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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30화 (30/100)
  • 30화

    “저는 약혼을 파할 생각 없어요! 대공 전하는 제 약혼잡니다!”

    “지금은 약혼을 파한다 한 적 없습니다. 제가 제 연인을 데려온 이유는 이 약혼이 제가 원한 약혼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겁니다. 그리고······, 내가 공주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알고 있으라는 의밉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속국의 공주 같은데, 그런 공주보다 제가 낫지 않나요?”

    “지금 제 앞에서 제 연인을 모욕할 생각입니까?”

    크레타는 수모를 당한 것이 분한지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고 부르르 떨었다.

    “이 무슨 소란입니까? 그리고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겁니까.”

    “황태후 폐하.”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킬리언이었다.

    의도치 않던 소란 때문에 황태후가 도착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온 것은 황태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로에나도 함께 있었다.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카시스도 제 어머니를 보고는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일라는 인간 세상의 인사법을 아직 잘 몰랐지만, 카시스가 하는 대로 호칭을 따라 하며 배운 대로 인사했다.

    “대공, 제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들으신 대롭니다. 제게 무슨 말씀을 듣고 싶어 물으시는 겁니까.”

    카시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공.”

    “······.”

    카시스의 불퉁한 대답에 킬리언은 나지막히 그를 불렀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어느새 카시스의 옆으로 다가온 킬리언이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어마마마와 2차전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따라오너라, 카시스.”

    “······제 연인을 들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에 남겨 두고 가라는 말입니까.”

    카시스의 말에 킬리언은 좁혀진 미간을 엄지와 중지로 꾹 누르더니 귀족들에게 말하고는 바로 이사벨을 바라보며 아일라를 부탁했다.

    “그대들은 연회를 즐기시오. 그리고 황후, 미안하지만 황후가 대공의 연인과 함께 있어 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킬리언은 이사벨과 함께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말을 카시스에게 하고는 따라오라 손짓했다. 황제와 대공 그리고 황태후가 연회장을 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이사벨은 아일라에게 다가갔다.

    “우리도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

    “대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고는 카시스가 나간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일라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휴게실로 갈 생각인데 황녀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저도 끼워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폐하의 말씀대로 그대들은 연회를 즐기세요.”

    이사벨은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는 귀족들에게 킬리언과 같은 말을 하고는 아일라와 로에나와 함께 휴게실로 향했다.

    이사벨과 로에나가 아일라를 데리고 함께 연회장을 나가면서 잠시 조용해졌던 사위가 다시 웅성거리며 시끄러워지고 크레타는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말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대체 이 상황은 뭔가요?”

    “글세요? 파르미온 공주님은 파혼하고 모국으로 돌아가시게 되는 걸까요?”

    “지금 뭐라고 했어!”

    크레타는 제 귓가에 들리는 귀족 영애들의 말에 몸을 홱 돌려 다가가 소리쳤다.

    “난 대공 전하의 약혼녀야! 내가 파혼하는 일은 없어! 입 조심해!!”

    “공주님, 저희는 제국의 귀족이에요. 예의를 갖춰 주세요.”

    “내가 왜 너희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데? 나는 왕족이야.”

    나는 여태껏 갖고 싶은 것을 가져보지 못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대공비 자리도 반드시 내가 앉아야만 해.

    아무리 왕족이라도 서로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것이 있는데,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크레타의 언행에 귀족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킬리언과 카시스 그리고 시엘라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대공. 약혼식 날 이런 일을 벌이시다니요.”

    황태후의 입에서 카시스를 질책하는 말이 나왔다.

    “······.”

    “말을 해 보세요. 파르미온의 왕이 우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파르미온 국왕이 우릴 어찌 생각하든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대공.”

    “진정하시지요. 황태후 폐하.”

    킬리언은 조용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는 알고 있던 겁니까?”

    “예.”

    “알고 있었는데도 말리지 않고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겁니까?”

    “황태후 폐하. 대공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겁니다.”

    “알아서 하는 이가 이런 일을 벌입니까? 폐하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알고 있었다기 보다는 대공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습니다.”

    킬리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카시스를 힐끗 쳐다봤다.

    “언질을 받았으면 어째서 말리지 않았습니까. 어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냐는 말입니다.”

    “이 녀석이 제가 말한다고 들을 녀석입니까? 오늘 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킬리언은 안 그러냐는 듯 카시스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카시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조금은 미안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는 이미 그녀를 파트너로 데려온다 말씀드렸습니다.”

    “해서 잘했다는 겁니까?”

    황태후의 눈썹이 까딱 위로 올라갔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대공!”

    시엘라의 표정이 굳으면 카시스를 소리쳐 불렀다.

    “소신은 황태후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니, 대공. 카시스.”

    카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킬리언이 그를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 녀석이 정말.”

    어릴 적에 하지 않던 반항을 하고 대체 왜 저러는 건지.

    킬리언은 카시스가 나간 문을 보면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굳어 있는 황태후 시엘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폐하는 알고 계시지요? 대공이 데려온 여인은 누굽니까? 제 배 아파 낳은 아입니다. 제가 대공을 모릅니까?”

    “대공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지금 대공이 보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녀석이 여인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황태후 폐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녀석이 여인에게 마음을 쉽게 주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황태후는 모르시는 일이지만 한 명 있기는 했었지,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 하지만 그 일 이후 아무에게도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게 되었지만.

    “폐하는 모릅니다. 대공은 여태껏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다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숨기는 것도 능숙합니다. 제가 그리 만들었습니다. 네 자리가 아니니 욕심내지 마라. 갖고 싶은 것을, 네 마음을 드러내지 마라. 그래서 저는 압니다·····. 그 아이가 진정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어찌 행동할지.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시엘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만 후회가 됐다. 저는 어찌 그리도 그 아이를 모질게 대했을까.

    제 배 아파 낳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욕심내지 말라 세뇌하듯이 몇 번이고 말했다. 그뿐이랴. 둘이 똑같이 다쳐도, 아니 제 아이가 더 다쳐도 저는 오히려 킬리언을 더 걱정했었다. 제게 의지하지 말고 강해지라고, 네 목숨은 스스로 지키라고 사지로 내몰았다.

    어찌 어미로서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몇 번이고 그리 죽을 고비를 넘기는 어린 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으랴.

    하나, 제 의중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 보여 주어야 했다. 그래야 귀족들이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 아들이 위험한 길을 걷지 않기 바랐기에 그러했다. 그럼에도 제 아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은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욕심내지 말라는 제 말을 들어온 제 아들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었다.

    저를 유혹하는 귀족들을 제 손으로 베어 낼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제가 인위적으로 인식시킨 대로 진짜 원하는 것이 없어서 그럴 뿐. 만에 하나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제가 아들에게 뒤집어 씌운 그 겉가죽이 벗겨졌을 때 쌓여 있던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과연 어찌 행동할지 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제발 제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저번에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요. 대공저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냥 환궁을 했어요.”

    로에나는 카시스와 어머니 일로 다툰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일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셨죠. 그때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감사 인사를 못 했어요. 오라버니를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틀란 영애. 아니 공주라고 했었죠? 아틀란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아틀란은 바…….”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파르미온보다 더 멀리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의 반대편에 있다고 하더군요.”

    아일라가 바다에 있다는 말을 하려고 ‘바’까지 말했을 때 이사벨이 그녀의 말을 막으며 가로챘다.

    아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사벨을 보더니 눈을 천천히 껌뻑였다. 이사벨은 아일라에게 보이게 입술을 움직여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말하지 말라고? 왜? 어째서 카시스도 그렇고 전부 내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숨기라고 하는 거지? 카시스의 가족 아닌가? 카시스의 가족에게까지 숨겨야 하는 건가?

    “제국의 반대쪽이면 상당히 먼 곳 아닌가요? 오라버니를 어떻게 구한 건가요?”

    “그게······. 근처에서 수영을 하고 있어서······.”

    “밤에 바다에서 헤엄을 쳤다는 말인가요?”

    로에나는 정말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그게······.”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야? 인간들은 밤에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 상식이 아니겠지?

    “제가 듣기로는 공주는 바다를 좋아한다지요. 그래서 몰래 밤에 나가서 헤엄을 친다고 들었습니다.”

    이사벨의 말에 로에나가 정말이냐고 묻듯 아일라를 쳐다봤다.

    “네? 아, 맞아요. 그래서 많이 혼나고는 했어요.”

    이사벨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짓말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다 입술이 부드럽게 휘는 것을 보고는 도와주려는 것을 알고는 이사벨의 말에 맞춰 말을 돌렸다.

    도와주려고 하는 거구나.

    혼났던 이유는 밤바다에서 수영을 해서가 아니라, 물위로 올라와서였지만 혼이 났던 것은 사실이니까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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