씨께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이분이 누구인지 알고 무례하게 구십니까?”

벤자민이 한발 다가오자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으며 말했다.

“정말 무례한 것들이네. 내가 저 여자와 이야기를 한다잖아.”

“이 이상 무례하게 구시면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프란츠 영식.”

“잠깐, 이게 누구야? 반역자 로체스터 남작의 여식 아니야.”

벤자민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꼬자 클로에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너도 같이 놀래?”

무표정하게 있던 라피스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저기, 클라우디스 경들.”

눈을 천천히 깜빡인 아일라가 제 호위로 있는 형제를 부르자 그 둘이 뒤를 돌아봤다.

“그 사람, 카시스보다 높은 사람인가요?”

“카시스? 그 카시스라는 놈이랑 같이 온 거야? 그놈이 누구인지 모르······. 잠깐, 카시스면······.”

“아닙니다. 아가씨, 대공 전하보다 높은 사람은 단 세 분뿐입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후 폐하뿐입니다.”

“그 세 분 이외에 대공 전하보다 높은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저 사람은 뭘 믿고 저러는 거지?

디오스와 아키오스의 설명에 아일라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카시스 대공과 아는 사이였어? 그런 자식 말고 나와 어울리는 것이 어때?”

그런 자식? 지금 카시스에게 그런 자식이라고 한 거야? 카시스는 나처럼 왕족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런 카시스를 함부로 부르네.

카시스보다 못생긴 게.

확실히 객관적으로 못생긴 건 아니지만 카시스에 비해서는 못난 얼굴이다.

“저기, 당신 카시스와 친한가요?”

“그럴 리가.”

“으악!!”

바로 그때 벤자민이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반응했다. 하지만 뒤돌아보기도 전에 팔이 꺾이고 뒷덜미가 한 손에 눌리며 누군가의 무릎이 그의 허리를 찍어 내렸다.

“어떤 자식!”

“카시스!”

어떤 자식이냐고 소리치기도 전에 아일라가 그의 정체를 알려 줬다.

“내가 이런 녀석과 친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카시스는 아일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카, 카시스?”

“내가 네 친구인가? 난 네 녀석에게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라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대공 전하라고 불러야지. 벤자민 프란츠 영식.”

카시스의 시선이 디오스와 아키오스에게 돌아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뭐 하는 거지? 이런 자식이 접근하는 것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고?”

“송구합니다, 전하.”

“전하, 이것 좀 풀어 주십시오.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그걸 지금 몰라서 묻나? 네 녀석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대체 뭘 어쨌다는 겁니까?”

저 사람 시치미 떼는 건가? 방금만 해도 카시스를 그런 자식이라고 했잖아.

“감히 황족을 모독하고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황족 모독이라니요? 저는 전하를 모독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를 그런 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적 없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요. 여기 그 말을 들은 귀가 몇인데 그런 거짓말을 해요?”

아일라가 벤자민의 말에 반박하자 그가 아일라를 노려봤다.

지금 나를 노려보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리고, 하나 더. 감히 내 연인에게 접근해서 뭘 하려고 했지?”

“전하의 연인인 줄 몰랐습니다.”

“몰랐다? 팔콘 기사단의 상징인 독수리 문장이 달린 기사복을 입은 클라우디스 경을 보고도 말인가.”

젠장! 그러고 보니 팔콘 기사단의 기사들이잖아. 저 자식들.

“몰랐다고 해서 전부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 안 그런가? 프란츠 영식.”

카시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 벤자민은 카시스가 뒤에서 무릎으로 누르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아일라와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카시스, 표정이 무서워.

“아악! 아무리 대공 전하라 할지라도 저를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저를 이리 대하실 수는 없습니다.”

“글쎄, 내가 봤다니까. 뭐 좋아.”

“으악!”

퍼억!! 콰당!!

카시스가 벤자민을 걷어차며 팔을 놓자 그가 나가떨어졌다.

“네 건방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지켜봐 주지. 하지만 이건 알아 둬라. 황족 모독죄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조만간 알게 될 거다. 꺼져.”

제 할 말을 마친 카시스가 아일라에게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혀 뒤를 힐끗 봤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험악한 표정으로 부르르 떨고 있는 벤자민을 본 카시스는 디오스와 아키오스에게 명을 내렸다.

“저 자식 치워.”

“명 따르겠습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 자식들아!”

뒤에서 고함을 치는 벤자민을 무시한 카시스가 제 다리 위에 아일라의 발을 올리고 연고를 꺼내 까진 새끼발가락과 뒤꿈치에 발라 줬다. 차가운 연고가 닿는 감촉에 아일라가 움찔했다.

“화 많이 났어요?”

“아닙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또 아니라네.

“화나 보여요.”

“그래 보입니까?”

“표정이 많이 안 좋아요.”

“하아-, 미안합니다. 제가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닌데.”

“그 사람 제게 손끝 하나도 못 댔어요. 기사님들이 제게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줬는걸요.”

그녀의 대답에 카시스의 미간이 꿈틀댔다.

카시스는 벤자민이 클로에에게 반역자의 딸이라고 말한 것부터 봤다. 디오스와 아키오스가 벤자민이 아일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잘 막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진작에 쫓아내지 못한 것에 화가 났다. 또 클로에가 그런 말을 듣게 한 것에도 화가 났다.

벤자민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로체스터 남작은 벨로체 공작과 선 폐황후와 함께 참형된 반역자였지만, 그건 클로에의 잘못은 아니었다. 로체스터 남작가의 사생아로 자식 취급도 못 받고 자란 아이였다. 그런데도 클로에는 저와 윌리엄에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클로에의 보호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윌리엄.

“클로에 로체스터.”

부르기만 한 것인데 클로에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 자식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라. 언제나 말했듯이 네 탓이 아니니.”

그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로체스터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저렇게 죄스러워하니 윌리엄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바보 같은 녀석.”

“네?”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 발로 마을 구경과 그들을 찾으러 다닐 수 있겠습니까?”

“아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쓰라리지만 아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상태로 걸으면 더 심해질 겁니다.”

“충분히 쉬었으니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천천히 걸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당신이 약도 발라 줬잖아요.”

역시 이 사람은 정말 친절해.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친절하지 않으면 제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약을 발라 주지 않을 것 같아.

“역시 구두를 새로 맞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엔 저도 동감이에요.”

“이번에는 싫다고 하지 않는군요.”

“발이 이 지경이 됐으니까요.”

“그럼 드레스는 어떻습니까?”

“많이 적응했어요. 예전처럼 심하게 답답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아요. 드레스는 아직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드레스는 다음에 더 맞추는 걸로 하고.”

“-!!?”

아일라는 제 몸이 갑작스레 공중에 붕 뜨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뭐, 뭐예요? 내려 줘요!”

“걸을 때마다 까진 곳이 스쳐서 아플 겁니다. 그러니 가만히 계십시오.”

“내, 내가 걸을 수 있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떨어지면 다칩니다. 그러니 얌전히 계십시오.”

아일라가 버둥거리자 카시스가 가볍게 고쳐 안으며 대답하고는 그대로 걸어갔다.

‘창피해!’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 아일라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품에 안겨 가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굉장히 민망하고 창피했다. 아틀란에서 이렇게 안겨서 이동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 집중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카시스는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우선 구두부터 다시 맞추고 그들이 묵을 만한 여관을 두세 군데 돌아보고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걸로 합시다.”

“그, 그렇게 해요.”

아일라는 카시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그 두 사람이 지나간 후에 으슥한 골목에서 크레타가 나왔다.

“저 계집에 정말 가만 안 둬.”

크레타는 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셰도우 길드에서 받은, 제가 원하는 독이 든 병이었다.

“카르마의 독이라고 했지. 그걸로 철저하게 망가트려 주겠어.”

“공주님, 저런 여자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대공비 자리에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 공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 말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저희 공주님만큼 대공비에 어울리는 분은 없어요.”

엠버의 말에 키리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손에 넣은 독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의 것을 넘본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해 주겠어. 그만 돌아가자.”

크레타는 엠버가 준비시킨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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