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카시스는 아일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카시스는 다니엘과 대화가 길어지면 혹여라도 아일라가 저를 기다릴까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먼저 준비하러 간 아일라가 그보다도 늦게 1층 로비로 나왔다.
역시 다니엘의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불행해질 것이란 다니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 그의 기분을 더 저조하게 만들었다.
‘불행해질 거라고? 해 보지 않고 어떻게 알지. 아일라는 인어족이 아니라 마린족이다. 인어족과는 다르다.’
“······시스. 카, 시스.”
“저를 불렀습니까?”
“저기, 뭔가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나요? 혹시 아까 제이드 얘기 때문에 아직도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정말 제이드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리고 말했다시피 제이드는 이미 각인자가 있고요.”
제가 왜 이런 변명을 계속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시스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이유가 아직도 제이드와 제 관계를 오해해서라면 그 오해를 풀어야 했다.
“그런 것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일라,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일라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말하라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그대는 정말 인간들 사이에서 각인자를 찾을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이에요.”
“어째섭니까?”
“음-,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종족이 다르지만 혼인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요. 저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요.”
“무슨 이야기였습니까?”
“인어족의 공주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요.”
아일라가 들었다는 이야기, 혹시 내가 다니엘에게 들은 이야기인가? 하지만 다니엘이 들려준 이야기의 결말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다니엘이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어.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일뿐더러 10년 이상을 이종족 노예상 깊은 곳에 갇혀 있었으니까.
“행복한 결말 맞습니까?”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서는 언제나 행복한 결말이었는 걸요.”
그래, 다니엘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일 거다.
“아일라. 만약에 말입니다. 그대가 다른 각인자를 찾을 필요가 없어지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안 돼요! 저는 반드시 진정한 각인자를 찾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아버지 허락을 받을 거예요. 이 세상에는 아버지께서 생각한 만큼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도 증명할 거예요!”
“제 말은 각인자를 따로 찾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네?”
“이미 저와 각인이 됐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건 당신이 원해서 각인이 된 게 아니잖아요.”
물론, 제가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니기는 하다.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생긴 것이니까. 하지만…….
“제가 만일 그대와 이 각인을 끊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안 돼요! 저야 당신 같은 사람이 제 각인으로 남아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당신이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니니 반드시 끊어야 해요. 당신은 원하지는 않는 약혼녀가 생겼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까지 당신이 원하지는 않았는데 각인 때문에 평생을 함께해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카시스의 미간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아일라의 말에 카시스는 입 안의 속살을 깨물었다.
“다니엘은 왕족이 각인을 끊을 수 있다는 듯이 말했어요. 아버지를 설득하면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각인을 끊어 주실 거예요.”
“만약, 제가 그대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생겼고 앞으로 그 마음이 깊어질 수 있다고 하면, 각인자로 남아도 되는 겁니까?”
“네? 뭐라고요?”
“제게 당신과 혼인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마음이 생기면 이 각인을 그대로 둬도 되느냐고 물은 겁니다.”
“······저기, 카시스. 제가 지금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러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저를 좋아하나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 감정이 정말 당신을 좋아해서 나오는 것인지는. 하지만, 그대가 계약이라느니, 가짜라는 말을 할 때마다 화가 납니다.”
분명히 계약도 맞고 가짜 연인도 맞는데. 아일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마다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났다. 파르미온의 공주가 아일라에게 손찌검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일라를 때린 손목을 자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파르미온의 공주와의 거짓된 약혼은 언제든 깨뜨리고 싶었지만, 아일라와의 가짜 연인 사이는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깨뜨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 그대와 더 시간을 가져 볼까 합니다. 그대가 아직도 불편해하는 구두와 드레스도 그대에게 맞게, 그대가 원하는 대로 다시 주문할 겁니다.”
“아니, 아니요! 드레스하고 구두는 이제 됐어요. 너무 많다고요.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요.”
아일라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치고 말했다.
“아일라. 이 마음이 정말 그대를 좋아하게 되어 생기는 감정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그대에게 다가갈 겁니다. 그러니 그대도 뿌리치지 말고, 밀어내기만 하지 말고 각인은 끊을 생각하기 전에 한 번만 자신의 마음을 돌아봐 주었으면 합니다.”
‘내 마음’하며 작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마음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누누이 말했듯이 저는 그리 착하지도 않고 아무에게나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대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 그리고 다니엘과 같은 종족이라는 것만으로 제가 그대에게 이렇게까지 맞춰 주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베풀 정도로 좋은 녀석이 아니니 말입니다.”
다니엘도 처음에는 형님이 제게 떠밀어서 그를 데리고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일라를 데리고 와 보호는 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분명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할 수도 있었다. 지금 파르미온의 공주처럼.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벨로체 때도 이 정도였나? 아니, 이 정도로 그녀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벨로체가 제게 검을 겨누었을 때는 어땠지?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벨로체에게 배신감이 들었나? 글쎄, 그것이 배신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담담한 기분이었으니까. 저는 담담했는데 형님과 제 주변인들은 아니었지.
‘아일라는 벨로체 때하고는 다르다.’
만일 아일라가 벨로체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저는 어떤 기분일까?
‘생각도 하기 싫군.’
아일라가 제게 검을 겨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아프다.
“카시스 갑자기 왜 그러나요? 어디 아파요?”
“아닙니다. 저는 꽤 건강합니다.”
“하지만, 지금 굉장히 괴로운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어요.”
벨로체처럼 아일라가 제게 검을 겨누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괴롭다고 느꼈는데 그게 얼굴에 전부 나타난 모양이군.
“정말 아픈 데 없습니다. 조금 안 좋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괴로운 얼굴이었어요?”
“글쎄요,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라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안 좋은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 아픈 줄 알았단 말이에요.”
“제가 아프지 않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아일라가 멍하니 깜빡였다.
“제가 카시스가 아프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건가요?”
“충분히 도와줄 수 있습니다.”
카시스는 그린 듯한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아일라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식사를 마치고 칼리스타도 구경하면서 그들을 찾아보도록 하죠.”
손등에 입을 맞추고 빙긋 웃어 보이는 카시스의 미소를 본 아일라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얼굴이 빨갛습니다.”
착각이 아니었나? 진짜 얼굴이 빨개진 거야?
원하지 않은 각인이 만들어져서 이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면 내 각인자는 정말 이 사람이어야만 될 것 같잖아!
아일라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 *
“대공 전하와 그 계집애가 또 함께 나갔다고?”
“예, 공주님.”
“키리아, 여기 시녀장 오라고 해. 지금 당장!”
크레타의 명에 그녀의 시녀가 방을 나갔다.
죽이고 싶지만 그 계집애에게 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여 줘야 하니 어느 한 곳이라도 불구를 만들어 놓는 것도 좋겠어.
그 계집애가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가 되면 전하께서도 그 계집애를 버리실 거야.
“공주님 데프리카 시녀장님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크레타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엠버 데프리카와 그녀를 부르러 간 키리아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내게 했던 말 기억하지? 네가 내 편이고 나를 돕겠다고 한 말.”
“물론입니다, 공주님. 대공비는 공주님 같은 고귀한 분이 앉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럼 이곳의 길드를 잘 알고 있나?”
“어떤 길드를 말씀하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암살 길드.”
암살 길드라는 말에 엠버는 잠시 당황했지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길드이며 전하께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로 나를 안내해 줘야겠어.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엠버는 잘못 알고 있었다. 칼리스타에 유일하게 있는 길드를 카시스가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곳의 진정한 주인이 길드장인 레안드로가 아닌 카시스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카시스가 셰도우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최측근 몇 명과 황제와 황후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곳에 의뢰되는 내용은 당연히 카시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곳에 독도 팔겠지?”
“암살 길드이니 있을 겁니다.”
크레타는 엠버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엠버와 키리아에게 나갈 채비를 맡겼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지, 크레타는 알지 못했다. 그 암살 길드를 찾아갔던 일이 나중에 제게 어떻게 되돌아올지도 모른 채. 카시스의 분노를 살 잘못된 선택인지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