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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4화 (34/100)
  • 34화

    막 씻고 나와 끈이 느슨한 가디건을 걸친 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손이 탁자 위의 편지 봉투를 보고는 멈칫했다. 봉투를 들어 인장을 확인한 카시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연회장에서 봤으면 됐지, 뭣 때문에 서신을 보내신 거지.

    수건을 의자에 던져 걸쳐 놓고는 봉투를 찢어 서신을 확인한 카시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벨로체 자작이 돌아왔다. 칼리스타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만나 보겠느냐?’

    벨로체······. 아나스타샤가 돌아온 건가.

    편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카시스가 굳힌 표정 그대로 편지를 힘주어 잡았다.

    지금 만나서 무엇을 어쩌라는 겁니까? 이미 끝난 인연인 것을.

    “하아-.”

    형님께서 모르지도 않으실 터인데. 제게 이런 서신을 보낸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낮게 한숨을 내쉰 카시스는 마른세수를 하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전하, 저희는 처음부터 안 됐던 거예요.’

    창가에 기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카시스는 종이와 깃펜을 찾아 들었다. 킬리언에게 답장을 적은 그는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자신이 적은 답장을 내려다보더니 미카엘을 불렀다.

    답장을 바로 황궁으로 보내고는 방에 불을 끈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한참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방에 불이 꺼지고도 한참이 지날 동안, 대공저 앞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자작님,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밤이 깊었습니다.”

    나는 어쩌자고 이곳에 왔다는 말인가. 이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자작님.”

    “그래, 그만 돌아가지.”

    마부가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한번 더 고하자 마차 안에서 여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전하께서는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저를 잊으셨습니까? 이제는 전하를 뵈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돌아왔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전하를 뵈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실은 오늘 연회장에서 전하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에 내심 안심이 되었습니다.

    저를 다시 뵈었을 때 전하께서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그리고 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저희는 서로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대면할 수 있을까요.

    아나스타샤는 마음속으로 말하며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았다.

    * * *

    카시스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들어와라.”

    그의 목소리가 잠에서 막 깨어난 목소리처럼 잔뜩 잠겨 있었다.

    “전하! 혹시 밤새 그러고 계셨던 겁니까?”

    “아아-.”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신을 차린 카시스는 고개를 들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어제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 때문입니까?”

    “아나스타샤 벨로체가 돌아왔다고 하는군. 폐하께서 내게 만나 보겠느냐고 물으셨다.”

    “폐하께서 미치신 겁니까?”

    미카엘의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내뱉은 말이었다.

    “미카엘, 황제 폐하께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저도 직접 대놓고 미친 거냐고 말해 주고 싶기는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전하께 벨로체 공녀와 만나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는 자작이지. 그리고 만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만나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신 거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만나라고 하는 것과 만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그래서 만나실 겁니까?”

    “거절했다. 네가 어제 내가 보내라고 한 답신에 만나지 않겠다 답했으니 걱정 마라.”

    “그래 놓고 밤새 그리 잠도 못 주무신 겁니까.”

    “생각할 것이 있었다. 생각을 하다 보니 날이 밝았을 뿐이야. 돌아갈 때는 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거다. 마탑에 연락해 둬.”

    “이번에 파르미온 공주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겠지.”

    보여 주기식 약혼식은 끝났으니 데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것 아닌가?”

    “아-.”

    카시스의 물음의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칼리스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상한 이인조가 아가씨를 찾는 것 같습니다.”

    “마린족의 공주를 말인가?”

    “예, 인상착의로 봐서는 아가씨가 맞는 것 같습니다. 확인을 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출한 공주님을 찾으러 온 자들일까, 아니면 약혼할 집안 쪽에서 보낸 자들일까. 그도 아니면 마린족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일까. 어느 쪽이든 아직은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었다.

    “그들을 놓치지 말고 주시하라고만 전해.”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미카엘은 카시스의 명을 받은 대로 칼리스타에 연락하기 위해서 그의 방을 나갔다.

    “칼리스타로 돌아가면 당분간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해야겠군. 그녀를 찾는 자들이 누구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가둬 두는 거냐고? 답답하다고 할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지만 그녀를 찾는 게 누구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보호해 준다고 했으니 그들이 위험한 자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것이 먼저다.

    방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시스는 가운을 벗고 옷으로 갈아입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다니엘이 아일라의 훈련을 봐 주고 있는 장소였다.

    * * *

    촤아악-!

    “확실히 나아졌군요.”

    “그런가요? 그럼 이제 물을 조종하는 것을 다시 시작해도 되나요?”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 많은 양의 물을 변형하는 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수경을 만드실 수 있으십니까?”

    “수경이요?”

    “수경은 주로 마린족들이 연락을 주고받을 때 사용합니다. 설마 아직 수경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다니엘의 말에 아일라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으로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설마 수경을 아직 만들지 못하실 줄이야······. 수경을 만드는 것은 물을 변형시키는 것처럼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물을 변형할 수 있으면 당연히 수경도 만드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아틀란에서는 수경을 사용할 일이 없었단 말이에요. 수경을 만들지 못해도 된다고도 했고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제가 수경을 만들지 못하거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괜찮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아틀란에서는 수경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면 되니까.

    “아무래도 왕과 왕비께서 아가씨를 너무 감싸고 키우셨나 봅니다.”

    “으-.”

    아일라는 다니엘의 말에 정곡을 찔려서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지? 여태껏 단 한 번도 크게 혼난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 처음 맞은 것도 전에 딱 한 번뿐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물 위로 올라오지 않고 바깥세상에 관심을 갖지만 않으면 화내는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가 변하고 나를 때렸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만들면 되잖아요. 만들면!”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수경을 만드는 이론적인 방법은 알고 있었다.

    수경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연락을 위한 수단이지만, 직접 사용할 일이 없어서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집중해서 물을 변형하고 거울을 만드려던 때였다.

    “전하.”

    어?

    다니엘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집중했던 정신이 흩어지면서 물이 밑으로 쏟아져 내리며 치마를 적셨다.

    “훈련은 잘 되어 갑니까?”

    “음. 그럭저럭요. 물을 변형하는 것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하고 묻듯 다니엘을 힐끗 보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식사를 함께할까 해서 와 봤습니다. 할 말도 있고 말입니다. 그대도 알아 둬야 할 것 같군요.”

    내가 알아 둬야 할 것? 그게 뭐지?

    아일라의 고개가 의아하게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오늘 아침은 훈련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일라가 다니엘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아침 훈련이 끝나고 씻은 후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카시스가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아일라가 식당에 도착하자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 주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후 제자리로 돌아가 앉은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일이 있다면서 다음 말을 하지 않는 그를 그녀가 빤히 바라봤다.

    왜 그러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일라의 고개가 의아하게 옆으로 기울어졌다.

    “뭔데 그래요?”

    “······제 영지에서 그대를 찾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움찔!

    나를 찾는 자들이 있다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걸까? 아니면 악시온 가문 쪽일까. 어느 쪽이든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직 내 반려도 찾지 못했는데.

    “해서, 칼리스타에 돌아가도 당분간은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제가 그들을 처리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대를 지켜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가 보낸 걸까······. 하지만 난 아직 잡혀서 돌아갈 수 없어.

    “왜 그럽니까?”

    “-!!?”

    가까워.

    “꺄악!”

    아일라는 카시스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제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비명을 질렀다.

    “입술에서 피가 납니다.”

    “아······.”

    카시스는 엄지로 아일라의 입술을 살짝 눌러 문질러 줬다.

    친절하네. 역시 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아니야.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돼. 이 사람과는 단지 계약 관계일 뿐이야. 나는 어서 내가 만들어 버린 각인을 해결하고 따로 반려를 찾아야 해.

    이 사람이 파혼을 하기 전까지 반려를 찾아야 해. 아버지 마음에 들어 할 반려를 찾으면 용서해 주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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