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5화 (45/100)
  • 45화

    “카시스, 나는 당신이 어느 부분에서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화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지금 당신은 화가 났어요.”

    “화,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화났어. 아무리 봐도 화가 난 게 분명해.

    “왜 화가 났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저는 몰라요.”

    “······.”

    “카시스, 이유를 말해 줘요. 왜 그렇게 제게 화가 난 건지.”

    “하아, 정말 그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단지?

    “그대가 남자의 이름을 그렇게 편히 부르는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이드의 이름을 말한 것이 당신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건가요?”

    또다시 아일라의 입에서 제이드의 이름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자 카시스의 표정이 굳으며 입이 일자로 굳었다.

    “그대가 그자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싫습니다.”

    “하지만 제이드는 제 친군데요.”

    “정말 친굽니까?”

    제이드와 소꿉친구이면서 호위 이외에 다른 관계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를 좋아했습니까? 아니, 지금도 좋아합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누가 누구를 좋아해요? 제가 제이드를요? 아하하-!”

    아일라가 웃음을 터트리자 카시스의 표정이 더 굳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냥 소꿉친구라니까요. 그리고 제이드는 이미 각인된 반려가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카시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각인자가 있는 겁니까?”

    “제이드의 각인자는 저하고는 다르게 어린 시절에 정해졌어요.”

    제가 슈레더 악시온과의 언약식을 거부해 남들보다 각인이 늦어진 것도 있지만 제이드와 멜로디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지. 둘이서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고.

    “며칠 전 마을에서 만난 제이드와 함께 있던 여자가 바로 제이드의 각인자인 멜로디예요.”

    그 말에 카시스는 로브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명 중 한 명은 여인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체형이 작은 사내도 있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히 여인이었다.

    “각인자가 있다니 다행이군요.”

    마린족은 각인자와 혼인해야 한다고 했으니 별문제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되는 카시스였다.

    “그런데, 아직 그 두 사람이 어디서 묵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카시스의 시선이 다니엘에게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니엘에게 찾아보라고 지시했는데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아직 못 찾은 듯합니다.”

    “괜찮아요. 바쁘면 어쩔 수 없죠.”

    오히려 조금 더 늦게 찾는 게 내겐 좋을지도 몰라. 멀찍이서 본다고 해도 언젠가는 들킬 테니까.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제이드와 멜로디가 사람들을 겪어 보고 나와 같이 사람들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면 아버지는 아직 무리일지 몰라도 제이드는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려면 제이드와 멜로디와 마주치는 걸 더 이상 두려워하면 안 돼. 끌려가는 것을 각오하고 만나야 할 거야.

    ‘좋아, 결정했어.’

    “카시스, 그냥 제가 찾아봐도 될까요?”

    “아일라가 직접 말입니까?”

    “그때는 나를 알아보면 아틀란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서웠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무슨 생각이 바뀌었다는 겁니까?”

    “제이드를 설득해서 제 편으로 만들려고요.”

    그녀의 말에 카시스가 아일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무슨 설득을 한다는 것인지 생각에 잠겼다.

    “마린족에서도 저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잖아요. 인간들과 교류하고 같이 마물도 해치우고.”

    “그래서 지금 직접 찾아보고 만나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나를 강제로 데려가지 못하게 당신이 막아 줄 거잖아요.”

    “그럴 겁니다.”

    “그럼 된 거잖아요.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나가 봐요.”

    “지금 말입니까?”

    “네, 지금이요. 그리고 저번에 저 때문에 보지 못했던 오페라라는 것도 보러 가요.”

    아일라의 말에 카시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오페라는 기간이 끝나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대신 제 영지 구경을 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저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요.”

    그렇게 말한 아일라는 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로 넘어질 수 있으니 뛰지 말라고 카시스가 소리쳤지만 아일라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 * *

    “전하, 전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카시스도 외출 준비를 위해 대공성의 제 방으로 돌아왔는데 다니엘이 뒤따라와 그를 붙잡았다.

    “왜 그러지?”

    “전하, 혹시······.”

    다니엘을 뒷말을 삼키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지?”

    “혹시, 공주님께 마음이 있으십니까?”

    “무슨 마음을 말하는 거지?”

    카시스는 다니엘이 무엇을 묻는지 눈치챘지만 아닌 척 되물었다.

    “전하께서 아일라 공주님께 진심으로 마음을 주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내가 아일라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전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뭐를 알고 있다는 것일까?

    “전하와 공주님은 안 됩니다.”

    안 된다고? 왜? 형님도 그렇고 다니엘도 그렇게 왜 미리 안 된다고만 하는 거지?

    “두 분이서 서로 진심이라고 할지라도 불행해질 뿐입니다.”

    불행해진다고? 어째서 불행해진다고 하는거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째서 다니엘은 불행해진다고 단정지으면서 말하는 것일까.

    “불행해진다. 어째서 불행해진다는 것이냐?”

    “그것은······.”

    “종족이 다르기 때문에? 설마 다니엘 경, 그대도 종족이 다르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다니엘 입에서 나올 말을 알아챈 카시스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잘라 냈다.

    형님도 그렇게 다니엘도 그렇고. 이러면 오기로라도 아일라와 더 잘되고 싶어지는데.

    “종족 간의 문화 차이, 그건 서로 맞춰 갈 수 있는거다. 너희와 우리가 다른 게 뭐가 있지? 너희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 그것 이외에 우리와 뭐가 다르지?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물의 마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다른 게 딱 한 가지밖에 없군.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것이 뭐가 어떻다는 거냐.”

    인간들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 그건 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다고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 마법으로 보호하고 물속에 오랫동안 있다가 나오는 걸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녀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물속 깊이 들어가 오랫동안 머물 일은 없지만,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제 몸을 보호하는 보호막을 만들어 물속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잘만 얼버무리면 문제될 것은 없다.

    “전하.”

    “안 될 이유는 없어. 이종족끼리 결합이 안 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자꾸 이러면 오기로라도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어지는데. 형님이나 다니엘이나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군.

    “다니엘, 종족이 다르다고 해서 어째서 혼인을 하면 안 된다는 거지?”

    “저는 단지 종족이 달라서 안 된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도 아가씨도 불행해지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이유를 대라.”

    “······전하, 전하께서는 지금 가진 상당히 높은 작위와 권력을 버리실 수 있으십니까?”

    다니엘은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니엘의 물음에 카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있는 자리는 제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저는 이미 불행을 겪은 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들려드리는 이야기를 잘 들어 주십시오. 오래전 인어족의 공주는 한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둘이 죽지 않는 한 헤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인간 남자는 실은 꽤 높은 작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작위와 권력을 놓지 못하고 끝내 인어족 공주를 버렸다. 인어족 공주는 인어족 왕의 분노를 사서 갇히게 되었다. 하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인어족 공주는 임신을 한 상태였고 아이는 바다 속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기는 불행하게도 인간의 피를 더 짙게 타고난 듯했다. 두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 데다 인어족의 특징을 단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피만 짙게 받고 태어난 아기는 바다 속에서 숨을 쉴 수 없어, 이내 죽어 버렸다. 그 후 인어족의 공주는 미쳐 버린 채 제 종족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카시스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그래서 그 인어는 어떻게 됐나.”

    “죽음의 바다로 쫓겨나 그곳을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건 제가 어릴 때 있던 일이고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니엘은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했고, 결국 물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잡혀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갇혀 있었다.

    “전하께서는 황족이고 대공이면서 칼리스타의 대영주십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아틀란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십니다. 송구한 이야기지만 두 분께서는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

    “본래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던 왕께서는 그 이후 인간을 더 싫어하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인어족의 공주와 왕비님께서 친한 친우였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님께서 두 분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내가 그대들의 공주를 버릴까 그것이 걱정되는 것이로군. 다니엘, 그대는 그동안 나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본 것인가?”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파르미온 공주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것은 다 그만한 사정이 있어서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 저희 공주님보다는 파르미온의 공주님이 오히려 전하께······.”

    “하아-, 그만. 거기까지 해라, 다니엘.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그렇다면 경은 그만 가 봐. 나도 나갈 채비를 하고 나가 봐야 하니.”

    카시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경고했다.

    원한 것도 아니고 진짜 약혼이라고도 할 수 없다. 파르미온의 공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건 저와 폐하와 몇 제 측근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크레타는 파르미온의 협조를 얻어 내고 혹여나 허튼짓을 꾸미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일 뿐이다. 다니엘도 처음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알고 있으면서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저도 인어족 공주를 버린 자처럼 아일라를 버릴 것이라 여겨서 인가.

    “내가 그대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나 보군. 내가 파르미온 공주를 냉대하는 것은 파혼을 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인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카시스는 대답을 하지 않는 다니엘을 두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다니엘과 대화가 길어졌다. 아일라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