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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8화 (28/100)
  • 28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게 무슨······.”

    다니엘은 놀라서 자신들 위로 점점 모여드는 물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담아 둔 물보다 양이 많았다. 아니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아가씨, 그만하십시오.”

    “조금, 조금만 더······.”

    “아가씨!”

    “조금만 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만하십시오!”

    “응?”

    다니엘이 아일라의 어깨를 붙잡자 놀란 아일라는 고개를 돌리더니 다니엘의 시선을 따라 위를 바라봤다.

    “어? 어쩐지 양이 늘어난 것 같은 건 착각인 건가요?”

    “착각이 아닙니다. 이 주변에 연못이 있는데 그곳의 물도 끌어모은 듯합니다. 집중력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시군요.”

    제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모르는 것을 보니 한번 집중하면 잘 흐트러지지 않는 것 같았다.

    연못에 물까지 끌어모았다고?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가씨, 정신을 흐트러뜨…….”

    촤아악-!!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모여 있던 물이 쏟아져 내렸다.

    “잘하셨는데 마지막에 정신이 흐트러지셨군요. 물에 빠진 생쥐 신세가 됐습니다.”

    생쥐가 뭐지?

    “당신도 마린족이라면서요. 마린족이 물에 젖는 걸 싫어하는 건가요?”

    “글쎄요. 이제는 제가 마린족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지요.”

    “마린족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고요?”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마린족이라는 자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오래 갇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가씨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보고 싶죠. 하지만 제 진정한 반려를 찾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왕의 말을 거역하는 겁니까?”

    “아버지를 설득시키려면 꼭 괜찮은 반려를 찾아야 해요.”

    “그 전에 전하와 아가씨의 각인을 해결해야겠죠.”

    “그래야죠. 미안하게 생각해요. 저도 왜 각인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저나 그 사람에게 위험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야 하죠.”

    아일라와 다니엘이 있는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기둥에 숨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가만히 기둥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존재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집무실로 돌아온 카시스는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책상에서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 기분은 대체 뭔지 모르겠군.”

    각인을 없앨 방법을 찾는다는데 나는 어째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나는 어째서 두 사람이 훈련을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한 것일까.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힘을 제어하는 방법은 같은 마린족이 일러 주는 것이 낫기에 다니엘에게 맡긴 것인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왜 기분이 안 좋은 것일까.

    대체 왜?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져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각······.”

    카시스는 유리창에 제 이마에 나타난 각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각인이 나타난 이마로 손을 가져다 댔다.

    “혹시, 이 각인이라는 것이 영향을 주는 것일까?”

    카시스의 손이 닿자 각인이 사라졌다.

    그래, 이 각인이 문제인 거다. 각인의 영향이 아니라면 내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건 전부 각인 때문일 거다.

    다니엘에게 물어봐야겠어. 이것이 각인이 주는 영향인지 아닌지 알아야겠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귀에 노크와 함께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다니엘입니다.”

    “들어와라.”

    다니엘이 카시스의 집무실로 들어와 가볍게 묵례를 했다.

    “보름간 공주에게 힘을 제어하는 법을 알려 주면서 성과는 있었나?”

    “지금까지로 봐서는 아가씨께선 집중력에도 힘을 제어하는 것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문제가 있어서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짧게 되물은 카시스는 고요히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다니엘.”

    “예, 전하.”

    “각인이라는 것이 내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나?”

    “전하의 감정에 영향은 주지 않을 겁니다. 각인으로 감정을 공유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 서로 위험할 때나 감정에 변화에 따라 각인이 드러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각인이 내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그럼 어째서 그녀가 다니엘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안 좋은 것일까?

    이것이 각인의 영향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카시스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알았다 그만 나가 봐.”

    다니엘이 나가고 카시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 눈을 감았다.

    각인의 영향이 아니라니. 그럼 내 감정이라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각인의 영향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술렁임이다. 그런데 아니라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내 생명의 은인인 데다 다니엘과 같은 마린족이라 보호를 위해서 데리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 그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눈을 감고 있는 카시스의 이마에 옅게 각인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 * *

    “내 아우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입궁하라고 세 번이나 서신을 보냈는데도 이제야 입궁을 하고 말이야. 일부러 그러는 건가?”

    황좌에 앉아 있는 킬리언이 한쪽 팔을 팔걸이에 댄 채 턱을 괴고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있는 카시스에게 물었다.

    “로에나가 봤다는 여인은 분명히 네 생명의 은인인 네 저택에 있는 마린족 아가씨일 것이고.”

    “·······.”

    “꽤 다정해 보였다던데.”

    “잘못 본 겁니다. 다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정하지 않았는데 안아서 데리고 간 건가? 전에도 말했지만 이종족과는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안 될 이유가 뭡니까?

    카시스는 입 밖으로 소리 내 물을 뻔했지만 속으로 삼키고는 스스로 흠칫 놀랐다.

    “이종족과의 결합은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정말 각인의 영향이 아니라는 건가.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카시스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여라도······.”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연회 때 제 파트너는 아일라, 그녀가 될 겁니다.”

    “뭐?”

    카시스의 말에 놀란 킬리언은 팔걸이에 대고 있던 팔을 삐끗하더니 기우뚱하는 몸의 중심을 잡고는 바로 앉았다.

    “지금 뭐라고? 네 약혼식이나 다름없는 연회에 누구를 파트너로 데리고 오겠다고?”

    “그러는 편이 나중에 파혼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 이미 결정된 약혼식을 미루거나 파혼을 못 하게 돼서 네게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 약혼식이나 다름없는 날 다른 여자를 파트너로 데리고 오겠다니.”

    “파혼할 때 핑곗거리가 필요하니 제가 좋아라는 여자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약혼한다는 설정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아-. 그 마린족 아가씨는 허락하고?”

    “이미 이야기 끝났습니다.”

    “하아-!”

    카시스의 말에 킬리언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한데, 정말 그 여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라는 네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이냐.”

    “제가 언제 폐하께 거짓을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지. 그래, 없고 말고.”

    네가 내게 거짓을 말한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쉬이 믿음이 가지 않는구나. 하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건 그냥 감이었다.

    아일라라는 이름은 분명 마린족 여인의 이름일 터인데 다정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어째 좋은 예감은 아니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물러가 보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허락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네게는 허락처럼 들렸나 보구나. 하아-. 대신 이건 너와 나 둘만 아는 것으로 하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카시스는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칼리스타 영지 거리에 망토를 두르고 로브를 쓰고 있는 두 존재가 있었다. 그들은 아일라를 찾으러 뭍으로 올라온 제이드와 멜로디였다. 그 두 사람이 뭍으로 올라온 지도 벌써 스무날이 넘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아일라의 흔적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공주 같으니라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제이드, 말이 거칠어.”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인데 빌어먹을 공주라니.

    “내가 지금 말이 안 거칠어지게 생겼어?”

    “네 기분은 알겠지만 아일라는 우리 공주님이고 아틀란의 후계자야.”

    “그 후계자가 도망을 쳤고 찾을 수 없으니 하는 말이야. 아주 제멋대로야.”

    “후- 난 아일라의 기분 조금 이해가 가는데.”

    멜로디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제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라도 원하지 않는 혼인을 밀어붙이면 도망치고 싶을 거야. 전하께서도 예전 같지 않고 말이야.”

    “그래서 아일라가 잘했다는 거야?”

    “잘했다는 게 아니라 이해가 간다는 거야. 제이드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너라면 시키는 대로 했을 것 같아?”

    “그것이 명령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지.”

    “누구 충신 가문 아니랄까 봐. 에휴-.”

    하지만 그건 네가 당사자가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

    만일 너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디에 숨어 있든 반드시 찾고 만다.”

    찾아서 반드시 한 대 쥐어박아 주고 말 테다.

    “찾아서 어쩌려고?”

    “어쩌기는 뭐를 어째.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안 돌아간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가야지.”

    “왕비님이 먼저 연락 달라고 하셨잖아.”

    멜로디의 말에 제이드의 한쪽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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