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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3화 (23/100)
  • 23화

    “내가 왜 파르미온의 공주와 함께 와야 하지?”

    “예?”

    마담은 당황스러웠다. 칼리스토 대공 전하와 함께 온 것은 로에나 황녀 전하가 아니었다. 이전에 황녀 전하와 함께 온 것을 보기도 했고 이제는 황녀 전하의 드레스를 담당하고 있으니 황녀 전하를 모르지도 않았다. 그럼 대공 전하와 함께 온 사람이 황녀 전하가 아니라면 약혼녀인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대공의 반응을 보니 상대는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님이 아닌 모양이었다.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가 칼리스토 대공 전하의 약혼녀라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닌가? 그럼 이 여인은 누구지?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을 거지? 마담이 이리 무례한 사람인 줄은 몰랐군.”

    “소, 송구합니다. 전하.”

    “내게 송구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온 내 연인에게 송구해야 할 것이네.”

    “여, 연인이요?”

    “마담, 언제까지 무례하게 굴 것이지?”

    “송구합니다. 저는 마담 일렉트라라고 합니다, 아가씨. 대공 전하의 연인이신 줄 몰라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괜찮아요. 모를 수도 있죠.”

    계약 연인이 되자고 들었지만 이렇게 바로 연인 사이라고 말할 줄은 몰랐는데.

    아일라가 당황해서 카시스와 일렉트라를 번갈아 보다 괜찮다고 대답해 줬다.

    “마담, 이 아가씨에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 디자인을 보여 주도록.”

    “예,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한데, 이분이 전하의 연인이시라면.”

    “말이 많군, 마담.”

    마담의 말에 카시스가 눈썹을 까딱 치켜 올리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스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마담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디자인 북을 가지러 후다닥 사라졌다. 파르미온 공주와 함께 온 것 아니냐는 말에 기분이 상했던 카시스는 이것으로 제가 다른 여인과 함께 마담 일렉트라의 샵에 왔다는 소문이 날 테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돌아온 마담은 카시스의 눈치를 보면서 아일라에게 디자인 북을 건네줬다.

    “그것을 보고 원하는 디자인으로 고르면 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아일라는 디자인 북을 펼쳐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아일라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인간들이 입는 옷은 마린족이 입는 옷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자신들은 가볍고 간편한 옷을 입는데, 책에 그려진 옷은 전부 치렁치렁하고 불편해 보이는 옷들밖에 없었다. 전부 답답해 보여서 별로 입지 않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상당히 답답하고 불편했다.

    “이런 거 말고 내가 입고 있던 것처럼 편한 옷 없어요?”

    이 옷들을 입고는 헤엄도 못 칠 것 같단 말이야.

    “이곳에서 지내려면 이곳 문화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척 봐도 답답하고 움직이기 불편해 보이잖아요.”

    “저와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까. 연회에 그대와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옷을 입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일라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면서 디자인 북을 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단 말이야. 대체 사람들은 이런 답답한 옷이 뭐가 좋다고 입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어. 보기만 해도 더워 보이기도 하고, 물에 젖으면 무거울 것 같단 말이야.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고르라는 거야.

    “전 다 그게 그거 같아서 못 고르겠어요. 그러니 당신이 골라 줘요.”

    “······.”

    카시스는 아일라의 말에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나더러 고르라고? 하아-.

    “마담. 가벼운 느낌에 움직이기 불편하지 않고 너무 화려하지 않게 적당히 알아서 부탁하지. 너무 화려하지 않아도 내 연인이 돋보일 만한 것으로 말이야.”

    카시스가 함께 온 여인을 다시 한번 연인이라 칭하자 마담의 눈이 커지더니 아일라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카시스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지만 마담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색은 그대가 고르십시오. 색까지 골라 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알았어요. 이 색으로 해 줘요.”

    아일라는 디자인 북에 그려진 드레스 디자인들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색의 드레스를 지목하며 말했다.

    “아이보리색이 마음에 드시는 거군요. 그럼 천은 아가씨께서 지목하신 색으로 해서 대공 전하께서 주문하신 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스무닷새면 충분하겠지.”

    “예, 전하.”

    “드레스가 완성되면 대공저로 보내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아가씨. 치수를 재야 하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일라는 마담을 따라가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마담이 잠시만이라고 해서 아일라는 금방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수를 재는 것은 아일라의 생각처럼 금방 끝나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요.”

    “많이 힘들었습니까?”

    치수를 전부 재고 의상실을 나오면서 아일라가 투덜거렸다.

    힘들었냐고? 당연히 힘들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치수를 몇 번이나 다시 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몸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또다시 재야 했다.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힘이 들어 자꾸 움직이게 됐다. 그럴 때마다 다시 재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을 속으로 되새기지 않았다면 지금쯤 뛰쳐나왔을지도 몰랐다.

    “원래 옷을 짓는데 이렇게 힘이 드나요?”

    “당신들은 다릅니까?”

    “당연히 다르죠. 치수를 재는 데도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요. 저희는 치수 잴 때도 오래 걸리면 실력이 없는 거라고요.”

    아일라의 말을 들은 카시스는 아일라를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을 떠올리면 ‘그건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다. 아일라가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은 분명 침의를 떠올리게 했었다.

    그런 옷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구두를 맞추러 갈 겁니다.”

    “설마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겠죠?”

    아일라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걱정 마십시오. 드레스를 맞출 때처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 정말이죠?”

    아일라는 이상을 찌푸리며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 기분 푸시죠. 구두까지 맞추고 나면 수도를 구경시켜 주겠습니다.”

    카시스는 아일라를 데리고 신발 가게로 가서 자리에 앉혔다. 카시스가 주인과 대화를 하는 사이에 아일라는 구두를 벗고는 맨발을 바닥에 붙였다.

    아-, 편하다. 벗으면 발도 안 아프고 이렇게 시원한 것을 왜 신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어.

    “아가씨, 발 치수를 재겠습니다. 송구하지만······.”

    주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일라는 맨발을 드레스 밖으로 내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스는 속으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두를 벗고 있었군.

    “내가 하지.”

    아일라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카시스는 아일라의 발을 제 무릎 위에 올려 발을 털어 줬다. 그리고 주인이 발 치수를 잴 수 있도록 해 주고는 발을 무릎에서 내려 구두를 신겨 줬다.

    “불편해도 구두는 신고 있으십시오.”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발 아프다고요. 걸음도 제대로 못 걷겠고요.”

    “그래서 구두를 벗고 맨발로 나온 겁니까? 맨발로 다니다가는 다칠 수 있습니다.”

    “이상한 걸 신겨 주기는 했지만 느낌이 이상해서 몰래 벗고 왔어요.”

    “제가 옆에서 제대로 에스코트를 하겠습니다.”

    아일라가 발 아픈데, 라고 작게 투덜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아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민 카시스의 손을 잡고 일어나 구두 가게를 나갔다.

    “중앙 광장으로 가 보겠습니까?”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떤 곳인지 아직 구경 못 했을 테지.

    “가 볼래요.”

    아일라가 구두 때문에 발이 자꾸 삐끗 접질려 비틀거릴 때마다 카시스가 붙잡아 주며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여기가 중앙 광장입니다.”

    “우와-!”

    중앙 광장에 도착한 아일라는 시원하게 물이 나오는 삼단 분수대를 보고는 발이 불편하고 아픈 것도 잊고는 감탄을 했다. 그러더니 곧장 구두를 벗고 분수대 안으로 달려들어 가 발을 담갔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발도 시원하고. 기분 좋아.

    갑작스런 아일라의 행동에 당황해서 말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카시스는 분수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아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오십시오.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린아이도 하지 않는 짓입니다.”

    “뭐라구요?”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그만하고 나오십시오.”

    아일라가 눈에 띄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어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서야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왜, 왜 저렇게 쳐다보지.’

    아일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당황스러워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몸이 공중에 뜨는 느낌에 비명을 지르며 카시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뭐, 뭐예요? 갑자기! 놀랐잖아요.”

    “나올 생각을 안 하시기에.”

    “오라버니?”

    카시스의 시선이 놀란 듯한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에나······?”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그와 아일라를 멍하니 바라보는 로에나가 있었다.

    “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여자를 안고 있어!!

    로에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고 이내 말을 잇지 못한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아-!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지.”

    “아니······. 지금 자리를 옮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요.”

    “시선이 너무 많다.”

    “오라버니께서 사람들이 많은 데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내려 줘요.”

    로에나의 말대로 제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것은 맞기에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아일라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발과 드레스가 젖었습니다. 이대로 마차까지 갈 테니 가만히 계십시오.”

    카시스의 품에 안겨서 가게 된 아일라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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