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표정이 좋지 못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냐고? 그거야 당연히 옷과 신발이 불편한 것이 문제다.
“이 옷이요. 너무 불편해요. 집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제가 원하는 편한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되나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런 옷을 입고는 헤엄도 못 친다고요.”
“이곳에서 헤엄칠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건 그렇지만······.
카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 있는 소스가 발라진 칠면조 고기를 접시에 담아 아일라 앞에 내주었다.
“누가 헤엄친다고 했나요?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헤엄을 칠 것이 아니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드레스는 입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고 구두도 신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당신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
“그럴 리가요. 저는 당신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최대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그때 그 차림만큼은 안 됩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사람들 눈에는 침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그게 일상복인데.”
아일라는 그가 듣지 못하게 작게 투덜댔지만, 그 말을 들은 카시스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카시스는 그녀의 투덜거림을 듣지 못한 듯이 식사를 하다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끝맺지 못한 계약 관계에 대해 더 할 말이 있습니다.”
“끝난 이야기 아닌가요? 저는 당신의 가짜 연인 행세를 하고 당신은 나를 지켜 준다고 했잖아요.”
“그랬습니다.”
“그럼 된 것 아닌가요? 뭐가 더 필요한가요?”
“계약서를 써 드리고 싶은데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음-,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됐고 보호도 해 준다는데 더 필요한 것이 있나요?”
“그대가 요구하는 조건이 더 있다면 계약서에 추가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그거면 돼요.”
보호해 준다는 것은 나를 잡으러 오는 마린족에게서도 보호해 준다는 말일 테니까. 그거면 됐어. 이 사람은 오로치를 두 동강 낼 정도로 강하니 상대가 누구든지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
“제가 더 바라는 게 있으면 안 될 것 같네요.”
“어째서입니까?”
“저는 몰랐다고는 하지만 당신이 제 반려가 되어 버렸잖아요. 각인 때문에요. 당신이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니니 미안해서요.”
그녀의 말에 카시스의 한쪽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뭐지? 지금 든 이 기분은? 기분이 나쁘다. 저 말이 왜 기분이 나쁜 것일까.
그녀의 말대로 내가 원해서 생긴 각인이 아닌데. 나는 어째서 저 말이 이렇게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일까.
“나도 원하지 않은 혼약을 하고 싶지 않아서 도망쳤는데 당신에게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역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각인을 없앨 방법을 찾아봐 주십시오. 저도 혹시 이종족에 대해 나와 있는 서적에 각인이라는 것에 대해 나와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계약서는 작성해서 보낼 테니 내용을 확인하시고 사인만 해 주십시오.”
카시스는 식탁을 ‘탁!’ 치면서 일어났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듯이 목소리도 퉁명스러웠다.
“어쩐지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네. 어째서지?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건가?”
기분이 안 좋은 듯, 표정이 굳은 채 나간 카시스의 빈자리를 보며 아일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내게 화가 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각인에 대한 이야기 때문인 건가?
“내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닌데. 나도 강제로 슈레더와 혼인하기 싫어서 가출했고 저 사람도 강제로 약혼하게 된다고 했으니 미안해서 말한 건데.”
마린족은 각인이 있는 상대와 혼인해야 한단 말이야. 원하지도 않은 각인이 생겼으니 없애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게 잘못한 걸까.
아일라는 카시스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꼬르르륵!!
앗! 식사를 하다 말았지. 마저 먹어야지. 인간들 음식은 희한한 것이 많지만 맛있어.
아일라의 손을 다시 움직여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카시스가 화난 이유를 궁금해하던 것도 잊은 채.
식당에 혼자 남은 아일라는 꿋꿋이 저녁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카엘이 계약서를 가지고 찾아왔다.
* * *
‘이거 생각보다 어렵잖아.’
아일라는 일주일 전부터 춤을 배우고 있었고, 카시스가 그런 아일라의 춤 상대를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계속 그의 발을 콱콱 밟고만 있었다.
아일라는 미간을 꿈틀대는 카시스를 올려다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에 몸을 뒤로 물리려고 하는 아일라를, 카시스가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며 당겼다. 그러자 중심을 잃은 아일라의 발이 꼬이며 넘어지려는 것을 카시스가 잡아 줬다.
“으앗!”
“조심하십시오.”
“미안해요. 그런데 발 괜찮아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발을 몇 번이나 밟았는데 괜찮다고?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걸까?
미안해서 어쩌지. 아틀란에서 춤을 추는 것하고는 전혀 달라.
나름대로 연습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몸이 생각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발을 계속 밟았는데 정말 괜찮다고? 정말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하지만 괜찮은 것 치고는 발을 밟힐 때마다 미간에 주름이 가던데.
“그리고 이렇게 하면 더 이상 발을 밟힐 이유도 없습니다.”
“어?”
카시스가 아일라를 번쩍 들어 올려 제 발등을 딛고 서게 만들었다. 놀라 입을 동그랗게 말고는 올려다보는 아일라를 본 카시스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안 무거워요?”
“하나도 무겁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나저나 계약서는 자세히 읽어 보고 사인한 겁니까?”
“당연하죠. 제가 그런 것도 교육받지 않았을까 봐요? 저 이래 봬도 공주라고요. 계약서의 내용도 당신이 말한 그대로라는 것을 확인했어요. 꼼꼼히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 봤다고요.”
내가 계약서 하나 제대로 읽지 않았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 이래 봬도 아틀란의 여왕이 될 후계자라고. 비록 지금은 슈레더 악시온과 혼인하기 싫어서 가출했지만.
반드시 그 자식보다 백배, 아니 천배는 더 멋지고 제대로 된 반려를 찾을 거야. 그럼 아버지도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지? 그땐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지 제대로 말할 거야. 어머니 말대로 지금은 편찮으셔서 예민해지신 것뿐일 테니까.
반려를 꼭 동족 중에 찾을 필요는 없잖아.
인간이어도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인어 공주와 인간의 사랑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사랑을 하고 말 거야.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
“춤 연습을 할 때는 집중하십시오.”
“앗, 미안해요.”
역시, 이 사람은 안 되겠지? 약혼도 달갑지 않아 보였는데 원하지도 않은 각인이라는 짐까지 생긴 거니까. 그런데 어째서 각인이 생긴 건지는 역시 모르겠어. 바다의 신의 제단에서 언약식을 할 때만 유효한 것이 아니었나?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미안해요.”
“오늘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만 쉬십시오.”
“힘을 제어하는 건 언제부터 알려 주는 건가요?”
“그건 내일부터 다니엘이 알려 줄 겁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사흘 동안은 춤 연습을 도와드리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당신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죠. 그동안 제게 신경을 써 주느라 시간을 내준 것 아닌가요?”
아일라도 이제 카시스가 상당한 직책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함께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제가 바쁜 사람을 귀찮게 군 것은 아닌지 걱정돼요.”
“제가 시간이 났을 뿐이니 그런 걱정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황궁 연회까지 앞으로 스무날 남짓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주시면 됩니다. 몸에 밴 습관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내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행동하라는 말이겠지. 처음 나온 물 밖 세상이라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모르는 건 배워 나가고 고치면 될 일이야. 그게 쉽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조금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배워 나가면 되는 거겠지.
“불편한 건 제가 참으면서 노력해 볼게요. 그러다 보면 나아지고 익숙해지겠죠.”
여기는 바다도 아틀란도 아니니까. 내가 맞춰 가야지.
“그렇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십시오.”
“네, 알겠어요.”
아일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참 상냥하고 좋은 사람 같아요.”
슈레더 악시온이 아닌 이런 사람이 내 반려가 되어 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차마 이 남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남자에게 내 반려가 되어 달라는 말은 못 하겠어. 각인을 끊는 방법이나 찾아봐야지.
“······.”
카시스는 제가 상냥하고 좋은 사람 같다고 말하는 아일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상냥하고 친절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 이 여인에게는 잘생긴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나.
그러다 전에 아일라가 했던 말이 떠올라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