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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1화 (41/100)
  • 41화

    “헛소린지 아닌지, 카시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네요. 누가 먼저 만났는지.”

    고개를 돌린 아일라는 카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계속 나를 보고 있던 거야? 그게 아니고서는 이렇게 바로 눈이 마주칠 리가 없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서 말해요. 내게 연인 역할을 해 달라고 했잖아요. 나를 먼저 만났다고 말하란 말이에요.’

    카시스에게 열렬히 눈빛으로 말했다.

    “공주. 아일라가 내 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주보다 먼저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럴 리 없어요.”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겁니까?”

    거짓이 맞기는 하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다. 파르미온의 공주와의 파혼을 위한 거짓말이니. 이건 필요에 의한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약혼녀에요. 본처가 될 수 있는 건 저고요.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후처의 자리도 드릴 수 없어요.”

    “하?”

    카시스의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고 아일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크레타를 바라봤다.

    이 여자가 지금 뭐라고 한거야?

    뭐가 어쩌고 저째?

    본처? 후처? 허락?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아니, 내가 왜 후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거지만 내가 왜 허락을 받아야 하냐고!

    “이봐요, 카시스는 당신하고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카시스와 혼인하는데 왜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 되나요?”

    아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카시스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카시스는 당신하고 원해서 약혼한 사이가 아니에요.”

    물론 내가 이런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나도 남 말 못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카시스에게 원하지도 않는 각인이 생기게 만들었으니.

    “뭐라고? 너 말 다했어?”

    “그런데 아까부터 예의가 없네요. 공주라면서요.”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계속 반말이네.

    “공주면 공주답게 굴어요.”

    나도 공주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예의는 지킨다고. 내가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제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경어까지 쓰지 않을 테니까.

    “다시 확실히 말할게요. 카시스를 빼앗긴 건 당신이 아니라 저예요. 그걸 기억해 주세요.”

    거짓말하려고 하니까 찔리네. 계약으로 연인 역할을 하는 거지만.

    “공주, 다시 한번 더 내 연인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나도 공주를 대우해 주지는 않을 것이오.”

    “전하!”

    “이곳에 귀먹은 사람은 없소. 소리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감히 누구에게 소리치는 것이오.”

    “그만하시죠. 아무리 왕국의 공주님이라 할지라도 전하께 큰소리를 칠 수는 없습니다.”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아일라가 고개를 길게 뺐다.

    어, 저 사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착각은 왜 드는 걸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요. 이제키엘 윈터우드라고 합니다.”

    가까이 다가온 이제키엘은 안경을 슬쩍 올리며 아일라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아, 생각났다. 내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동 마법진이라는 것으로 이동 후에 속을 전부 게워 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처음 도착한 날 얼핏 본 것 같아. 그런데 그 이후의 기억이 없어서 지금껏 잊고 있었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일라 아틀란이라고 해요.”

    “칼리스토 대공가의 재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제키엘은 마법사입니다. 그대가 먹은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는 마법 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는 그때서야 작게 탄식하면서 이제키엘을 바라봤다.

    “잠시 실례합니다.”

    이제키엘의 손이 맞은 아일라의 뺨에 가까이 닿았다. 그 순간 손에 빛이 나 뺨으로 스며들었다.

    어? 따뜻하고 통증이 사라졌어.

    “공주님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와 아가씨께서도 쉬셔야 합니다.”

    “아일라, 그만 방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그럴게요. 저도 쉬고 싶어요. 아, 그리고 당신도 공주라면 공주답게 예의라는 것을 지켜보는 게 어떨까요.”

    아일라는 크레타에게 옆을 지나치며 한마디를 흘렸다. 그러자 크레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부르르 떨었다. 카시스 또한 그런 크레타의 옆을 차가운 시선으로 슬쩍 보고는 지나쳤다.

    “이봐, 거기 둘. 파르미온 공주님을 모시고 가라.”

    그 모습을 지켜본 이제키엘은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멀찍이 떨어진 두 기사를 불러 지시하고는 카시스의 뒤를 따랐다.

    방으로 돌아온 아일라는 침대에 털썩 소리를 내면서 누웠다.

    “아가씨, 피곤하시더라도 씻고 주무세요.”

    “조금만 더 있다가.”

    설마, 거기서 제이드와 멜로디를 마주칠 줄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잘 계실까?

    보고 싶어. 하지만 역시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반드시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반려를 찾아낼 거야. 아버지가 인정할 사람을 찾아내야 해. 그 전까지는 돌아갈 수 없어. 그리고 각인도 해결해야 하고.

    아일라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집무실로 들어온 카시스의 뒤를 이제키엘과 윌리엄이 따라 들어왔다.

    “전하, 호위는 왜 데리고 나가지 않은 겁니까.”

    “내게 호위가 필요하진 않지. 그녀를 내 손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이고.”

    “아무리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데리고 다니십시오.”

    윌리엄의 표정이 굳으며 말했다.

    “윌리엄 경, 내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은 것인가.”

    “전하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예전 같은 위험은 없어. 그러니 괜한 걱정하지 마라. 그녀의 호위는 수도에 저택에서처럼 클라우디스 형제에게 맡겨라. 숨어서 말고 곁에서 호위하라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셰도우에서 라피스라는 아이가 올 거다. 그 아이는 하녀로 위장해 그녀의 곁을 지킬 거다.”

    “셰도우는 암살 집단 아닙니까?”

    “비밀리에 숨어서 호위하기에 좋지. 아일라는 이종족으로서, 그리고 내 연인으로서 보호 받아야 할 입장이고. 그리고 이제키엘 경. 그대는 그녀에게 마법을 걸어 둬. 마법약을 시간 때마다 마시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마법약으로 아일라의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는 것은 제한 시간이 있어서 효과가 떨어지기 전 다시 약을 복용해야 했다. 혹시라도 깜빡하면 물빛 머리와 눈동자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겠습니다. 그럼 클라우디스 형제들을 아가씨 호위로 보내겠습니다.”

    “전하의 명대로 아가씨께 마법을 걸어 놓겠습니다.”

    이제키엘이 밖으로 나갔지만 윌리엄은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나?”

    “아닙니다, 전하.”

    “그럼 나가 봐.”

    윌리엄이 가만히 카시스를 바라보다 나가려는데 그를 애칭으로 부르는 소리에 손잡이를 잡은 손이 멈칫했다.

    “참, 윌.”

    “전하야말로 더 지시할 일이 있으십니까?”

    “······아나스타샤 벨로체가 돌아왔어.”

    “······.”

    “왜 아무 말도 안 해. 벨로체가 돌아왔다니까.”

    “······들었어.”

    그래, 들었겠지.

    “폐하께서 만날 거냐고도 물어보시던데.”

    “미친 건가?”

    “쿡. 너도 미카엘과 반응이 똑같구나.”

    미쳤다니. 제국의 황제께 할 말은 아니군.

    “거절했어.”

    “만나고는 싶었냐.”

    “아니, 우리 인연은 이미 끝났어. 너도 알잖아. 벨로체 공작을 죽인 건 나야. 그녀를 반역죄로 잡은 것도 나였고.”

    “네게 칼을 겨눴지. 네가 반역죄로 잡은 건 맞지만 벨로체를 살린 것도 너였어.”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아버지고 집안을 지키고 싶었을 테니까.”

    “그래서 가문과 그녀는 살아남았지. 비록 공작에서 자작가로 강등됐지만.”

    벨로체 공작이 참수되고 벨로체 공작가는 자작으로 강등됐지만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후 최전방으로 스스로 가서 공적을 세워 인정을 받았다. 아직까지 적대하는 귀족들이 많지만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정말 대단해. 예전같지는 않지만 권력을 다시 손에 넣었잖아. 역시 벨로체야.”

    “윌, 비꼬는 건가.”

    “그럴 리가.”

    “여전히 싫어하는군.”

    “좋아할 리가 없잖아. 무슨 이유에서든 벨로체 공작은 폐황후와 합심해 너를 죽이려 했고 그 딸은 집안을 지키겠다고 네게 검을 겨누었으니.”

    “그때 일은 잊었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그때 일은 말하지 마.”

    그래, 깨끗이 잊고 있었다. 폐하께서 아나스타샤 벨로체가 돌아왔고 만나 보겠느냐는 서신을 보내기 전까지는.

    내가 정말 그녀를 좋아했던 것인지 지금은 모르겠다. 정말 좋아했다면 이렇게 깨끗하게 잊고 있을 수 있었던 건가.

    “너는 클로에를 언제까지 저대로 내버려 둘 거야.”

    갑자기 제게로 날아온 화살에 윌리엄의 미간이 좁혀졌다.

    “클로에 집안도 연관되어 있으니 클로에가 네게 다가가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넌 왜 그러냐?”

    “······.”

    “왜 대답이 없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전하.”

    제 일을 말하니 친구로서 말하는 건 그만뒀군.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로 돌아가서 대화라는 것을 해 봤어.

    “디오스 경과 아키오스 경을 아가씨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윌리엄이 나가고 카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몰래 도망시키려는 것을 막고 기껏 살려 주면 뭐하나.

    “한심한 녀석.”

    아니, 한심한 건 나도 마찬가지려나.

    * * *

    “감히-. 감히 나를 때려?!”

    와장창-!

    “공주 전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제까짓 것이 감히 나와 같은 공주라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같잖은 공주 따위도 꼴에 공주라고. 아바마마께 서신을 보내야겠어. 그 계집애 나라를 반드시 찾아내서 없애 버리고 말거야. 아틀란이라는 나라는 들어 본 적 없으니 무지 작고 속국일 게 틀림 없어.

    아틀란이라고 했겠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나라이니. 전쟁을 해도 우리를 이길 수 있어. 감히 건방지게 내게 덤빈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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