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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2화 (42/100)

42화

그리고 그 계집애를 반드시 없애 버리고 말겠어.

“지금은 전하께서 그 계집애에게 홀려서 그러시는 것뿐이야. 그 계집애만 없어지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실 거야. 누가 위인지 확실히 알려 주겠어.”

크레타는 알지 못했다. 아틀란이 깊은 바다 속에 있는 나라라는 것을. 설령 알아낸다 할지라도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너 따위에게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

난 단 한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겨 본 적이 없어. 칼리스토 대공비 자리는 네까짓 것이 넘볼 자리가 아니란 것을 알려 주지.

“그년 앞에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여 주며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겠어.”

* * *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 클로에.”

커튼을 젖히고 아일라를 깨운 클로에는 대야에 물을 받아 와 그녀를 씻기고는 단장을 해 주고 있었다.

똑똑똑!

“미카엘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요.”

미카엘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그의 뒤에 아직 앳된 태를 벗지 못한 소녀 한 명이 뒤따라 들어 왔다.

“앞으로 아가씨를 지키게 될 기사들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로체스터 영애와 함께 아가씨의 시중을 들 하녀입니다.”

나를 지켜 줄 기사들.

“앞으로 아가씨를 호위하게 될 팔콘 기사단의 디오스 클라우디스라고 합니다.”

“같은 소속 아키오스 클라우디스라고 합니다.”

“꼭 데리고 다녀야 되나요?

아틀란에서도 호위를 달고 다니지 않았는데.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불편하고 싫다. 제이드가 내 호위이기는 했지만 내가 몰래 아틀란 빠져나왔을 때만 찾으러 왔지, 그 외에는 자유로웠다고.

“라피스라고 합니다. 아가씨.”

“미카엘 님, 대공저에서도 대공성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입니다.”

보지 못한 게 당연하지. 라피스는 셰도우 일원으로 어젯밤에 왔으니까.

“클라우디스 경들과는 다릅니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아가씨 곁에 둘 수는 없습니다.”

“로체스터 영애, 라피스의 신원은 제가 보장하지요.”

“하지만.”

“라피스를 하녀로 들인 것 또한 전하의 명입니다.”

클로에는 카시스의 명이라는 말에 입을 닫았다. 그의 명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가씨. 전하께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전하셨습니다.”

“알았어요. 준비하고 나갈게요.”

“그럼 기사들은 방 바깥에 세워 두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집 안에서도 호위할 필요가 있나요?”

방 밖으로 나가려던 미카엘이 그녀의 말에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가씨는 특별하니까 전하께서도 이 정도로 호위를 붙이시는 겁니다. 그리고 저택 안이라고 안전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특히 지금 아가씨는 적과 한 저택에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저 말만 들으면 딱 오해하기 좋지만, 저 특별하다는 말은 내가 마린족이라서 하는 말이겠지.

그런데 적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지?

“적이라고요?”

“어제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아가씨 뺨을 때린 여자와 말입니다.”

“아-, 그 카시스의 약혼녀.”

“전하 앞에서 그 약혼녀라는 말은 자중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파르미온의 공주님을 약혼녀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랬었지. 좋아하면 굳이 제게 가짜 연인 역할을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알았어요. 금방 준비하고 내려간다고 전해 주세요.”

아일라를 단장해 줄 클로에와 라피스만이 방 안에 남고 전부 나갔다.

“라피스라고 했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예, 아가씨. 그리고 말씀 낮춰 주십시오.”

“음, 알았어요. 라피스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처음 만난 사람이라 역시 말을 낮추는 게 쉽지 않네.

“이제 열아홉입니다.”

나보다 어리구나.

“라피스. 클로에와 함께 내 단장을 도와주겠어요? 아니, 도와주겠어?”

카시스가 보낸 사람이라면 괜찮겠지. 그런데 이곳에 오고 나서 다니엘과 훈련을 못 했는데. 식사하면서 다니엘과 다시 훈련할 수 있게 말해 봐야겠어.

클로에와 라피스가 해 준 단장을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들어서니 카시스가 먼저 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아일라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 줬다.

“고마워요. 카시스는 정말 친절해요.”

응? 뭐지?

제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이 얼어붙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당에 하인들과 하녀들이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제가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식사하시죠.”

“해물 요리네요?”

식탁에는 전부 해물 요리만 올려진 것을 본 아일라는 눈이 조금 커지더니 깜빡였다.

“먹고 싶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 지나친 생각이었습니까?”

“어째서요?”

“어제 일도 있었고 고향이 그리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해산물로 요리하라 미리 지시해 뒀습니다.”

아, 걱정해 주고 신경 쓰고 있었구나.

바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일라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면 알아들었을 거다.

“고마워요, 카시스.”

“그대가 살던 곳에서 먹던 음식하고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처음 맛본 음식들이 많으니 좀 다르더라도 괜찮아요. 잘 먹을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일라는 제일 먼저 제 앞에 놓인 해산물이 들어간 파스타를 입으로 가져갔다.

살짝 매콤하고 맛있네. 아틀란에서는 이런 걸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있지도 않은 음식이야.

아틀란에서 제일 많이 먹는 음식이라고는 오히려 저 구운 생선이나 문어와 오징어려나.

저 문어 요리도 아틀란에서 먹던 것하고는 조금 다른데. 근데 저건 뭐지.

“이건 뭐예요? 이것도 생선인가요?”

“방금 그대가 먹은 건 상어 알입니다.”

“네? 뭐요? 제가 지금 먹은 게 뭐라고요?”

상어 알? 인간들은 상어 알도 먹나? 그런데 맛있네.

“고마워요. 저를 위해서 부러 준비한거죠?”

“입에 맞는다니 다행입니다.”

카시스가 그린 듯한 예쁜 미소를 짓자 잠시 멍하니 있던 아일라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저기, 카시스. 저 할 말이 있는데요?”

“해 보십시오.”

“이곳에 와서 수련을 한 번도 안 해서요. 수련을 다시 하고 싶어요.”

“다니엘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이것도 드셔 보십시오.”

카시스가 다른 요리를 아일라의 앞으로 밀어 줬을 때였다. 식당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불청객이 들어왔다.

문 부서지겠다.

“전하, 약혼녀인 저하고는 식사 한 번 안 하시면서 어째서 저 여인하고는 식사를 하시는 건가요?”

“하, 공주. 예의는 지키시죠. 그리고, 제가 누구와 식사를 하든지 공주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저는 전하의 약혼녀예요.”

“그 약혼녀 대접이라도 받고 싶으시면 예의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공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예의가 없을 줄이야.”

“저도 여기서 식사하겠어요.”

크레타의 말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주와는 따로 식사 자리를 갖도록 하죠. 그러니 제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괜찮아요. 같이 식사해요.”

“하나.”

아일라의 말에 카시스가 그녀를 보며 뭐라 말하려고 했다.

“저는 같이 해도 상관없어요.”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크레타가 식탁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고 카시스는 시종에게 크레타가 식사를 할 수 있게 준비시켰다.

“앞으로 저하고도 시간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전하.”

“바쁩니다.”

“이 여자와 함께할 시간은 있고 저와 함께할 시간은 없다는 건가요? 아바마마께 항의하라 하겠어요.”

“그러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가끔 식사를 함께 해 줄 생각은 있지만 계속 함께할 생각은 없다.

제국의 황제와 대공에게 항의서를 넣으라고 하겠다는 말에도 카시스는 별 반응이 없었다.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이었다.

“저희 왕국의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공주.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그대가 항의한다고 해서 제국이 꿈쩍이라도 할 것 같은가?”

“저희 왕국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속국이 아닐 텐데요.”

“해서 제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카시스는 조금 전부터 존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나를 대할 때하고는 전혀 달라.

파르미온이 속국도 아니고 약하지도 않지만 플루투스 제국을 상대할 정도의 나라는 아니다. 누가 감히 최고의 마법사인 황제 폐하와 마검사가 있는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겠는가. 뭐, 에류시온 공국의 대공이라면 조금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폐하와 제가 아니어도 파르미온 왕국은 플루투스 제국을 무너트릴 수 없다. 그 정도의 왕국에 당할 정도로 제국의 군력이 그리 약하지도 않다.

“공주, 충고 하나 하지. 쓸데없는 일은 벌이지 않는 것이 좋아. 공주가 얌전히만 있어 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무슨 말이죠?”

“이해하지 못할 말은 아닐 텐데. 괜히 쓸데없는 일을 벌여서 공주의 모국을 위태롭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야. 내 말이 그리 어려운가.”

고요하고도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기요, 식사할 때는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체하겠어요.”

정말이지 식사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괜히 저 여자하고 같이 식사 자리를 가져도 된다고 했나 봐.

“그리고 그쪽도 식사하러 왔으면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가면 될 것을 왜 분란을 만드는 거죠.”

“넌 끼어들지 말고 문어나 처먹어.”

지금 나한테 처먹으라고 한거야? 난 이런 험한 말 들어 본 적 없어.

“입이 험하네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그런 험한 말을 했던가요? 그리고 이건 문어가 아니라 낙지예요.”

“뭐라고? 그게 그거지.”

어떻게 그게 그거야. 엄연히 종이 다른데.

“모르는 사람도 있겠네요. 미처 생각 못했어요. 하지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세요.”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하며 아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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