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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1화 (31/100)
  • 31화

    “밤바다에서 헤엄을 쳤다고요?! 위험하잖아요.”

    로에나는 정말 놀랐는지 눈이 커지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래서 더 혼이 났어요.”

    이유는 다르지만 혼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제국 반대편에서 어떻게 온 거예요? 공주님이라면서요.”

    “그게, 이곳에 한번 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몰래 여행 왔어요.”

    아일라는 이사벨을 힐끗 보며 말했다.

    “몰래요? 그거 혹시…… 가출 아닌가요?”

    뜨끔!

    가출한 게 맞기는 하지만 어떻게 안 거지?

    “공주의 나라에서는 난리가 났겠군요. 하지만 조금은 부럽네요. 가출해서 여행이라니. 보통은 생각 못 할 일이에요. 그것도 한 나라의 공주님이 할 행동은 아니고요. 하지만 어디를 얼마나 여행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뭘 듣고 싶다고? 난 진짜 여행을 한 게 아닌데 무슨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거람.

    “황후 폐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아일라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마침 밖에서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세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황후의 휴게실 문이 열리고 카시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와 황태후 폐하와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예······.”

    카시스의 저 대답이 긍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사벨은 쉽게 알아챘다.

    “제 연인을 데리고 그만 돌아갈까 합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대공.”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황후의 말에 짐도 동의하지.”

    어느새 그의 뒤를 따라온 킬리언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파르미온 공주와 춤이라도 한 곡 추고 가는 것이 예의다.”

    “······.”

    “싫더라도 따르거라. 이건 황명이다. 나도 이런 걸로 네게 황명을 내리고 싶지 않다. 하나, 이번에는 나도 어쩔 수 없구나. 보는 눈이 많다. 약혼이라는 명목으로 데려왔으니 최대한 예의는 지켜야 제국 황족의 면이 서지 않겠느냐.”

    “명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나, 첫 춤 상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자들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겁니다.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든지.”

    카시스는 아일라가 앉아 있는 앞까지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아일라는 이내 결심을 했는지 그 손을 잡고 일어나 함께 휴게실을 나갔다.

    아일라를 에스코트해서 연회장으로 먼저 돌아온 카시스는 두 사람을 주제로 떠드는 귀족들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댄스홀 중앙으로 향했다.

    “뭐 하고 있나. 음악 연주, 안 할 건가?”

    악단들이 칼바람처럼 시린 카시스의 목소리에 흠칫하더니 눈치를 봤다. 카시스가 미간을 좁히자 마른침을 삼킨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정말 저와 출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어째서 생각 못 한 겁니까? 제 파트너로 온 것은 그대입니다. 당연히 제 연인으로 함께 온 파트너와 첫 춤을 춰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가짜잖아요. 그리고 아무리 원하지 않은 약혼이라도 당신에게는 약혼녀도 있고요. 첫 춤은 당연히 약혼녀와 추는 것 아닌가요?”

    “형식적인 약혼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찾는 것을 발견하면 깨질 약혼이지요. 처음부터 필요에 의한 볼모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도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춤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그런 것 같군요. 이제 발을 거의 밟지 않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연회가 끝나면 칼리스타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그대가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움찔!

    내가 살던 곳과 멀지 않다면-. 내가 이 사람을 구한 곳과 멀지 않다는 건데. 가도 되는 걸까? 날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을까. 제발 포기하고 돌아갔기를 바라야겠지.

    “칼리스타로 돌아가면 다른 것을 배우게 될 겁니다.”

    “뭐를 또 배워야 하는 건가요?”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마린족의 후계자는 승계를 위해 배우는 게 없습니까?”

    “당연히 배우죠.”

    하지만 인간 세상이 더 배울 게 많고 복잡한 것 같단 말야.

    “그거 압니까?”

    “뭐를요?”

    “그대에게는 시원한 바다 냄새가 납니다.”

    갑자기 뭐야?

    “그거야 당연히 저는 바다 종족이니까요.”

    바다 냄새가 난다고? 나한테서? 여기서 바다는 가깝지 않으니 향이 나는 이유는 내가 바다 종족인 마린족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다니엘에게는 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대에게만 바다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제 답답한 기분을 없애 줍니다.”

    그는 아일라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니엘도 마린족인데 왜 나한테만 바다 냄새가 난다는 거지?

    춤을 추는 사이에 음악이 끝이 났다. 카시스는 아일라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풀어 떨어져 인사를 하고는 댄스홀 중앙에서 벗어났다.

    “잠시 떨어져 계십시오.”

    카시스는 제 쪽으로 다가오는 크레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말했다. 그에 아일라의 시선이 카시스를 따라 움직였다.

    헉! 정말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리로 오고 있잖아?

    아일라는 카시스의 소매를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꽉 움켜잡았다.

    “괜찮습니다. 그대에게 아무 짓도 못 하게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는 제 옷자락을 붙잡은 아일라의 손에 제 손을 얹어 잡고는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폐하의 명으로 파르미온의 공주와도 춤을 춰야 하니 잠시만 혼자 계십시오.”

    “알았어요.”

    “누군가 말을 시키더라도 말을 아끼십시오. 실수로 그대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말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잔소리쟁이. 사람을 뭘로 보고.

    카시스는 마지막으로 아일라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는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다독여 풀어내고는 앞으로 나섰다.

    첫 춤은 아일라와 췄으니 제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전달되었을 거다. 귀족 측에서 나를 흔들 생각을 하는 이들도 걸러 내야 하고.

    “전하. 어찌 제게 이리 수모를 줄 수 있습니까?”

    “수모라. 저와 약혼할 생각이었다면 이 정도 각오는 하셨어야죠.”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 편이 나중에 파혼하기 편했다.

    카시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크레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한 곡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크레타가 춤을 추지 않겠다 해도 그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크레타는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제국의 황자의 손을 쳐 내고 나가 버릴 수도 없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제국 황자의 약혼녀로 온 것이고, 그 누구에게도 제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플루투스 제국의 2황자이자 칼리스토 대공과 약혼을 하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끔찍하게 싫었다. 그는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칼리스토 대공을 실제로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대공은 소문대로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의 대상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칼리스토 대공 옆에 설 수 있는 것은 저뿐이라고. 저 사람의 옆에 어울리는 것은 저밖에 없다고.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무심해 보였지만, 나라면 그의 마음까지 가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게 마음을 줄 것이라고. 그런데······.

    어느 촌구석에서 굴러들어 온 저 계집이 감히-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해?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 황제는 아니어도 칼리스토 대공 옆자리는 내 거야.

    크레타는 카시스가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기꺼이 추겠습니다. 당연히 제게 먼저 춤 신청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런 계집보다요.”

    “말조심하시라 했습니다. 그대에게 그렇게 불릴 여인이 아닙니다.”

    “전하의 약혼녀는 저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연주가 다시 시작되고 카시스와 크레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마음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그동안 없던 연인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가요?”

    조금 심한 건가······.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그리 심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처음부터 약혼을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파르미온에서 순순히 폐하의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위협을 가하고 저를 약혼자로 내세우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도 속국 정도의 위치는 아니라고 너무 기어오른 것이 화근이었지.

    ‘본보기로 지도에서 나라 하나 지우는 것쯤이야 쉽지만, 나도 자비라는 것을 베풀어 볼까 한다. 하나, 기회를 줬는데도 그 기회를 잡지 않고 허튼짓을 하면 그때는 정말 지도에서 지워 줘야겠지.’

    칼리스타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수도에 남겨 놓고 가면 말들이 많을 것이다.

    “칼리스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공주도 준비해 두십시오.”

    “저 계집도 데려가는 건가요?”

    “……말조심하시라고 분명 일러 드렸습니다.”

    카시스는 크레타가 계속 아일라를 계집이라고 말하자 눈을 내리깔며 차갑게 말했다.

    “공주에게 계집이라고 불릴 만한 여인이 아닙니다. 공주와 같은 신분으로 동등한 위치입니다. 그리고 제 연인이니 데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몸이 떨릴 정도로 냉정하고 차가웠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공주 따위가 나와 동등한 신분이라고? 말도 안 돼.

    “하나 충고하자면 제 연인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것만 지킨다면 저는 공주를 제 약혼녀로 대우해 줄 겁니다.”

    약혼녀 대우는 제가 아니라 사용인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제가 그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충고이면서 동시에 경고였다. 제가 마음을 줄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감히 제 연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레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스텝을 밟았다. 그녀는 제가 약혼자에게 이렇게 수모를 당할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크레타의 발이 어느새 멈췄다. 카시스가 밟던 스텝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카시스가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고 거리를 벌려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돌아 아일라를 향해 걸어갔다.

    크레타는 드레스 자락을 힘주어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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