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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6화 (36/100)
  • 36화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어지러워요. 머리도 아프고요.”

    “우선 서둘러 성으로 가서 쉬는 것이 좋겠군요. 쉬고 나서도 나아지지 않으면 말해 주십시오.”

    “전하.”

    아일라의 등을 두드려 주던 카시스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키엘. 마중을 나온 건가.”

    “돌아오신다는 연락 받고 바로 나왔습니다. 한데, 이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성으로 돌아가지.”

    “마차를 준비시켜 뒀습니다.”

    마차라는 말을 들은 아일라가 일어나는 카시스의 소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왜 그럽니까?”

    아일라는 대답하는 대신 양 볼을 도토리를 잔뜩 문 다람쥐처럼 부풀린 상태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돼. 이 상태로 마차를 탔다가는······.

    “우우욱-! 우에엑-!!”

    “하-, 키엘. 이분을 마법으로 좀 재워 줘야겠다. 하는 김에 속이 편하게 회복 마법도 걸어 주고.”

    “전하, 저는 치료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전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좋겠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이제키엘이 아일라에게 다가와 머리 위에 손을 얹자 그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아일라가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카시스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받아 안고는 이제키엘이 준비해 둔 마차에 올라탔다.

    “대체 누구이기에 전하께서 직접 안아 옮기시는 겁니까?”

    아일라를 앉히고 그 옆에 앉아 제 어깨에 기대게 하는 카시스의 행동에 이제키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 카시스와 아일라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제키엘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마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내 연인이다.”

    “예?”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누가 누구의 연인이라고?

    “내 연인이라고 했다.”

    “진심이십니까?”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카시스에게서 같은 대답이 들려오자 이제키엘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지더니 이내 표정이 굳으며 미간에 주름이 갔다.

    “내가 거짓을 말한 적이 있던가.”

    계약한 것은 저와 아일라 둘만의 비밀이었다.

    “정말입니까?”

    “뭐가 의심스러워 계속 묻는 거냐?”

    “어디서 만난 분입니까?”

    “내 생명의 은인. 그리고 다니엘과 같은 종족이다.”

    “예, 전하의 생명의 은인이시고 다니엘 경과 같은·····. 예?!”

    “왜 자꾸 되묻고 그러지? 경답지 않게.”

    전하께서 자꾸 되묻게 만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키엘을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런데, 마린족의 머리색과 눈동자색은 물빛이 아니었나?

    “혹시 마법 물약을 먹이신 겁니까?”

    “그래, 마린족의 표식을 숨길 방법이 없어서. 아, 잊고 있었군. 다니엘과 윌리엄 경은 파르미온의 공주와 함께 올 거다. 지금쯤 도착했겠군.”

    “제발 그런 건 빨리 좀 말하십시오!”

    다니엘 경과 윌리엄 경이 알아서 모시고 오겠지만, 이건 큰 문젠데. 한 명은 전하의 연인, 또 한 명은 약혼녀가 한곳에서 지내게 생겼군. 앞으로 조용할 날이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제키엘은 눈을 감고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다.

    “방은?”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준비해 뒀습니다. 그런데 파르미온의 공주는 더 늦게 데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됐다. 미카엘이 할 일까지 하느라 수고했다.”

    저도 처음에는 칼리스타로 파르미온의 공주를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황궁에서 약혼 연회를 하면서 그럴 수 없게 됐다.

    파르미온의 국왕이 환영족의 잔당을 숨겨 주고 있는지 아닌지는 레안에게 맡겼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만일 짐작이 사실이라면 폐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고 저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칼리스타 성에 도착한 카시스는 잠이 든 아일라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준비된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눕힌 후 아일라를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쉬지도 않으시고 바로 일을 하십니까?”

    “밀린 일이 있지 않나.”

    이제키엘이 저와 미카엘이 할 일을 대신 해 줬다고 할지라도 전부 하지는 못했을 터. 그러니 나머지는 제 몫이었다.

    “경이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할지라도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을 테니. 아니 그런가.”

    집무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던 카시스는 밖이 소란스럽자 멈춰서 창밖을 내다봤다.

    “저분이 파르미온 공주입니까? 꽤 시끄러운 분이군요.”

    왕족이라 성격이 나쁘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했다.

    “그래, 될 수 있으면 파르미온의 공주와 내 연인이 마주치지 않게 해라.”

    “알겠습니다. 하나, 공주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왕족이지 않습니까.”

    “내 연인도 왕족이다.”

    “예?”

    이제키엘은 카시스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다가 금방 알아채고는 또다시 되묻고 말았다.

    “자네, 오늘은 참 많이도 되묻는군.”

    “전하께서 계속 되묻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녀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다른 이들이 모르게 해야 할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다.”

    대공성에서도 다니엘이 마린족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이를 이용하려는 자들도 생기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런데 다니엘 외에 또 다른 마린족이 왔다. 그것도 마린족의 왕족이란다.

    밖을 내다보던 카시스가 다시 걸음을 옮기고 이제키엘이 그 뒤를 따라갔다.

    * * *

    “으음-.”

    부드러워. 푹신해서 기분 좋아.

    뒤척이던 아일라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아 기지개를 폈다.

    “하암-. 잘 잤다.”

    그런데 내가 언제 잠이 든 거지? 그리고 여기는 어디야?

    아일라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하늘은 이미 노을이 져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체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어? 그런데 불편했던 속이 괜찮아졌네. 머리 아프고 어지러운 것도 없어지고.

    꼬르르륵-

    “배고파.”

    아일라는 방에 저 혼자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배에서 소리가 났다는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똑똑똑.

    “드, 들어와.”

    “편하게 주무셨나요? 아가씨.”

    “클로에.”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들어오자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여기는 어디야?”

    “칼리스타에 있는 대공성이랍니다.”

    대공성?

    내가 여기를 언제 온 거지? 이동 마법진이라는 것을 이용한 후로 어지럽고 머리도 띵하고 멀미를 해서 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 내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여기에 어떻게 왔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전하께서 아가씨를 안아서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뭐?”

    클로에가 말한 전하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아일라도 잘 알고 있었다. 카시스, 그를 전하라고 부르는 것을 많이 들었으니까.

    그 사람이 나를 안아서 옮겼다고?

    꼬르르륵-

    이 놈의 배는 왜 이럴 때도 배고프다고 울리는 거야.

    “많이 시장하시죠.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 전에 나 씻고 싶어.”

    “예, 그럼 씻으실 물부터 받아 드리겠습니다.”

    클로에는 욕조에 물을 받으러 간 사이 아일라는 다리를 모아 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나를 안아서 옮겼다고? 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 냈는데, 옷에 묻지는 않았을까? 냄새났을 텐데. 창피해. 이제 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봐? 창피해서 어떻게 보냐고!

    “아가씨, 씻을 물을 받아 놨어요.”

    “아, 알았어. 나 혼자 씻고 싶으니까 도와줄 필요 없어.”

    아일라는 침대 위에서 내려와서 클로에를 지나쳐 욕실로 후다닥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김이 올라오는 욕조 속에 ‘하아-’ 한숨을 내쉬며 몸을 담궜다.

    “그래도 잠이 든 나를 옮겨 줬으니 감사 인사는 해야겠는데. 역시 얼굴을 못 보겠어.”

    못 볼 꼴을 보였는데 어떻게 봐.

    아일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욕조에 기대고 있던 몸이 스르륵 미끄러져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

    그냥 편지로 고맙다고 전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 편지를 쓰는 걸로 결정했어.

    그런데 잘 잤는데 왜 이렇게 졸립지. 매번 씻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물이 따뜻해서 그런가. 바다는 아무리 따뜻하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따뜻해지지는 않는데. 잠이 잘 올 것 같은 따뜻함이야. 한 잠 더 자고 싶어.

    아일라는 제가 씻고 있다는 것도, 물속에 몸을 완전히 담그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그 뒤에 일어날 소란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

    쾅쾅쾅!

    아일라가 씻으러 들어간 지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클로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보려 했지만, 아일라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을 두들기며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대답 좀 해 주세요.”

    “무슨 일이냐?”

    “저, 전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마침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아일라를 찾아온 카시스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혼자 씻으시겠다고 들어가셨는데 나오지는 않으세요.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요.”

    “하아, 아일라. 접니다, 카시스. 문 좀 열어 보십시오.”

    카시스는 문을 가볍게 두들기고는 아일라에게 말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고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로 인기척이 안 날 수가 있나?

    “아일라, 대답해 주십시오. 대답하지 않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습니다.”

    카시스가 문을 부순다고 말을 했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콰앙!!

    카시스가 뒤로 한발 물러나 바로 문을 세게 한 번 걷어차자 문이 부서졌다. 카시스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s

    없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야.

    카시스는 아일라가 없는 것에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물이 가득 찬 욕조를 보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하아-.”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을 했는데.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카시스는 물속에서 잠이 든 아일라를 보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물속에서 아일라를 건져내는데, 그때 클로에가 아일라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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