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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5화 (35/100)

35화

“저기······, 계약 내용이 저를 지켜 주겠다는 거잖아요. 그럼 만일 저를 바다로 데려가려고 쫓아온 추격자들이 저를 데려가지 못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리할 겁니다. 그대의 의지에 반해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면 제가 막아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처럼 친절하고 강한 사람을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그 비늘이 단단한 오로치를 두 동강을 낸 걸 보면 무지 강하다는 건데.

“또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입술을 짓씹으십니까.”

또 너무 깊이 생각에 잠겼나 보네.

“심각한 문제입니까?”

내게는 심각한 문제지만 이 사람에게는 전혀 심각하지 않겠지.

“아니요. 당신이 신경 쓸 만한 건 아니에요.”

그녀의 대답에 카시스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까?”

어? 뭐지? 목소리가 어쩐지······.

“화나셨나요?”

“아닙니다. 식사 마저 하십시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잠시만요. 어?”

뭐지?

카시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식당을 벗어났다. 그가 나간 식당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일라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저러지? 뭔가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뭔가 기분 상할 말을 한 건가? 식사를 하다 말고 가고.”

저가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싶어 되짚어 생각해 봐도 크게 실수한 것은 없었다.

“착각이겠지. 먹던 거 마저 먹자.”

그가 남긴 식사를 힐끗 한 번 본 그녀는 다시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 * *

쾅!

“하아-!”

자신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카시스는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앞에 서서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그 말이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모르겠군.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그 여자는 다니엘과 같은 종족이라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다. 그저 의무로 보호해 주는, 파혼 때 필요한 여인일 뿐인데.

이렇게 화가 나는 게 우습군. 파혼할 때까지만이다. 그때까지만 보호해 주고 함께 지낸 뒤 믿을 수 있는 자에게 맡겨서 내보내면 된다.

반려를 찾는다고 했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것까지 만들어 놓고.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자 옅은 은청색으로 빛나는 각인이 유리창에 비쳤다.

이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군. 이런 기분이 정말 각인의 영향이 아닌 것일까. 나는 아일라를 신경 쓰고, 아무리 힘을 다루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지만 그녀가 다니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이 이렇게 서운하고 화가 나는 것일까.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더군다나 이종족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니엘과 같은 동족이라 신경 쓰이고, 그래서 지키려는 것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두 번 다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 생명의 은인이라 더 신경 쓰일 뿐이다.”

그래, 그것뿐이다.

* * *

약혼녀는 저인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제국의 황족이고 대공이라지만, 저도 한 나라의 공주다. 그런 저를 어디에 있는지도 불분명한 속국의 계집 때문에 무시를 해?

‘제가 공주에게 마음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딴 계집 때문에······. 가만 안 두겠어.

누가 대공비 자리에 더 잘 어울리는지 보여 주겠어. 칼리스토 대공비 자리는 내 거야. 아무에게도 안 빼앗겨.

플루투스 제국도 우리 파르미온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약혼이라는 핑계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라고. 대공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어.

제국이 무슨 도움을 요청했는지 모르지만 최대한 천천히 들어주라고 서신을 넣어야겠다.

크레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타고 있는 앞의 마차에서는 카시스가 팔짱을 낀 채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기, 정말 괜찮을까요?”

“무엇이 말입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일라의 물음에 카시스가 눈을 떴다.

“그래도 명색이 약혼녀인데, 저렇게 혼자 뒤따라오게 해도 괜찮으냐는 말이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요?”

“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대공저에서 출발할 때 나를 그렇게 노려보던데.

조금 전에 있던 일이 생각이 났다. 아침에 카시스의 영지로 출발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크레타가 대공저를 찾아왔다. 그녀도 함께 간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시스는 그녀를 무시하고 떠날 준비를 한 채 아일라를 에스코트해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는 그대로 출발해 버렸다.

카시스는 분명 자신의 약혼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명색이 약혼녀인데 이래도 괜찮을까요? 저분도 공주라면서요.”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 마음을 바라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요.”

“그래도 계속 무시하면 안 될 것 아니에요.”

나한테는 친절한 것 같은데, 왜 이러지. 아무리 원하지 않는 약혼이라도 예의는 지킬 것 같은 사람인데.

“어차피 파혼할 것인데 친절은 쓸데없이 기대감만 심어 줄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대가 파르미온의 공주를 신경 쓸 일은 없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제 연인 역할만 착실히 해 주십시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들어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왜 저 공주라는 사람이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수도로 올 때와는 달리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돌아갈 겁니다.”

이동 마법진이 뭐지?

“이동마법진이 뭔지 궁금한 것 같군요.”

고개를 갸웃하며 표정에 전부 드러나는 아일라를 보며 카시스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동 마법진이 무엇인지 설명해 줬다.

“수도로 올라올 때 말을 타고왔던 것 기억합니까?”

“기억해요, 꽤 오래 걸렸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편하고 빠르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만, 처음 이용하는 사람은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카시스는 수도로 올 때하고는 다르게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먼 거리를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줬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건가요? 구경, 더 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오게 되면 그때 하십시오. 그때는 제가 제대로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언제 또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스타로 돌아가면 당분간 외출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답답하더라도 참아 주십시오. 그리고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그 힘은 사용하지 마시고, 외출 시에는 머리색과 눈동자색은 마법이나 마법 물약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알았어요, 알았어. 당신도 은근히 잔소리가 심한 거 알아요?”

잔소리? 누가? 내가?

카스시의 눈썹 끝이 까딱였다.

“걱정이 지나쳐요.”

“지금 제가 걱정이 지나치다고 했습니까?”

“아닌가요?”

“제 걱정은 당연한 겁니다. 당신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니 말입니다.”

“제가요? 힘을 제어 못하는 건 맞지만 잘하면 위험한 상황에서 제힘으로 도망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저는 감이 꽤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감이 좋다고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너무해요.”

망설이지도 않고 툭 내뱉는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는 또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카시스가 먼저 내려 아일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일라는 그 손을 잡고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지금 바로 이용할 수 있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원 칼리스타로 이동할 거다.”

하얀 로브를 입은,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남자는 카시스의 말에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는 이동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어지럽거나 멀미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처음 이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처음 이용해도 멀쩡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기준에서 말한 겁니다. 그대는 모든 것이 처음일 테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네요.”

그런다고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무방비한 상태보다는 낫겠지.

“그런데 당신 약혼자가 아주 뜨겁게 노려보는데요?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칼리스타에서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요.”

그리고 만나지 못하게 한다고 만나지 않을 수 있을까? 같은 곳에서 지내다 보면 마주칠 수도 있는 거잖아.

“저곳에 저와 함께 서면 됩니다.”

“저기요?”

로브를 쓴 사람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에는 바닥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것이 이동 마법진입니다.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떨어지지 말라고? 어지럽거나 멀미 말고 다른 증상이 또 있나?

“다니엘과 윌리엄 경은 기사들과 함께 파르미온 공주와 함께 뒤따라와라.”

카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멍하니 서 있는 아일라의 손을 잡고 마법진 안으로 이끌었다.

“잠시만요, 전하! 전하!”

크레타는 왜 자기가 아닌 그 여자를 데리고 먼저 가느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카시스와 아일라가 올라서자 마법진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얼마 뒤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게 어딨어? 어떻게 나를 두고 또 그 여자를!

크레타는 이미 완전히 사라진 두 사람이 서 있던 마법진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움켜잡고는 부르르 떨었다.

저 여자 정말 가만히 안 둘 거야. 두고 봐.

* * *

“우욱!! 욱!!”

“괜찮습니까?”

당신은 이게 괜찮아 보여요? 아무렇지 않아 보이냐고?

카시스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고 있던 아일라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가 헛구역질을 하며 가슴을 쳤다.

이건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소용이 없잖아.

카시스는 안쓰럽게 아일라를 바라보다 뒤로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지러워. 기분 나빠.

“참지 않아도 됩니다.”

뭘 참지 마? 여기서 게워 내면 꼴불견이라고 생각할 거잖아. 이래 봬도 공주로서의 체면이 있는데.

으- 정말 못 참겠어.

“우웨엑-!!”

이게 뭐야? 정말.

“처음이라 그런 겁니다. 괜찮아질 겁니다.”

그 말에 아일라가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소매로 입가를 닦고는 카시스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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