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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9화 (39/100)
  • 39화

    “안 벗을래요.”

    “구두를 벗으셔도 상관은 없지만 벗기 싫으시면 벗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사 먼저 하죠. 여기는 스테이크가 맛이 좋습니다.”

    아일라는 자신들이 들어온 식당을 살펴보고는 카시스를 바라봤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방 안에서 식사할 거면 굳이 식당 전부를 빌릴 필요가 있었나요?”

    “다른 손님이 있으면 시끄럽기 마련입니다. 그중에 질이 좋지 않은 손님들도 있을 겁니다. 그럼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의 식사를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네? 왜요?”

    나랑 식사하는 것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대체 왜?

    드르륵 뭔가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종업원이 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와 식탁 위에 올려 주고는 나갔다. 카시스는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잘라 아일라의 앞에 놓인 접시와 바꿔 제 앞에 놓았다.

    “카시스.”

    “예.”

    “·······.”

    “카시스.”

    “말하십시오.”

    제 앞으로 가지고 온 스테이크를 썰면서 카시스가 대답했지만 이번에도 부른 이유가 들리지 않았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아일라는 제 연인이니까요.”

    “하지만 가짜잖아요. 계약이잖아요.”

    스테이크를 썰던 카시스의 손이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아일라를 바라봤다.

    “그렇잖아요. 이상하잖아요. 당신은 제게 친절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 저는 당신이 제게 친절하다고 느꼈어요. 제가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끝날 관계 아닌가요.”

    끝날 관계······.

    그렇지 서로 필요의 의한 계약 관계는 언제고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끝날지 계속 이어 갈지는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관계를 계속 이어 갈지도 모른다고 말한 건가?

    “저는 제 연인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제 연인으로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저기, 카시스 화났어요?”

    “안 났습니다.”

    카시스는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제 앞에 썰다 만 스테이크를 다시 썰기 시작했다.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일라의 눈에는 어쩐지 그의 기분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가고 나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아일라는 카시스의 눈치를 보며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건가 생각해야 했다.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잠시 걷겠습니까.”

    “네? 아, 네.”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들려온 목소리에 되물었던 아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조용히 걷는 그의 뒤를 따라가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다른 지역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 이렇게 찾아다녔는데도 없는 거 보면.”

    어? 이 목소리는······, 제이드와 멜로디?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둘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악시온 가문에서 나를 찾으라고 보낸 거라면 몰라도 제이드와 멜로디가 이곳에 있을 리가.

    있구나. 아버지야. 아버지가 제이드에게 나를 잡아오라고 한 거라면 제이드가 왔을 확률이 높아.

    돌아보지 마. 돌아보면 안 돼. 들킬 거야. 들키고 말 거야.

    아일라는 등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저 여자 뒷모습, 아일라를 닮지 않았어?”

    역시 제이드의 목소리다.

    “정말 닮기는 했는데. 머리색이 다르잖아. 저 여자는 머리색이 갈색이야.”

    “그래도 확인해서 나쁠 건 없지. 내 임무는 아일라를 데려가는 거야.”

    “그럼 왕비님께는 보고 안 할 거야.”

    “할 테니까. 그만 좀 해라, 멜로디. 가서 확인해 보자고.”

    다른 한 명도 역시 멜로디였어.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제발. 나는 지금 잡혀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도망쳐야 돼. 아니야, 도망치면 수상하게 여기고 쫓아올 거야.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다가는 들킬지도 몰라. 내가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꿨더라도 그 두 사람이면 알아볼지도 몰라. 어떻게 하지?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반가워, 오랜만이야.’ 라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망치듯 가출했는데 저를 잡으러 온 두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해 보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카시스는 걷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멈춰 서서 바짝 얼어붙어 있는 아일라의 뒤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카시스는 아일라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잠시 실례합니다.”

    안 돼. 틀렸어. 난 힘을 제어 못해서 제이드를 이길 수 없어. 제이드는 마린족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란 말이야.

    아일라는 이제 틀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일행에게 무슨 볼일이지.”

    제 등 뒤에서 들린 카시스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저는 그의 등에 온전히 가려져 있는 상태였다.

    카시스.

    “·······.”

    “무슨 볼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뒤에 여자분이 저희가 아는 사람과 닮은 것 같아서요.”

    대답을 하지 않는 제이드 대신 멜로디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잠시 확인해도 될까요.”

    “너희가 누군데 그러지. 갑자기 다가와서 이러는 것이 상당한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나?”

    “어쩌지 제이드.”

    멜로디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제이드를 바라봤다.

    “잠시 확인하겠다는 건데 안 되는 건가.”

    “당연한 걸 묻는군. 안 된다. 로브를 쓰고 있는 너희가 위험한 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데 내 연인에게 접근시킬 것이라 생각하나.”

    카시스와 제이드 주위의 기류가 날카롭게 변했다.

    안 돼. 이러다가는 양쪽 다 다칠지도 몰라. 차라리 내가.

    “죄송합니다. 저희가 수상해 보여도 누구를 찾느라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이 녀석이 말버릇이 없죠. 어릴 때는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크면서 많이 삐뚤어졌어요.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해요.”

    카시스와 제이드 사이로 끼어든 멜로디가 뒤로 제이드를 슬쩍 밀고는 웃으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멜로디!”

    “미쳤어?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제이드가 소리치자 멜로디가 뒤돌아 제이드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힘을 사용할 생각은 아니겠지. 제발 참아 줘라.”

    “제길.”

    퍽!

    멜로디가 팔꿈치로 제이드의 명치를 가격했고 제대로 맞은 제이드는 신음을 내뱉었다.

    “윽! 이게 뭐하는 거야? 멜로디.”

    “이 녀석이 입이 좀 거칠어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뒤에 숙녀분도 저희 때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가자, 제이드.”

    “확인도 안 하고.”

    “싸우러 온 거 아니라니까. 보고도 모르겠어? 저 남자 보통이 아니야.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멜로디는 가지 않으려는 제이드의 팔을 끌어당기며 카시스와 아일라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일라. 아일라, 괜찮습니까?”

    “제이드, 멜로디. 미안해.”

    카시스는 괜찮으냐고 물었는데도 답이 없자 걱정이 돼서 아일라의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아일라에게 입에서 나온 이름에 멈칫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사라진 뒤를 돌아봤다.

    그는 저 둘을 아느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들은 이름만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찾으러 온 마린족이라는 것을. 그리고 제가 수도에 있을 때 수상한 이인조가 바로 방금 그 둘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아직은 돌려보낼 수 없다. 파르미온의 공주와 아직 파혼도 하지 못했고 각인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아일라를 바다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아직은 절대로 돌려보낼 수 없어. 보내지 않아.

    * * *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이드, 멜로디.

    “····라. ····일라. 아일라.”

    나는 지금 돌아갈 수 없어.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아일라.”

    “아? 저 불렀어요?”

    “괜찮은 겁니까?”

    괜찮냐니 뭐가?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일라. 혹시, 방금 그자들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는 사이입니까? 그자들이 당신을 데리러 온 자들입니까? 그래서 이리 떠는 겁니까.

    “아일라, 아무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강제로 데려가려 한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겁니다. 계약 중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한 조건에는 그것도 들어 있으니. 그러니까…….”

    그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아일라의 입술로 손을 가져가 살살 떼어 냈다.

    “그리 세게 물면 피가 납니다.”

    아, 내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구나.

    “그만 돌아갑시다.”

    “아니, 저는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보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만 돌아가서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오페라는······.”

    “하아-, 지금 오페라가 문젭니까? 지금 그대 안색이 어떤지 압니까?”

    “그렇게 안 좋아 보여요?”

    “예,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갑시다. 다음에 또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지. 이대로 돌아다니다가 혹시라도 또 제이드와 멜로디와 마주칠지도 몰라. 그리고 조금 피곤하네.

    카시스는 아일라를 데리고 마차에 올라타 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간 제이드와 멜로디는 자신들이 머무는 여관의 방으로 돌아왔다.

    “제이드, 싸우자는 식으로 그렇게 날을 세우면 어떻게 해? 그 남자 보통이 아니었다고.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잖아.”

    “내가 뭘 어쨌는데 그래. 그럼 내가 인간들에게 친절하게 말해야 되는 거냐?”

    “적어도 여기서는 그래야지. 여기는 바다도 아틀란도 아니야. 하-, 네가 인간들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는 건 알겠는데 제발 자중 좀 해.”

    “내가 왜?”

    “이제 여기서 찾는 건 그만두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보자. 이곳에서 지내면서 몇날 며칠씩 주변을 찾아도 못 찾는 걸 보면 여기에는 없어.”

    이곳에서 지내면서 찾아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혹시라도 저희가 다녀간 후에도 오지 않을까 싶어서 갔던 곳도 몇 번이나 다시 찾아가면서 항구 마을과 이곳, 그리고 근처 숲까지 전부 뒤지고 다녔건만 아일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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