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저건 뭐예요?”
“크레이프라는 겁니다. 먹어 보겠습니까?”
“먹어도 되나요?”
“그대가 먹고 싶다면 사 드리겠습니다.”
아일라는 좌판에 놓인 크레이프를 보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카시스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는 크레이프를 사 와서 그녀의 손에 쥐여 줬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또 말하십시오. 얼마든지 사 드릴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와- 이거 맛있어요.”
제가 뭍으로 올라와 난생처음 먹어 보는 음식들이 많았다.
“천천히 먹으십시오. 뺏어 먹지 않을 겁니다. 급하게 먹다 체합니다.”
아일라가 너무 급하게 먹는 것 같아 카시스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저건 뭔가요? 그리고 저건 뭐고요? 저기 있는 건 뭔가요?”
아일라는 쉴 새도 없이 오징어 꼬치, 솜사탕, 그리고 사탕이 있는 좌판 가게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물었다. 카시스는 그런 아일라를 보며 웃었다.
“사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요, 묻는 것마다 사 오지는 말고요.”
“먹고 싶으면 먹어야 합니다.”
“아니요, 지금 당장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궁금한 것뿐이에요.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라서요.”
“그럼 다음에 하나씩 사 드리겠습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또 나와서 사 먹이면 될 거다, 카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제이드와 멜로디를 만난 곳이 여기서 멀까요?”
“걸어서 20분 정도면 갈 겁니다. 마차를 타고 가시겠습니까?”
“아니요, 걸어가면서 더 구경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데 발은 괜찮으십니까?”
발? 조금 전부터 살짝 아파 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구두는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더니,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진 듯합니다.”
“익숙해지는 것과 발이 아픈 건 별개예요.”
“발이 아프다면 마차를 탈까요?”
“마차를 타면 구경을 제대로 못 하잖아요.”
밖으로 잘 나오지도 못하는데 나온 김에 이렇게라도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럼 못 걷겠으면 말하십시오.”
“알겠어요.”
“나는 정말 당신 같은 친절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야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가 여태껏 만난 사람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제 측근밖에 없으니까. 그중에서 제일 많이 만난 사람은 다니엘이었다.
아일라가 주변을 신기한 듯 둘러보며 밝게 웃다 그에게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카시스는 잠시 멈칫했다. 아일라는 주변을 살피느라 제가 카시스의 팔짱을 끼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시스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런 아일라를 보는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시각, 크레타는 암살 길드인 셰도우를 찾아가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길드장 나오라고 하라니까!”
“길드장님은 아무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나라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당신이 누구든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크레타를 상대하고 있는 안내대의 남자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적갈색 곱슬머리, 약간 가무잡잡한 적동색 피부에 적갈색 눈동자, 바로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였다. 암살하는 데도 의뢰인과 암살 대상의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보를 중요시 여기는 건 길드장이나 셰도우의 실질적인 주인인 칼리스토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희 길드장님은 아무나 하는 의뢰를 함부로 받지 않습니다.”
“지금 내게 아무나라고 한 거냐? 너 따위가. 길드장 나오라고 하라고!!”
“횡포는 그만.”
“무슨 일이냐?”
뒤에서 들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남자는 뒤를 돌아보더니 묵례를 했다.
“길드장님.”
“아래서 소란이 일어났다기에 직접 내려와 봤더니, 칼리스토 대공 전하의 약혼녀인 파르미온의 공주님 아니십니까?”
“네가 여기 길드장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레안드로는 크레타의 무례한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 아랫것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그것까지 공주님 신경 쓰실 일이 아닐 텐데요. 제 애들 교육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저보다 더 무시무시한 녀석이 하겠지만.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지?”
“어투가 무례하군요?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님이시고 대공비가 되실 분입니다.”
“이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키리아의 말에 레안드로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쪽이 공주든 대공비가 되든 나랑은 상관없어. 우리에게는 의뢰인이나 암살 대상이나 다 똑같아. 여기 와서 예의를 바라지는 말아야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로군요!”
뭐야? 시녀장 데프레카 백작 부인이잖아. 재밌네. 역시 파르미온 공주 쪽에 붙은 건가?
“그럼 그냥 가든가. 우린 아쉬운 것 없으니까.”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 알아내서 카시스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굳이 의뢰를 받지 않아도 알아낼 수도 있기는 하지만.
“너, 실력 좋아?”
크레타의 물음에 레안드로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실력이 있으니 여기서 먹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내 의뢰를 받아.”
공주라 그런지 말하는 게 정말 짜증 나네. 그래도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볼까?
“무슨 의뢰를 하시려고요?”
“독을 줘. 그리고 여자 하나를 불구를 만들어 줘.”
암살 의뢰가 아니라 불구를 만들어 달라고? 설마 카시스는 아닐 테고.
“누구를 말입니까?”
“아일라 아틀란이라는 계집애를 불구로 만들어 줘.”
“이봐, 공주님. 지금 뭐라고 했어?”
“아일라 아틀란이라는 계집애를 습격해서 불구로 만들어 달라고. 사실은 죽이고 싶지만 그 계집애에게 제 나라가 멸망하는 걸 보여 주고 싶으니까, 지금은 불구로 만족하겠어.”
빌어먹을! 괜히 물어봤군.
이 겁도 없는 공주 같으니라고. 카시스를 건드리는 의뢰도 위험할 판에, 지금 누구를 어떻게 해 달라고? 이 여자 미친 건가? 지금 카시스가 그 마린족 공주님과 함께 마을 구경을 하고 있는 걸 알고 말하는 건가.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이건 아주 제대로 돌았어. 아주 단단히 미친 공주님이야. 누구를 죽이려고? 그래도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되겠지.
“여기서 할 말은 아니니 내 집무실로 가서 그 의뢰에 대해 자세히 들어 볼까? 따라와.”
레안드로는 크레타를 돌아보며 웃더니 크레타가 눈치채지 못하게 손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지금 미카엘에게 오늘 성으로 찾아간다고 해. 중요한 일이라고 카시스에게 전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레안드로가 남자에게만 들리게 작게 말하며 지나치고 그의 지시를 들은 남자는 미카엘에게 연락하기 위해서 자리를 떠났다.
카시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의뢰 내용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 그래도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그냥 돌려보내고 다른 곳에 가서 독을 구한다 해도 제가 알아내서 카시스에게 보고하면 그만이지만. 그랬다가는 더 죽이려 들지도 몰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젠장! 미치겠군! 파르미온으로 다시 건너가야 할 판인데. 이 미친 여자가 일을 더 만들어 주는군.
레안드로는 제 집무실에 크레타 일행을 들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습격을 해서 불구로 만들어 달라는 거야? 독을 써서 불구를 만들겠다는 거야? 공주님.”
“공주님께 너무 무례하시군요.”
“거기 시녀들, 좀 닥쳐. 내가 말했잖아. 의뢰인이나 암살 대상이나 내게 똑같다고.”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예의 차리게 생겼냐?
“너 내가 누군지 알면서 너무 무례하잖아.”
“그래서 의뢰 안 하려고? 그럼 말아.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알고 있어? 칼리스타에서 암살 길드는 우리 길드밖에 없어. 여기서 공주 대접받을 생각하지마. 그리고 그쪽…… 아직 대공비도 아니잖아.”
크레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부르르 떨었다. 아일라를 처리하면 이것들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화를 눌렀다.
“어떻게 할 거야?”
“해! 독은 그 계집을 서서히 죽어 가게 만드는 독과 마비 독, 이 두 가지를 줘. 그리고 습격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불구로 만들어 주고.”
“꽤 위험한 의뢰인 거 알아? 칼리스토 대공을 건드리는 의뢰야, 이거.”
“누가 대공 전하를 건드리라고 했어? 아일라 아틀란, 그 계집애를 처리하라는 거지.”
“하아, 그게 칼리스토 대공을 건드리는 거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공주님이 처리하라고 한 그 여자, 칼리스토 대공의 연인이야.”
“누가 연인이야!!”
크레타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정보통이 틀릴 리가 없는데. 연인 맞아.”
“아니, 틀렸어!”
“그럼, 내가 이 의뢰를 받아들이면 공주님은 뭘 걸 거야? 난 이래 봬도 목숨값이 꽤 비싸.”
내가 그쪽과 있던 일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카시스에게 보고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쪽도 목숨을 걸어야지.
“얼마면 돼?”
“돈으로 되겠어? 천하에 칼리스토 대공의 연인이라니까.”
“아니래도!”
그쪽이 아니래도 아니게 되는 게 아니라니까.
“7000골드.”
“뭐? 그 계집애 죽이는데 7000골드나 내놓으라고?!”
“내 몸값이 비싸다니까. 거기다 이건 아주 위험한 의뢰야. 그러니까 우리 애들 위험 수당도 당연히 챙겨야지. 공주님이잖아. 설마 그만한 돈도 없이 이런 위험한 일을 우리에게 의뢰하려고 한 건 아니겠지? 못 내겠으면 말아. 나도 이 의뢰 못 받아. 그런데 그거 알아? 만일 칼리스타에 다른 암살 길드가 있어도 나보다 더 부르면 더 불렀지 덜 부르지는 않아. 나는 그나마 싸게 해 준 거야.”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할지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칼리스토 대공을 건드리는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겠지.
“나 이래 봬도 바쁜 사람이야. 빨리 정해.”
“알았어. 그래도 지금 전부 줄 수는 없어. 선금 500골드.”
“이봐, 공주님. 원금이 7000골드인데 선금이 500골드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선금 500골드하고 자, 이러면 됐지. 이것들을 합치면 2000골드는 족히 넘을 거야.”
크레타는 머리 장신구와 파도와 하프 문양이 들어간 에메랄드 브로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면 충분하겠어. 카시스에게 주면 나중에 알아서 하겠지. 진짜 내가 마린족 공주님을 습격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
“나머지는 그 계집애를 내가 말한 대로 제대로 처리해 주면, 그때 주겠어.”
“좋아.”
“확실한 거지?”
“일단 의뢰는 받았으니까. 그만 돌아가. 독은 나가서 잠시만 기다리면 받아갈 수 있을 거야.”
“언제 처리해 줄 수 있어?”
“이봐, 공주님. 우리도 계획이라는 것을 세워야지. 미쳤다고 계획도 없이 움직이겠어? 그건 자살 행위야.”
“그러면 믿고 기다리겠어.”
믿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쪽이 준 건 전부 카시스 손에 넘어갈 예정이고 내게 무슨 의뢰를 했는지도 전부 카시스가 듣게 될 테니까.
“믿으라니까.”
크레타가 나간 뒤 레안드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른세수를 한 레안드로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열었다.
“나와.”
“정말 저 의뢰, 하실 생각입니까?”
“미쳤냐? 너는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거냐? 그리고 셰도우의 진정한 주인이 그 녀석인데. 그런 녀석을 내가 물어뜯으라고?”
“그럼 어째서 들이신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야 할 거 아니야. 알아보는 거야 쉽지. 하지만 저쪽이 직접 움직여 줬으니 나도 직접 상대해 줘야 할 것 아니야.”
“살아 돌아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너는 내가 죽기를 바라냐?”
“아닙니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정말 미친 여자야.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냐. 그 녀석은 자기 것을 건드리는 걸 진짜 싫어하는데. 돌아버리겠네. 진짜.
“파르미온이 속 썩인단 말이야 젠장!”
레안드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 * *
“발이 아프면 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몰랐어요.”
“하아-.”
아일라가 걷다가 작게 신음하는 소리에 카시스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눈썹을 찌푸린 카시스는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 무릎에 아일라의 발을 올리고는 구두를 벗기자, 발갛게 까진 새끼발가락과 뒤꿈치가 보였다.
“제이드와 멜로디를 만난 곳이 이쯤이었으니 찾아봐야 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제게는 중요해요.”
제이드와 멜로디를 만나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이 발로 더 걷는 건 힘듭니다. 잠시 여기 앉아 있으십시오.”
“어디 가요?”
카시스가 일어나 가려고 하자 아일라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발에 바를 연고라도 구해 올 테니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으십시오.”
카시스는 아일라가 붙잡은 소매를 살며시 떼어 냈다. 그리고 디오스와 아키오스에게 아일라를 지키라 지시를 내리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