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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5화 (25/100)
  • 25화

    “그건 물이 없어서!”

    “자신의 힘도 제대로 제어 못 하지 않습니까.”

    울컥해서 반박하려는 아일라의 말을 카시스가 잘라 내며 말했다. 그러자 아일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에.

    아일라는 아직 제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표적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 일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연습은 꾸준히 하고 있어요.”

    “연습만 하면 뭐 합니까? 그리고 그 연습도 자제해 주십시오. 물을 다루는 것을 보여 줘서 좋을 건 없습니다. 그래도 꼭 하셔야 한다면 아까도 말했듯, 다니엘에게 말해 놓을 테니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저나 다니엘이 있을 때 하십시오.”

    “으, 알았다고요.”

    그렇게 아픈 곳을 계속 찌를 필요는 없잖아.

    아일라는 카시스의 말에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카시스는 ‘옷 갈아입으십시오.’ 라는 말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가자, 밖에선 다니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

    “황녀 전하께서도 아가씨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다니엘은 마린족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카시스는 다니엘이 로에나가 아일라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에나는 모른다. 로에나는 네가 마린족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지 않나. 말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이제 날 믿는 것이 아니었나?”

    “전하는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공주님이시니까.”

    아, 그랬지. 마린족의 공주. 하는 행동은 그저 어린아이 같았기에 카시스는 그녀가 마린족의 공주님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카시스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그냥 같은 동족도 아니고 마린족의 소중한 공주님이니 네가 더 바짝 긴장하고 신경 쓰며 지켜 줘야겠군.”

    “·······.”

    “참, 잊을 뻔했군 그래.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것을 자네가 봐 줘. 일단은 나와 자네가 있을 때만 힘을 쓰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에 침울해하는 것 같으니. 연습장은 한적한 곳으로 마련해 주지.”

    “명 따르겠습니다.”

    “하나 더. 셰도우의 일원을 따로 호위로 붙여 놓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셰도우의 호위는 대공령으로 돌아가면 붙을 거다.”

    “감사합니다, 전하.”

    “네게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왜지? 다니엘은 저와 같은 동족의 안위를 지켜 주는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한 것뿐인데. 나는 어째서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것일까.

    대체 이 기분은 뭘까?

    카시스가 다니엘을 지나칠 때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인을 없앨 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겠습니다.”

    “그래.”

    카시스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의 집무실에서 로에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시스는 로에나가 앉아 있는 소파를 지나쳐 서류가 놓인 책상으로 다가가 앉아 펜을 들었다.

    “정말 저녁 식사까지 하고 갈 생각인 거냐?”

    “안 될 이유는 없잖아. 설마 대공저까지 온 누이를 내쫓을 생각이신가요?”

    “하-. 그래 식사는 하고 환궁해라. 단, 황태후 폐하께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거라.”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요? 아-! 조금 전에 본 대공저에 머무는 손님 이야기요? 어째서 하면 안 되는 거죠?”

    “······.”

    “오라버니. 저는 어마마마와 오라버니 사이가 어째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어요.”

    사이가 멀게 느껴진다고? 어머니와 거리를 둔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로에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 건가.

    어머니도 나도 어릴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서로를 대했다. 그것이 사이가 멀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여태껏 해 왔던 대로 어머니를 대했으니까.

    “오라버니께서 칼리스타로 가시고 수도에 잘 오지 않았을 때부터 보이지 않는 벽이 더 생긴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벽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언제나 황궁뿐이 아니라 수도에서 내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칼리스타를 받고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아무런 아쉬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황궁도 수도는 제게 불편한 곳이었으니까.

    이제는 칼리스타만큼 제게 편한 곳은 없다.

    “오라버니는 언제나 그런 식이에요. 자신에 대한 것은 말씀하지 않으시죠. 폐황후 폐하나, 칼립스 오라버니 일도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이번에도 그래요. 마물 독 때문에 위험했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죠.”

    “별것 아니었고 말할 필요 없다고 느꼈을 뿐이다.”

    “마물 독 때문에 위험했는데 그게 어떻게 별것 아니고,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인가요? 오라버니는 저와 어마마마 생각은 안 하시나요?”

    마물 독에는 면역이 없지만, 기본적인 독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있었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을 믿었다. 제가 독이 퍼져 의식을 잃어도 다니엘이 물에 빠진 저를 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번에 저를 구해 준 것은 다니엘이 아니라 엉뚱한 사람이었지만.

    “오라버니께서 위험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런데 황궁에 도착했을 때 잠깐 얼굴만 비치고 안 오셨잖아요.”

    어머니께서 나를 걱정하셨다고? 여태껏 들은 말 중에 제일 믿기 힘들고 놀라운 말이로군.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 된 것 아니냐.”

    어머니······. 아니, 황태후께는 언제는 친아들인 저보다 형님인 폐하가 먼저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랬다.

    ‘내 자리가 아니니 너는 넘보지 마라.’, ‘네 것이 아니니 욕심내지 마라.’ 하물며 형님이 다친 것은 보이시면 내가 다친 것은 보지 못하신 듯 행동하셨지. 그런 분이 나를 걱정했다고?

    나를 걱정하실 분이 아니지.

    “살아 있으니 된 것 아니더냐.”

    “오라버니!”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려거든 그만하고 나가거라. 내 손님께 너무 접근하지 말고. 무례하게 굴지도 말고 식사만 하고 환궁하거라.”

    “오라버니.”

    “그만.”

    “오라버니!”

    “그만하라고 했다.”

    카시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고 의자를 돌렸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카시스의 의지였다.

    “저녁은 그냥 환궁해서 먹을게요. 오라버니께서 저와 대화하시는 것이 불편한 것 같으니까요.”

    카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에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고 있는 카시스를 슬쩍 보더니 그의 집무실을 나갔다.

    로에나는 어머니와 오라버니 사이가 그리 편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차차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제 오라버니와 어머니의 사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카시스는 로에나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카시스는 어머니가 싫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불편할 뿐이었다. 그래서 황궁에 갔을 때도 오래 있지 않았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꺼렸다.

    언제부터였지. 어머니를 어머니나 어마마마라고 부르지 않게 된 것이. 꽤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혹여라도 폐하의 자리를 위협할까 걱정하시겠지. 그런 분이었으니까. 내가 수도에 있는 것이 불편하실지도 모르고.”

    언제나 그러셨다. 제게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실 텐데도 황태후 폐하는 제가 형님의 자리를 탐할까 항상 걱정하셨다.

    연회만 끝나면 바로 칼리스타로 돌아갈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십시오. 제가 수도에 있지 않으면 황태후 폐하의 걱정은 사라지겠지요.

    카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역시, 이 옷이 편해.”

    이런 편한 옷을 놔두고 왜 인간들은 무겁고 움직이기 불편한 답답한 옷을 입는 걸까.

    “이렇게 시원하고 가볍고 편한데.”

    아일라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무겁고 답답한 드레스를 벗고는 침대에 앉아 뒤로 누웠다.

    “아가씨. 드레스를 입으셔야죠.”

    “이 옷이 편한데.”

    ‘그런 무겁고 답답한 옷은 입고 싶지 않아.’라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곤 클로에 뒤에 서 있는 하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옷은 안 돼요? 저 옷은 더 편할 것 같은데.”

    “아가씨, 송구하지만 지금 아가씨께서 말하신 옷은 하녀들만 입는 옷입니다.”

    조금 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여자들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클로에의 단호한 대답이 즉시 들려왔다.

    인간들은 옷도 귀족과 평민의 옷차림이 크게 나누어지는 건가? 우리는 전부 간편한 옷차림이라 모르겠네. 아, 우리도 신분에 따라 구분이 가기는 하지만 별로 차이는 없는데. 인간들이 입는 옷을 입고는 헤엄도 못 칠 것 같은데 말이야.

    “전하와 식사를 하실 때는 단장을 하시고 가셔야죠.”

    아일라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단장이라는 것을 하면 또다시 무겁고 불편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있으면 안 되나요?”

    “앞으로 계속 입으셔야 할 옷이니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말을 낮추십시오.”

    “전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일라는 하녀가 손에 들고 온 드레스를 노려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아일라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만드는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카시스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일라가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받아 식탁 앞으로 온 아일라는 카시스가 꺼내 준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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