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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8화 (38/100)
  • 38화

    “밖에요?”

    “저녁 식사를 하고 함께 오페라도 봅시다.”

    오페라? 그건 또 뭘까? 궁금해.

    “좋아요. 그런데 이제 저 나가도 되는 거예요? 저를 찾는 자들이 있다고 했잖아요.”

    아일라는 황궁에서 연회가 열리기 전에 카시스가 수상한 자들이 저를 찾고 있다고 한 말이 떠올라서 물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켜 드린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반려를 찾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욱씬!

    왜 갑자기 가슴이 욱씬거리지.

    카시스는 제 입으로 말한 사실에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준비하고 나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카시스가 방을 나가자 아일라는 ‘하아-’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웃고 있는데도 무서울 수가 있는 거구나. 그 사람이 웃고 있는데 오늘처럼 무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야.

    기다린다고 했지. 빨리 준비하고 나가자. 이곳에 와서 하는 첫 외출이라 기대돼.

    오페라라. 어떤 것일까? 아틀란에서 열리던 연주회랑 같은 거려나.

    아일라가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클로에와 하녀 둘이 들어왔다.

    “아가씨 나가시려면 단장을 하셔야죠.”

    “응, 빠르게 부탁해. 옷은 너무 답답하지 않은 걸로.”

    “알겠습니다. 아가씨.”

    기대돼. 그리고 설레고 두근거려. 이런 기분 처음이야.

    “아가씨. 몸이 안 좋으신 것은 아니지요?”

    “아니야.”

    “얼굴이 붉어지신 것 같아서요.”

    클로에의 앞에 있는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니 정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정말이네. 왜 이렇게 붉어져 있지.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건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아.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야.

    그러고 보니 이 옷색, 그 사람 눈동자색과 똑같은 것 같아. 옅은 하늘색과 은색이 섞인 햇살에 비친 호수색.

    “대공 전하와 데이트 가셔서 그러신가.”

    “그런 거 아니야.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설레서 그럴 거야.”

    이곳에 온 후로는 밖에 단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와 약속했으니까.

    그의 영지는 어떤 곳인지 본다는 게 설렌 것뿐이야. 그뿐이라고. 그 사람이 원하지도 않은 각인을 만들어 버린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연인 역할도 각인 때문에 내게 해 달라고 한 것일 테니까.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에게 계약으로 가짜 연인 행세는 얼마든지 해 달라고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정말 이 옷으로 괜찮겠어요?”

    “난 괜찮은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

    “추우실 것 같아서요.”

    “아니, 아직은 춥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괜찮아.”

    아일라는 몸을 돌리며 제가 입은 어깨도 소매도 없고 등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한 번 봤다.

    바다에서도 지냈는데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지.

    “추운 것도 걱정이지만 역시 바꿔 입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괜찮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응? 뭐가 괜찮지 않은데?”

    아일라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이대로 입고 나가실 건가요?”

    “응, 나는 이게 좋아.”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이상 저도 옷을 바꿔 입으시라 말하지 않을게요. 머리 손질도 되었으니 그만 나가 보셔도 돼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면서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아일라는 클로에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지만 카시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옷은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졌는데 이 구두는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조금 걸은 것뿐인데 발이 아파. 벌써부터 벗고 싶어진다고.

    “아.”

    계단을 내려오다 현관이 있는 홀에서 기다리는 카시스를 보고 아일라는 잠시 멈춰서 그를 넋 놓고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왜인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어쩐지 오늘따라 더 빛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평소에도 잘생겼다고 느꼈지만 오늘은 더 잘생겨 보였다. 옷은 평소랑 별로 달라 보이지 않은데. 아니, 약간 달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달라.

    뭐지? 대체 뭐가 달라 보이는 걸까.

    ‘평소랑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것은 어째서지?’

    아일라가 카시스를 넋 놓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갔다.

    “아!”

    아일라는 정신을 놓고 내려가다 이내 발을 헛디뎌 앞으로 몸이 쏠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통증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한숨 소리와 함께 따뜻한 품이 느껴졌다.

    “위험하게 어디다 한눈을 팔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한테 한눈 팔았어요. 당신한테.

    “괜찮습니까?”

    “당신이 잡아 줬잖아요. 괜찮아요.”

    카시스는 아일라를 안아 들고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내려와 내려 줬다.

    “그런데 설마 그 차림으로 나갈 겁니까?”

    “제 차림이 뭐가 어때서요?”

    “몰라서 묻습니까?”

    “알면 왜 물어요.”

    클로에도 그렇고 왜 그러지 이 옷이 뭐 어때서?

    “감이 좋다고 하더니 순 엉터립니다.”

    “뭐라고요? 옷이랑 감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카시스가 어깨며 쇄골이며 등까지 전부 드러난 그녀가 입은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옷 편해서 좋은데 왜 그래요.”

    “편하고 좋다니 됐습니다.”

    카시스는 지금 아일라가 입은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편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레스를 갈아입으면 저녁 식사를 하고 보러 갈 오페라 시간에 늦고 만다.

    “갑시다.”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며 밖에 대기시켜 둔 마차에 올라탔다.

    아일라는 마차에 타자마자 구두를 벗었다.

    “정말이지 이 구두는 익숙해지지 않아요. 발이 너무 아프다고요. 사람들은 왜 이런 걸 신는 거예요.”

    “그래도 옷에 대한 불평은 사라진 것 같군요.”

    “조금은 익숙해졌으니까요.”

    “구두도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건 전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데요.”

    “드레스도 전혀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일라는 그의 말에 작게 투덜거리고 카시스는 작게 웃이며 말했다.

    “구두 벗는 것은 제 앞에서만 하십시오. 저는 언제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특히 권력이 있는 귀족들은 더욱더 말입니다.”

    그는 아일라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알고 처음 만났을 때 맨발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발이 많이 아픕니까?”

    “발이 아픈 건 나아지지 않네요.”

    “구두를 그대에게 맞춰 편하게 맞춘다고 한 것인데 아직도 불편해하니 조금 더 편하게 다시 맞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신이 사 준 구두가 그렇게나 많은데 또 산다고요?”

    “발이 아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아 볼게요.”

    아무리 그래도 구두가 많은데 뭘 또 산다고 그래.

    “아픈데 억지로 참지는 마십시오.”

    “괜찮아요. 구두 더 사지 마세요. 그것보다 이곳이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했던가요.”

    “칼리스타는 나라가 아니라 제 영지입니다. 여기도 플루투스 제국의 땅입니다.”

    “나 당신 영지 제대로 구경하고 싶어요.”

    “오늘은 저와 식사를 하고 오페라를 보고 다음에 제대로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도착했나 보군요.”

    마차 천천히 멈추는 것 같자 창문을 힐끗 본 카시스는 허리를 숙여 벗고 있던 구두를 직접 다시 신겨 줬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제가 신을 수 있어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일라가 제가 신는다면서 잡힌 발을 빼냈다. 하지만 카시스는 제 손에서 벗어난 아일라의 발목을 다시 잡아 구두를 신겨 줬다. 두 사람이 구두를 신는 걸로 신랑이를 벌이는 사이 마차는 완전히 멈춰 섰다.

    “내리십시오.”

    아일라의 구두를 신겨 준 카시스가 마차에서 먼저 내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일라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내가 신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근데 나는 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지. 그냥 내가 벗어 둔 구두를 신겨 준 것뿐인데.

    “아일라, 안 내릴 겁니까.”

    “내, 내려요.”

    그의 부름에 깜짝 놀란 아일라가 고개를 들어 문쪽을 바라보자 카시스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는 급하게 내리려던 아일라의 발이 꼬여 버려 넘어지려고 했다.

    “정말 조심성이 없으십시다. 조심 좀 하십시오.”

    이번에도 카시스가 붙잡아 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일라는 그의 타박을 들었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제가 뭘 어쨌다고 저 때문입니까.”

    “당신이 자꾸······. 아니에요 아무것도.”

    “왜 말을 하다 마는 겁니까.”

    이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 사람을 의식하게 되지. 여태껏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달라 보이더니 별 의미 없이 구두를 신겨 준 걸 텐데 내가 너무 의식한 것뿐이야.

    “이제 좀 놓아줘요.”

    넘어질 뻔하면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로 계속 있자 심장이 뛰는 것이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을 슬쩍 밀어 내자 순순히 밀려나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어디서 식사를 할 건가요?”

    “바로 여깁니다. 당신과 조용히 식사를 하고 싶어서 오늘은 통째로 빌렸습니다.”

    뭐, 뭐를 어떻게 했다고?

    “그럼 오늘 여기 손님이 당신과 저밖에 없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꽤 큰데. 이렇게 큰 식당을 우리만 사용한다고? 그럴 필요가 있는 건가.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을 잡고 이끌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여기를 우리만 이용해도 되는 건가요?”

    “괜찮으니 염려 말고 드시고 싶은 대로 드십시오. 발이 아프면 아까 마차에서처럼 구두를 벗어도 됩니다. 말했다시피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구두를 벗고 싶은 것은 맞지만 벗으면 신을 때 아까처럼 또 직접 신겨 주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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