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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7화 (37/100)
  • 37화

    “씻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다행이로군. 물속에서 잠든 모습을 못 본 것 같아서.

    정말이지 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만일 클로에나 다른 사용인이 먼저 들어왔더라면 들켰을지도 모르겠어.

    “수건.”

    “아, 예.”

    카시스가 짧게 한마디하자 클로에는 방으로 나가서 목욕 타월을 꺼내 침대 위에 깔았고 카시스는 아일라는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때 아일라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응?”

    아일라는 일어나 앉고는 막 깨어나 잘 보이지 않는 시야 때문에 눈을 깜빡였다.

    눈을 깜빡이면서 돌아온 시야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카시스였다. 하지만 잘못 봤다고 생각했는지 아일라는 눈을 비비고 고개를 저어 봤다. 하지만 그럴수록 카시스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더 또렷하게 비쳤다.

    “어? 어어?”

    “아가씨, 씻으시다 잠이 드시면 어떡해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꺄아아악-!!”

    클로에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일라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카시스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제 몸을 한 번 내려다보고 카시스를 한 번 보고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 썼다.

    “아가씨.”

    “왜,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예요!”

    아일라는 눈만 빼꼼히 이불 밖으로 내밀고는 물었다.

    “제 집에 제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왔다가. ……그것보다 클로에, 잠시 나가 있어라. 나는 아일라와 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네?”

    “나가지 마.”

    “나가 봐라.”

    “예, 알겠습니다.”

    나가지 말라니까!

    아일라는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카시스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나가라는 말이 나오자 클로에는 방을 나갔고, 아일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잠시 저와 이야기 좀 하시죠.”

    “무, 무슨 이야기요? 그, 그리고 여자 방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요? 지금 제 옷차림은 이렇게 당신과 마주하고 있을 차림이 아니라고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차림과 비슷했습니다. 잊었습니까.”

    “-!!?”

    그, 그랬었지? 나는 왜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 그때랑 지금이랑 다르다고요.”

    “기쁘군요. 조금이나마 인간들 사회에 익숙해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금 그 차림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조금이나마 인간 사회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물속에서 잠이 들면 어쩝니까?”

    아, 물이 따뜻한 것이 기분이 좋아서 잠이 들었었나 보네.

    아일라는 눈동자를 굴려 힐끔 카시스의 소매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를 욕조에서 건져 나온 건가.

    “제발 부탁이니 조심 좀 하십시오. 제가 당신의 정체가 뭔지 들키지 말라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알아요. 계속 말해 왔잖아요. 마린족의 존재를 아는 누군가가 내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용하려고 할 수 있다고요.”

    “제가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지켜 주고 싶어도 정작 지켜야 할 대상이 협조를 해 주지 않으면 지키는 것이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물이 따뜻한 게 기분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어요. 미안해요.”

    “하아, 몸은 이제 괜찮습니까?”

    “몸이요?”

    아, 그랬었지. 나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고 나서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 속까지 뒤집히고.

    “어지럽거나 머리 아픈 것은 어떻습니까?”

    “음-, 괜찮아요.”

    “속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푹 자고 일어났더니 전부 괜찮아졌어요.”

    꼬르르륵-!!

    하지만 아일라의 배꼽시계가 울리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쿡!”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바로 카시스의 웃음소리였다.

    우, 웃었어. 창피해. 왜 하필 지금 또 배에서 배고프다는 신호가 오는 거냐고.

    안 그래도 민망해서 얼굴을 볼 수가 없는데. 이러니까 더 보기 힘들잖아.

    “배가 많이 고픈가 봅니다. 식사 준비를 하라고 했으니 함께 가서 식사를 하시죠.”

    “아, 아니요. 저는 방에서 혼자 먹을게요.”

    “여기서 혼자 먹겠다고요?”

    “호, 혼자 먹을래요.”

    아일라는 여전히 눈만 이불 밖으로 내민 채 말했다.

    “지, 지금은 혼자 먹고 싶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같이 식사하는 것은 내일 하도록 하죠.”

    어? 뭐지? 지금 표정이······. 잘못 봤나?

    카시스의 표정이 어둡고 안 좋아 보였지만 아주 찰나라, 아일라는 제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그, 그래요.”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식사하고 푹 쉬십시오.”

    아일라는 그런다고 대답했지만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민망함과 창피함에 계속 카시스를 피해 다녔다.

    멀리서 카시스가 오는 것 같으면 잽싸게 숨었고 다니엘과 훈련을 하다가도 카시스의 목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쳤다.

    “윌리엄 경, 다니엘 경. 지금 저게 뭐 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가씨께서 전하와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며칠째 한 사람은 도망다니고 한 사람은 뒤쫓는 것을 창가에 서서 본 이제키엘이 다니엘과 윌리엄에게 물었고 대답은 다니엘에게서 들려왔다.

    “대공 전하와 말입니까?”

    이제키엘이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게임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하께서도 마음만 먹으면 잡으실 수 있으실 텐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은근히 즐기시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신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화가 나신 것 같으니까요.”

    윌리엄이 팔짱을 낀 채 창가 옆 벽에 기대어 서서 말했다.

    “아무래도 다니엘 경이 아가씨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아가씨께서 계속 피하시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아가씨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저것도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군요.”

    이제키엘이 한쪽을 카리키며 말하자 윌리엄과 다니엘의 시선이 이제키엘이 가리킨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 크레타가 있었다.

    “위험해 보이기는 하군요. 저 공주님이 부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

    * * *

    “오늘도 무사히 잘 도망 다녔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십니까?”

    “당연히 좋-.”

    오늘 하루도 카시스를 열심히 피해 다니는 데 성공한 아일라가 방으로 들어오며 한숨 돌리려던 참이었다.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일라의 시야에 침대 옆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카시스의 모습이 보였다.

    왜? 왜 당신이 여기 있어?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제가 여기 있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이곳도 제 성입니다.”

    아니, 당신 성은 맞는데 여기는 당신이 내게 준 내 방이잖아.

    “이곳에서 제가 못 갈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 얼굴은 웃고 있는데 나는 왜 무섭지?

    “그 뒷걸음질은 뭡니까? 지금 저와 다시 숨바꼭질을 하자는 말은 아니시겠죠.”

    “어, 그게. 어쩐지 당신이 화가 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제 착각이겠죠?”

    “화, 났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아일라의 앞까지 다가온 카시스는 그녀의 뒤에 있는 문을 닫고 도주로를 봉쇄해 버렸다.

    역시 화나 보인게 착각이 아니었어. 그런데 너무 가깝잖아.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저를 왜 피해 도망치십니까.”

    “·······.”

    “대답 안 하실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서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워서요.”

    “잘 안 들립니다.”

    아, 진짜.

    “창피하고 부끄러워서요!!”

    아일라는 빽 소리를 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저를 피해 다닙니까.”

    “당신에게 못 볼 꼴을 보였잖아요.”

    “뭘 말입니까?”

    카시스는 정말 아일라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되물었다.

    이 사람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여기에 도착한 날이요. 그날 제가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 내고 씻다가 욕실에서 슈미즈 차림으로 잠들기도 하고.”

    “쿡. 저를 피해 다니는 이유가 겨우 그겁니까.”

    겨, 겨우 그거라니? 나는 정말 민망하고 창피했는데. 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 낸 적이 없단 말이야. 난 처음 겪는 일이었다고. 그리고 욕실에서 슈미즈 차림으로 잠이나 들고. 난 정말 얼굴을 못 들 정도로 민망했는데.

    “제가 분명 처음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그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슈미즈 차림이 부끄러우셨습니까? 그때도 말했듯이 당신과 제가 처음 만날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슈미즈나 다름 없는 차림이었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뭘 그리 부끄러워 하십니까.”

    “사람들은 그런 차림으로 밖을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으니까요. 그렇다고 인간들이 입는 옷이 편해졌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그렇게 피해 다니면 저도 상처받습니다.”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상처를 받는다고요? 당신이요?”

    “저를 뭐라고 생각한 겁니까.”

    “그냥 당신은 상처를 받지 않을 것 같았어요. 강하니까요.”

    “강하다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생각 이외로 많은가 봅니다. 저도 상처는 받습니다. 찔러도 피가 나지 않는 냉혈한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을 뿐이죠.”

    몰랐다. 이 사람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됐어.

    “앞으로 피해 다니지 마십시오. 그리고 계약대로 제 연인 역할을 착실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어요. 저도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그런거니까 이해해 줘요. 앞으로는 피하지 않을게요.”

    “좋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와 오늘 밤 밖에 나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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