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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9화 (29/100)

29화

“왕의 명령이야.”

“네게 명령을 내린 건 전하시지만 난 왕비님 명으로 온 거야.”

왕의 명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왕비님의 명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명을 내린 것은 왕이 아니라 왕비님이셨기에 멜로디에게는 왕비의 명이 먼저였다. 그리고, 왕비님이 제이드에게 직접 부탁까지 하지 않았나.

“너도 왕이 변했다는 것을 알면서 그 명을 따르겠다는 거야? 그것이 잘못된 명이라고 할지라도?”

“당연한 것 아닌가.”

“당연하지 않아. 충신 가문이라면 더욱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간청을 드려야지. 그리고 너도 아일라의 소꿉친구라면 아일라의 기분도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일라가 저희들보다 두 살이 어리기는 했지만, 소꿉친구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내가 왜 인간들에게서 각인자를 찾겠다는 아일라의 기분을 알아 줘야 하는 건데? 난 인간들 때문에 형을 잃었어.”

그랬지. 제이드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던 제이드의 형이 있었지. 어린 나이에 형을 잃어버린 제이드는 충격으로 집 안, 아니 제 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제이드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성격이 변해 있었지.

굉장히 밝던 성격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고나 할까. 좋아하는 형을 잃었으니 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는 아일라의 마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제이드도 아일라도,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안쓰러웠다.

“나도 아일라처럼 이 세상에 나쁜 인간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왕비님이 아일라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처럼 이종족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너도 아일라처럼 동화 같은 꿈을 꾸는 거냐?”

“꿈이 아닐 수도 있잖아.”

“꿈은 꿈으로 간직해라. 나도 아일라처럼 철없이 굴지 말고.”

“풋. 너 아까부터 공주님이 아니라 아일라라고 부르는 거 알아? 그렇게 부르니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어릴 적 우리가 함께 놀던 시절로.”

“허튼소리 그만하고 공주님이나 찾을 생각해.”

제이드는 미간을 좁히며 멜로디에게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왕이 변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가출한 제멋대로인 공주는 잡는 것이 우선이다.

정말이지 찾으면 한 대 쥐어박아 줘야지 직성이 풀리겠어.

“그리고 공주를 찾아야 우리 가문이 무사할 수 있어. 멜로디 너도 알다시피 왕께서는 변하셨다. 그 철부지 공주를 찾아서 데려가는 것만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야.”

“제이드.”

제이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어쩌면 좋으니 아일라.

먼저 앞서가는 제이드를 안쓰럽게 쳐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쉰 멜로디가 뒤따라갔다.

* * *

황궁 밀레니엄 홀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 황후 폐하 드십니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며 홀의 문이 열리고 황제와 황후가 홀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물 갈라지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를 킬리언이 이사벨을 에스코트해 황좌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파르미온의 공주는 먼저 와 있네요? 칼리스토 대공이 에스코트해서 오는 것 아니었나요?”

“글쎄, 어찌 된 일일까?”

“폐하?”

이사벨이 의아하다는 듯 킬리언을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칼리스토 대공 전하와 아일라 아틀란 아가씨 드십니다.”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카시스와 아일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게 뭐죠?”

“글쎄요? 약혼녀인 파르미온의 공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에스코트해 오시다뇨?”

“그런데 아틀란? 그런 성을 가진 귀족이 있던가요?”

“얼마 전에 대공 전하께서 어떤 여인과 함께 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나 보군요.”

한쪽에서는 귀족 부인과 영애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다른 곳에서는 귀족 남자들이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뭔가? 약혼녀를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를 에스코트해 오시다니.”

“얼마 전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사람들이 많네.”

“처음 듣는 이름인 것을 보면 분명 시골에 비루한 가문의 여식이겠지.”

“쯧, 황족이라는 분이 약혼녀를 내버리시다니. 이렇게 책임감이 없으셔야.”

카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던 아일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를 힐끗 봤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자기들 편한 대로 생각하고 떠드는 작자들입니다.”

“그런데 저기서 무섭게 저를 노려보면서 오는 여자가 약혼녀분인가요?”

아일라가 정면을 바라보며 카시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일라의 말에 카시스가 앞을 보자 크레타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섰다.

“전하, 이 여자는 누군가요? 어떻게 저를 내버려 두고 이런 여자를 에스코트해 올 수가 있는 거죠.”

“말조심하십시오, 공주. 제 연인에게 이 여자라니, 말하는 법을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연인이라니요! 여태껏 그런 말 없으셨잖아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일라는 오래된 제 연인입니다. 세상에 밝히지 않았을 뿐.”

카시스의 말에 주변이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세상에. 대공 전하께 연인이 있었다고요?”

“금시초문인데요.”

귀족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황좌에 앉아 있는 킬리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금시초문일 수밖에. 카시스에게 오래전부터 연인이 있었으면 제가 모를 리가 없으니. 아니, 한 명 있기는 했지만, 저 여인도 아니었고 이미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났지.

마린족 아가씨와 진짜 연인 행세를 할 생각인 거군.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대공 옆에 있는 여자, 물빛 머리와 눈동자네요. 혹시, 대공저에 있다는 바로 그 마린족 아가씨인가요?”

“역시 진실의 눈을 지닌 황후는 못 속이겠어. 마법약으로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바꿔도 소용이 없으니.”

“마린족 아가씨가 어떻게 대공의 연인이 되어 있는 건가요?”

“너 뭐야! 단장 칼리스토 대공 옆에서 떨어져!”

앞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킬리언과 이사벨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그들은 크레타의 목소리가 들린 앞을 바라봤다.

“나는 파르미온의 공주야! 칼리스토 대공의 옆은 너같이 어디서 굴러들러 온 지도 모르는 비루한 귀족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크레타가 삿대질까지 하며 아일라에게 소리치자 카시스의 눈썹이 까딱하며 크레타의 언행을 지적했다.

“공주면 공주답게 기품 있게 행동하시죠. 이게 무슨 무례한 언행입니까.”

“제가 지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어요! 전하는 제 약혼자예요!”

“그건 형식적인 겁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저는 누가 뭐래도 전하의 약혼녀예요. 이런 것이 전하 옆에 있게 할 수는 없다고요.”

“잠시만요, 아까부터 듣자 하니 말을 너무 막하시네요. 당신, 공주라고 했나요?”

“뭐? 당신? 지금 감히 내게.”

크레타가 고개를 홱 돌려 아일라를 보며 소리치려 할 때 아일라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당신만 공주인가요? 저도 공주예요.”

그녀의 말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저도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공주다.

“뭐라고? 공주? 어느 나라 공주인데? 성이 아틀란이라고 했던가? 아틀란이라는 나라는 듣도 보도 못했어! 보나 마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속국의 나라겠지.”

“나는-.”

아일라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 앞을 카시스가 막았다.

“제 연인이 공주인 건 제가 보장하죠.”

“어느 나라의 공주인가요?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건가요?”

“그것까지 제가 파르미온의 공주에게 말할 의무는 없습니다.”

“저는 전하의 약혼녀라고요. 당연히 알 권리가 있어요!”

크레타의 말의 카시스의 미간이 좁혀지고 눈썹이 꿈틀댔다.

카시스는 누군가 제 사적인 일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리 약혼녀라도 제 일에 이렇게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아무리 파르미온 공주를 이용하는 일이라지만 대외적으로는 약혼 관계이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카시스는 킬리언 쪽을 슬쩍 보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굳은 표정을 조금 풀고는 한발 다가서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정중히 사죄의 말을 건네고 있지만, 목소리는 그리 부드럽지 않았다.

“제가 공주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드리고, 앞으로 약혼녀로서 예의는 지켜 드리겠습니다. 하나, 제 연인에 대해 알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지나친 관심은 화를 부를 뿐입니다.”

싫더라도 귀족들 앞에서 약혼자 대우는 해 줘야겠지. 아일라와 함께 입장한 것은 파르미온의 공주를 약혼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부러 아일라와 함께 왔다. 폐하께서는 파르미온 공주와 함께하기를 바랐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아일라를 만나지 않았어도 제가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다.

“제가 약혼녀에게 예의를 지킬 수 있게 공주께서도 도와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제가 왜 제 약혼자를 빼앗은······.”

“공주. 이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지나치게 투기를 부리는 공주의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공주도 왕족이니 왕족으로서 기품을 보이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진정하시고 저와 나중에 차근히 이야기하셨으면 합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만하시오, 파르미온의 공주. 대공에게 연인이 있던 것은 짐도 알고 있던 일이오.”

다시 카시스의 표정이 굳는 것을 지켜보던 킬리언은 안 되겠다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재에 나섰다.

“아무리 짐의 선택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 여인을 짐에게 말도 없이 대공의 약혼을 공표하는 자리나 다름없는 이곳에 파트너로 데려오다니.”

“송구합니다, 폐하.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킬리언은 카시스에게 이미 아일라와 파트너로 오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듣지 못했던 것처럼 말했고 카시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여기서 황제인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됐다.

“네 약혼녀에게도 사과하거라.”

“······공주에게도 미안합니다.”

카시스 이 녀석. 내게 통보만 하고 부러 함께 오고 연인으로 소개했으면서. 파르미온 공주가 그렇게도 싫은 건가. 네가 왜 내게 통보하고 이리 행동했는지는 알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

“카시스를 탓하지 마세요. 제가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제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아일라의 말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마나, 지금 대공 전하를 이름으로 부른 건가요?”

“세상에나. 대공 전하의 이름을 막 부를 사이인 건가요?”

“정말 연인 사이인 건가요.”

카시스는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말이 아니기에 고개를 돌려 아일라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황제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지금 카시스라는 이름을 부른 건가. 이미 이름을 부르기로 합의했을 테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른다고.

그런데 공주라고 했던가. 그럼 마린족의 공주라는 것인데. 카시스 이 녀석, 내게는 말을 하지 않았군.

“대공에게 듣기는 했지만, 공주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킬리언은 아일라가 공주라고 미리 말을 하지 않은 카시스를 흘깃 노려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은 짐이 못 미더웠나 보군.”

마린족의 공주라는 말도 제게는 하지도 않고.

“······.”

킬리언의 말에 카시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주, 공주가 이해하시오. 아우에게 연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 못 하고 약혼을 강행토록 한 짐의 잘못이 크오. 그러니 짐이 대신 사과하리다.”

“이렇게 되면 약혼은 파하게 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우호를 위한 약혼인데 그럴 리가.”

주변의 귀족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호?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언제부터 이 약혼이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한 약혼이었나. 파르미온의 공주는 단지 볼모일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폐하와 나, 그리고 아마 황후 폐하 정도겠지. 네가 아끼는 딸을 데리고 있으니 우리에게 협력하고 허튼짓하지 말라는 볼모.

카시스는 귀족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한 말을 들으면 속으로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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