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3화 (33/100)
  • 33화

    “세상에나······ 벨로체 공녀가 돌아오다니요.”

    저 여자가 누군데 그러지?

    방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와 함께 나간 여자가 연회장에서 들어오면서 귀족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전 약혼자의 약혼식에 맞춰 온 건가요?”

    “벨로체 공녀가 대공 전하의 전 약혼녀라는 것은 그냥 헛소문 아니었나요? 귀족파 수장의 딸과 황제파의 수장인 대공 전하께서 약혼을 한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잖아요.”

    뭐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런데 그 소문이 괜히 났던 것이 아니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그때 당시 벨로체 공녀와 대공 전하께서 만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고요.”

    “전 황후 폐하와 함께 흑마법…….”

    “입조심하세요.”

    “아무튼 그 일로 벨로체 공작은 참수를 당하고 자작가로 강등되었죠.”

    “말이 자작이지, 평민하고 다를 바 없는 처지였죠?”

    크레타가 수군거리는 귀부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전하의 전 약혼녀라니?”

    “앗, 공주 전하. 그냥 소문이었을 뿐입니다. 호호호.”

    “신경 쓰지 마셔요. 그저 뜬소문이었으니까요. 정확한 것은 아니었답니다.”

    “지금 감히 내게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을 말한 것인가!”

    귀부인들의 얼굴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귀부인들에게 소리친 크레타는 그대로 연회장을 벗어났다.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연인이라는 계집에 이제는 뭐? 전 약혼녀였을지도 모르는 여자? 대체 이게 뭐야?’

    오늘의 주인공은 저였다. 예비 대공비로 자리를 잡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게 뭐냔 말이야!

    * * *

    연회장을 빠져나온 킬리언과 이사벨,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휴게실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잘 지낸 것 같네요, 벨로체 공녀. 아니, 이제 자작이라고 불러야겠죠. 아직 자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네요.”

    “괜찮습니다. 편한 대로 불러 주십시오. 황후 폐하.”

    “그대는 잘 지내선 안 되는데 너무 잘 지낸 것 같아 화가 나는군. 돌아오지 말지 그랬나.”

    “폐하.”

    이사벨이 옆에 앉아 있는 킬리언을 슬쩍 건드리며 그를 불렀다.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폐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십니다. 그래도 조금은 서운하네요.”

    “서운하다라. 그럼 짐이 그대를 반겨 줄 것이라 생각했나? 그대는 대공에게 칼을 겨누어선 안 됐어. 그 앞을 막아서면 더더욱 안 됐고.”

    “집안을 지키려는 가녀린 여인의 작은 몸부림으로 생각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 가녀린 여인?

    킬리언은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가녀린 여인? 그대가?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내 아우는 어쩌고. 처음부터 그대의 아버지는 죽어 마땅했어. 그대가 살아남고 이제는 이름뿐인 그 가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대가 카시스에게 넘겨준 증좌들 덕분인 것을 알아야 할 거야.”

    “알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폐하와 대공 전하께는 죽을 죄인이죠. 하지만 제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셨습니다. 처형은 피할 수 없겠지만 작은 몸부림이었습니다. 한데, 폐하께서는 어떠신지요. 폐황후 폐하께서 모후시지 않으십니까.”

    “갑작스레 돌아와서 제대로 찔러 주는군 그래. 누가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벨로체 공작의 딸 아니랄까 봐. 그대의 말이 맞다. 짐도 내 아우에게는 죄인이지, 내 모후 때문만이 아니라·····.”

    폐황후인 제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현 황태후 폐하 때문에라도 나는 카시스에게 죄인이지.

    킬리언은 뒷말을 삼켰다.

    “해서 가문을 지키니 좋은가. 내 아우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도?”

    “예, 비록 자작가로 강등되기는 했지만, 벨로체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이제는 귀족파가 아닙니다. 저는, 폐하의 검입니다.”

    “짐은 그대에게 짐의 검이 되어 달라 한 적이 없어. 그대가 멋대로 정하고 멋대로 변방으로 간 것이지 않나. 내 아우에게 미안하기는 한 건가?”

    “대공 전하께도 당연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대공 전하께서 차라리 그때 제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으면 죄책감이 덜했을 텐데 말입니다.”

    “벨로체 자작, 그대는 죄책감이 덜 들면 안 되지.”

    벨로체 자작의 말에 킬리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대는 카시스에게 평생 미안해해야 할 거다.”

    나처럼······. 언제나 제 모후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카시스가 이어받자 더 미쳐서 날뛰셨지. 내가 황위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선황 폐하의 친자이고 현 황태후 폐하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던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거다. 카시스를 황제에 올리려고 해 봤지만, 그 녀석이 매번 거절하는 바람에 내가 황제에 오른 이유도 있지만.

    ‘전 황제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형님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면 플루투스 제국은 폐망하겠군요. 황제의 자리가 계속 공석으로 남는다면 폐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했지.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리면 황족 다음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서로 패권 싸움을 할 것이고 곳곳에서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 거기다 주변국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동안에 제국의 힘에 눌려 있던 나라들이 그 틈을 노리고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카시스의 말대로 폐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거다.

    “나는 그대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어.”

    “폐하, 전하와 제가 인연이었다면 그리 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하와 저 둘 모두 그 정도로 마음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서로에게 아예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나는 그대가 더 용서가 되지 않네.”

    “폐하.”

    킬리언은 연회장에서 시엘라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때의 카시스를 떠올리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싫기는 하지만 어쩌면 마린족의 여인보다는 벨로체가 나을지도 모르겠어.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대 내 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는 것인가.”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으십니까? 끊어진 인연의 실은 억지로 다시 이을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서로 아직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이어지지 않을까는 마음에서 한 말이다.

    “폐하, 오늘 연회가 대공 전하의 약혼식이나 다름없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약혼이지.”

    “폐하께는 황족의 약혼이 그리 가벼운 것입니까?”

    “그럴 리가. 처음부터 대공의 마음이 없는 약혼이라고 말한 것뿐이야.”

    파르미온 국왕에게 보여 주기 식이기도 하지.

    “그래서, 진짜 대공에게 마음이 없나?”

    “저를 용서하실 수 없다 하시면서 왜 자꾸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것인지 그 의중이 알고 싶습니다, 폐하.”

    “그대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나중에라도 그것을 해결하려면 그대가 필요할 것 같다.”

    “폐하께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대공 전하에게서 마음이 떠났습니다.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나? 만일 대공의 마음이 아직 그대에게 있다면 어찌하겠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나스타샤의 입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소신,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아나스타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에 손을 대려고 할 때 킬리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만일 짐이 대공에게 그대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대는 어찌하겠나.”

    손잡이를 잡으려던 아나스타샤의 손이 움찔했다.

    “·····설령 대공 전하의 마음이 그대로라 할지라도 제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죄인일 뿐입니다.”

    조금 천천히 대답한 아나스타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폐하, 어쩌시려고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이사벨은 킬리언을 질책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벨로체 자작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카시스에게 칼을 겨눈 것이야.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도 마린족의 공주보다는 나을까 싶어서. 황제파 귀족파 상관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기는 했어도 나는 저 두 사람이 아직도 안타까워.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어도 아나스타샤는 카시스를 위해 아버지의 편에 선 것처럼 행동했고 카시스는 전 벨로체 공작의 목숨을 거두고 현 자작을 살려 달라고 내게 부탁했지.”

    비록 강등된 작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저와 카시스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인정이었다.

    “해서 폐하께서는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글쎄, 벨로체 공작만 아니었어도 두 사람이 헤어지는 일을 없었고, 벨로체 자작이 제 가문을 지키겠다 카시스를 막아서며 검까지 겨누지는 않았겠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킬리언의 푸른 바다 같은 눈을 올곧게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안 될지라도 두 사람을 다시 붙여 주고 싶은 생각이오. 이종족의 공주보다는 벨로체 자작이 낫지 않겠소?”

    “글쎄요. 저도 두 사람이 안타까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대공과 벨로체 자작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면 두 사람이 지금이라도 잘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

    “하나?”

    “대공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난 것이겠지요.”

    “카시스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럴 리가 있겠소. 벨로체 자작 이외에는 그 누구도 마음에 담지 않았었는데. 그리고 짐은 그 녀석 마음에 아직 아무도 들어가 있지 않기를 바라오.”

    특히 한순간에 연인으로 둔갑시킨 마린족의 여인을 마음에 담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은 대공의 마음에 아무도 없다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사벨은 고개를 돌려 커다란 아치형 창문을 통해 어두운 밖을 바라봤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군. 아직 벨로체 자작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나는 내 아우가 힘든 길을 가지 않기를 바라니까.”

    다니엘과 같은 동족인 그녀를 보호하는 것은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제 아우가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이종족과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같은 사람인 벨로체 자작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