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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2화 (32/100)
  • 32화

    어떻게······ 어떻게 파르미온의 공주인 내게······. 가만히 안 둬. 어디서 굴러들어 온지도 모르는 것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줄 알고?

    “이제 그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폐하.”

    “조금 더 있다 가거라.”

    “그래야 합니까?”

    킬리언의 말에 카시스의 반반한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황족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네 일이다. 더군다나 약혼식 날이지 않느냐.”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말한 카시스는 아일라의 손목을 낚아채 테라스로 향했다. 아일라는 ‘어? 어?’ 하면서 카시스에게 이끌려 갔다.

    테라스로 간 카시스는 커튼을 쳐서 안쪽에서 볼 수 없게 만들고는 아일라의 손목을 놓고 난간을 붙잡은 채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싫어요?”

    “이런 자리가 불편할 뿐입니다.”

    “그럼 돌아가면 되잖아요.”

    “폐하께서 더 있으라고 하니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여기로 데려왔어요?”

    “그 자리에 계속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그대를 혼자 연회장에 두고 왔다면 개떼처럼 물어뜯으려 할 테니 데리고 온 것뿐입니다.”

    개떼?

    “제국의 2황자가 연인을 숨겨 두고 있다가 약혼식 날 데리고 나타났으니 가만히 둘 리가 없지요. 그러니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대를 데리고 나온 겁니다. 지켜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켜 준다니 고맙기는 한데요. 이건 제가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제가 지켜 주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약해 보이나요?”

    “그 힘,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전부터 계속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아직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움찔!

    틀린 말은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연습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제대로 제어해서 조종할 거예요.”

    “계속 연습했는데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두고 봐요! 제대로 제어하고 말 테니까.”

    내가 못할 줄 알고? 반드시 해내고 말겠어.

    카시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나른한 미소를 짓는 것이, 어쩐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아일라는 울컥하며 소리쳤다.

    “곤란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물을 제어하는 힘을 내보이면 말입니다.”

    “치.”

    고개를 돌려 입술을 삐죽이는 것이 귀엽다고 느껴진 카시스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 지금 웃은 거예요? 왜 웃어요? 나 비웃은 거죠!”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요!”

    “웃지 않았습니다.”

    정말 웃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니라고 우기네.

    “그럼 내가 들은 소린 뭔데요?”

    “잘못 들은 겁니다.”

    아일라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카시스의 바로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빤히 노려봤다.

    “진짜 안 웃었다고요?”

    아일라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물었다.

    “안 웃었습니다.”

    한참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던 아일라는 허리를 펴며 뒤로 물러났다.

    “좋아요, 속는 셈 치고 믿어 보죠.”

    “사흘 후, 칼리스타로 갈 생각입니다. 그곳에 가면 대공성에 사용인들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도 조심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조심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저도 계속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바꾼 상태로 있어야 할까요?”

    “네, 그러는 것이 좋습니다. 파르미온 공주도 함께 칼리스타로 가게 될 것 같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파르미온의 공주가 마린족에 대해서 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린족이라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만 저택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래도 되나요?”

    “그래도 됩니다.”

    카시스는 킬리언에게 눈빛으로 그만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고는 아일라를 에스코트해서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올라타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오늘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린족이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파르미온의 공주가 앞으로 도발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일일이 상대할 필요 없으니 무시하시면 됩니다.”

    “아까는 욱해서 저도 모르게 공주라는 것을 말했지만 주의할게요.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카시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아일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는 인간 세상의 직위 같은 건 잘 몰라요. 하지만 그동안 수업을 받으면서 당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대강은 이해했어요. 당신 정도의 위치면 원하지 않는 약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그런데 어째서 원하지도 않는 약혼을 하는 건가요?”

    “때로는 원하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어째서 억지로 하는 일에 대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건가요?”

    “제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황명에 항변하면 그건 또한 반역이다.

    “저도 하나 묻죠. 당신도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될 것을 왜 가출을 한 겁니까?”

    “그, 그건……!”

    “그것 보십시오. 당신과 제 입장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는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하기 싫어 가출을 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제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제가 숨는다고 저를 못 찾을 분이 아니시라는 것도 있습니다. 약혼이 하기 싫다고 영지를 버리고 잠적할 정도로 제가 무책임하지도 않고요.”

    “지금 제가 가출했다고 무책임하다 비난하는 건가요?”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요. 사과하지 마세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누가 봐도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래 봬도 마린족 후계자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아버지는 정말로 이상해지셨으니까.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으시니까.

    아틀란에 구금된 채로 있었다가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의 뜻대로 슈레더와 언약식에 이어 혼인까지 하게 됐을 거다. 무책임하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제게는 가출밖에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무슨 말을 꺼내도 듣지 않으시려 하니 설득은 불가능했다.

    “우리 이런 얘기는 그만 해요. 그나저나 당신의 영지로 가도 계속 수업은 받을 수 있는 거죠? 인간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원한다면 선생은 계속 붙여 줄 겁니다. 저도 그대가 이곳에서 빨리 적응했으면 하니 말입니다. 칼리스타에서도 그대는 제 연인으로 대접을 받을 겁니다.”

    “당신의 연인 역할은 열심히 할게요. 우리 계약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가 가짜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까요.”

    아일라의 말을 들은 카시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지? 이 기분······. 틀린 말도 아닌데, 저 말이 왜 기분이 나쁜 걸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 가슴에 통증을 느낀 거지?

    “······저도 부족함이 없게 그대를 제 연인으로 대할 겁니다.”

    비록 그것이 거짓된 연기라 할지라도.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당신이 저를 연인으로 대해 주지 않으면 이 계약은 성립되지 않는 거잖아요.”

    계약······ 그랬었지. 내가 먼저 제시한 계약이었어. 그런데 나는 지금 계약이라는 말을 듣고 어째서 마음이 불편한 것일까.

    이 또한 각인의 영향일까? 다니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가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카시스와 아일라가 탄 마차가 성문을 통과할 때, 반대편에서 또 다른 마차가 엇갈려 지나갔다.

    * * *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약혼녀인 나를 놔두고 그 여자랑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크레타가 술렁이는 연회장에서 드레스를 구겨 잡고 제 분에 못 이겨 부르르 떨 때였다.

    “아나스타샤 벨로체 자작님 드십니다.”

    밖에서 시종이 외침에 술렁이던 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해지고 연회장 문이 열렸다.

    열린 연회장 문에서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를 찰랑이며 아리따운 여인이 들어섰다.

    “이거, 대공이 먼저 돌아가기를 잘했군.”

    “빛과 어둠의 수호룡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제국의 고귀하신 태양과 달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벨로체 영애. 아니, 이제 자작이었지. 그만 일어나게.”

    킬리언은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인 아나스타샤를 향해 말했다.

    “설마 그대가 올 것이라 생각 못 했는데. 대체 언제 돌아온 건가?”

    “어젯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대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아직도 내 눈과 귀를 가리려는 자들이 있는 건가? 소용없는 짓인 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제가 돌아온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한데, 대공 전하께서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오늘의 주인공은 대공 전하실 텐데요.”

    “그대, 혹시 대공을 만날 생각은 아니었겠지.”

    “만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럼 만나도 된다 생각한 것인가?”

    아나스타샤의 반문에 킬리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며 되물었다.

    “시간이 꽤 지나 괜찮다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악연인데 괜찮다?”

    그래, 그것은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었지. 처음으로 카시스가 마음을 주었던 여인. 저와 카시스 그리고 측근의 몇 명만 아는 사실.

    “제 아버지가 자처한 일이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희망을 품었었다.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 그때 그대의 선택도 말이지. 짐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그날 그대가 대공에게······.”

    “폐하,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이사벨이 킬리언의 팔 위로 손을 얹으며 그의 말을 잘라 냈다.

    “그래, 이곳에서 할 말은 아니지.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 벨로체 자작.”

    킬리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연회장 문을 향해 걸었다. 이사벨과 아나스타샤가 그 뒤를 따라 연회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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