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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3화 (43/100)
  • 43화

    “네까짓 것이 뭐기에 나한테 충고를 해.”

    “다 당신을 위해서 해 주는 충고인데요. 안 듣겠다면 어쩔 수 없고요. 식사나 하죠.”

    내 충고를 듣고 싶지 않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그나저나 정말 내 말장난에 걸려들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너, 나를 바보 취급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가만 안 둬!”

    크레타가 버럭 성질을 내며 식당을 나가 버렸다.

    “파르미온의 공주에게 한 방 먹였군요.”

    “생각 이상으로 파르미온의 공주를 잘 상대하는군요.”

    “그런가요?”

    “예, 기대 이상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너무 심하게 도발하지는 마십시오.”

    “도발한 적은 없어요. 그리고 상관없어요. 저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정말 저 공주와 식사를 같이 할 건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약혼녀 대접을 해 주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걸 왜 묻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왜 저 여자와 카시스가 같이 식사를 하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쁠 것 같지.

    계약 관계일 뿐이고 언젠가는 원하지도 않게 생긴 각인을 끊어야 하는 사인데. 어째서 같이 식사하겠다는 저 말에 나는 기분이 안 좋은 것일까.

    나는 카시스가 나하고만 함께 식사를 했으면 좋겠어. 어제처럼 같이 마을 구경도 하고.

    그러고 보니 어제 제이드와 멜로디를 만났었지. 내가 아일라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라도 잠깐이나마 보고 싶어.

    그 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저기, 아까 그 여자 때문에 말이 끊겼지만…… 카시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말하십시오.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제 그 두 사람이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그들은 왜 찾는 겁니까? 어제는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더니 말입니다.”

    “그 둘에게 잡혀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는 알고 싶어요.”

    멀리서나마 잠깐 보고 와도 괜찮을 것 같고.

    “갑자기 돌아가고 싶어졌다거나······.”

    “아니요, 그런 거 절대로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나는 어째서 돌아가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안심을 하는 걸까.

    “제가 아틀란을 나온 이유, 말했잖아요. 제 진정한 반려를 찾고 당신에게 새겨진 각인도 해결하고 아버지가 제 말을 들어줄 때까지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대가 제게 새긴 각인 해결 방법은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죠. 제 일인데 그대와 다니엘에게 맡겨 두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게 좋겠어요. 그럼 제 반려 찾는 것도 겸사겸사 도와주세요.”

    반려를 찾는 것을 도와달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그에 아일라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당신이 찾아 달라면 어제 그 둘이 어디서 묵고 있는지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어? 더 안 드세요?”

    “배불리 먹었습니다. 마저 드시고 일어나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아일라와 함께 있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하아-, 정말 이 기분 뭐지? 상당히 기분이 나쁘군.”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가슴 쪽이 욱신거리며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어느 대목에서 기분이 나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각인 탓이 아니라는 건가.

    “전하.”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이군.”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티가 났나. 하아-, 나도 아직 멀었군. 기분 안 좋은 것을 타인이 눈치챌 정도로 드러내다니.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했군.

    “안 그래도 전할 말이 있었다. 아일라가 경과 훈련을 계속하고 싶다고 하는군. 그리고······, 어제 마린족으로 보이는 녀석들을 만났다.”

    “······.”

    “한 명은 여자, 한 명은 남자였어.”

    망토와 후드 때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일라가 그 둘이 지금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하는군.”

    “다른 마린족입니까?”

    “아무래도 아일라를 찾으러 온 것 같더군.”

    “용케도 들키지 않았군요.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꾼 것만 아니었으면 그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내가 막았으니까. 각인이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돌려보낼 수는 없지.”

    욱신!

    뭐지? 내가 말하고도 기분이 좋지 않아.

    “하지만 찾는 쪽이라면 저보다는 미카엘 경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그대도 마린족이니 같이 찾아보도록.”

    “예, 알겠습니다.”

    다니엘에게 지시를 내리고 집무실로 돌아와 서류를 훑으며 사인을 하던 카시스의 손이 멈췄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왔다.

    “쥐새끼처럼 들어오는 것 좀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쥐새낍니까? 주인님.”

    “그 호칭도 집어치우라고도 했을 텐데.”

    “너 말이야. 호위로 보내라고 하더니 하녀로 집어넣냐?”

    “호위다. 같은 여인으로 가까이에서 지키라고 조치한 거다. 어차피 그 둘도 하녀 일은 할 수 있지 않나.”

    사내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있다. 아일라의 하녀로 들여보낸 셰도우의 일원은 그럴 때를 대비해 곁에서 지키라고 하녀로 배정한 거다.

    “네가 자꾸 잊나 본데, 우리는 암살자들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굳이 아는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네가 자꾸 우리를 암살자로 안 보니까 하는 말 아니야.”

    “온 용건이나 말해. 설마 하녀로 보냈다고 쫓아온 건 아니겠지. 네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말이야.”

    그것 때문에 왔다고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뜻을 담아 카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 때문에 왔는데. 넌 내 애들을 뭘로 보고 자꾸……!”

    “죽고 싶다는 거군.”

    “야야!”

    카시스의 손에서 펜대가 파삭 부서졌고 그의 주위로 섬짓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기운 좀 가라앉히지. 이것 좀 봐 봐.”

    콰앙-!!

    “전하! 무슨 일-.”

    “이봐라, 네 녀석이 기운을 흘리니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저 녀석들이 득달같이 달려왔잖아.”

    레안드로가 서류를 꺼내 카시스 앞에 내려놓은 순간 집무실 문이 열렸다. 미카엘, 윌리엄, 다니엘, 이제키엘은 급하게 달려온 것 같았다.

    “내 성에서 내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달려들 오고 그러나.”

    “숨어든 인기척이 있어서 자객인가 싶었습니다.”

    “윌리엄 경. 그대라면 분명 레안드로라는 것을 눈치챘을 텐데.”

    알고 있으면서도 달려온 건가. 정말이지 쓸데없이 걱정만 심하군.

    “그건 그렇고 이게 정말인가.”

    “내가 설마 거짓으로 꾸며서 가져왔을까.”

    “파르미온 왕국에서 환영족이 사라진 게 두 번째라는 거군.”

    첫 번째는 착각일 수 있다고 치더라도 두 번째라.

    “확실히 환영족이 맞기는 했나.”

    “황후 폐하 같은 진실의 눈을 가진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는데 나라서 못 믿는 건가. 내게 환영족을 탐지할 수 있는 마법 도구를 주고 나서.”

    환영족이 처음 파르미온 왕국에서 종족을 감춘 것은 내가 그들을 쫓았을 때다. 이번이 두 번 째라면.

    “어떻게 하다가 쫓게 된 거냐.”

    “쫓았다기보다는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해야겠지.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

    “처음에는 환영족일 거라고 생각 못했지. 우리에게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보이니까. 마법 도구가 반응해서 알게 됐어. 하지만 마법 도구가 반응했을 뿐 진짜 환영족인지 확인은 못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환영족을 두 번이나 놓쳤다고 자랑하는 건가?

    “네 말은 그러니까. 두 번이나 놓쳤다는 거로군.”

    카시스의 입가가 올라가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어이, 진정해. 내가 말했잖아,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너도 알다시피 황후 폐하께서 직접 움직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법 도구에 의지해. 그러다 보니 쫓는 게 쉽지 않아.”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하아-, 파르미온 왕국을 근거지로 삼은 건가. 그럴 수 있다.

    “레안, 파르미온 왕국의 누군가와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 알아봐.”

    “확실히 누군가 숨겨 주거나 도와주면서 협력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네요.”

    이제키엘이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턱을 쓸며 말했다.

    “정말이지 말들은 잘해. 그걸 알아보는 게 쉽겠냐? 피르미온 왕국에서 누구와 접촉하는지 알아내는 게 쉽냐고. 누가 환영족인지도 모르는데.”

    “너 능력 되잖아.”

    “그러니까 내가 아까부터 말했잖아. 마도구에 의지하다 보면 힘들다고.”

    확실히 황후 폐하께서 진실의 눈을 지니고 계셔서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럼 파르미온 녀석들의 움직임이 이상한 것이 없는지 알아봐. 움직임이 이상한 녀석들을 쫓다 보면 그중에서 운 좋게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예예, 그러도록 하죠. 아, 수상한 움직임이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파르미온의 공주가 몰래 제 나라로 편지를 보내는 것 같던데. 수상해서 일단 잡기는 했는데 어떻게 할까?”

    “편지는?”

    “여기.”

    편지를 건네받은 카시스의 봉투를 찢어 편지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정말 황제 폐하께 항의라도 하라고 할 생각인가.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이 편지가 그냥 가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이 누구든지 내 성에서 내 영역에서 내게 숨기고 뒤로 딴짓을 하는 것을 못 본 체해 줄 생각은 없다.

    “잡은 녀석은 처리하고 편지는 별 내용 없으니까 파르미온 왕국으로 보내.”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가씨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미카엘이 편지를 받아 내용을 읽더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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