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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2화 (22/100)
  • 22화

    “귀족가의 여인들이 입고 다니는 차림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고요. 방금도 그렇고요.”

    “이곳에 있는 동안 드레스에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그럼 그만 나가시죠.”

    카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현관 앞에 마차까지 가는데도 아일라는 자꾸만 발을 삐끗하며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때마다 카시스가 넘어지지 않게 그녀를 붙잡아 줬다.

    “전하.”

    “나는 그대를 부른 기억이 없는데.”

    아일라를 먼저 마차에 태운 카시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호위 없이 나가실 생각입니까?”

    “내가 누군가의 호위를 받을 실력은 아니지 않나, 윌리엄 경.”

    “전하께서 강하신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전하의 작위를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아가씨도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설마, 내가 지키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윌리엄이 진정으로 저를 걱정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이곳은 수도입니다. 칼리스타하고는 다릅니다.”

    “내가 그리 못 미더운가? 내가 경보다는 실력이 우위라고 생각하는데.”

    마차 안에 있는 아일라를 쳐다본 카시스는 이대로 윌리엄과 신경전을 벌이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마음대로 해라.”

    내가 뭐라 해도 따라올 녀석이니까. 작게 말한 카시스가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마차가 출발하자 아일라는 의자에 앉아 치맛단을 올리고 구두를 벗었다.

    “그렇게 불편합니까?”

    “정말 너무 불편해요. 옷은 치렁치렁해서 거치적거리지, 발은 아프지. 불편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요.”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아일라를 지켜본 카시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보세요. 발가락이 빨갛잖아요.”

    “마차 안에 있는 동안 구두를 벗고 있으십시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구두를 다시 신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바다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것보다 편한 옷과 신발은 없나요.”

    없지는 않다. 다만 비루한 귀족이나 평민들이 입는 옷이라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처음 입어 보는 것이라 불편할 겁니다. 익숙해지면 나아집니다. 구두는 지금 신은 것보다 좀 더 편하게 제작해 주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참아 주십시오.”

    “······알았어요. 참아 볼게요.”

    아일라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카시스는 그런 아일라를 지켜보다 미카엘에게 파르미온 공주가 대공저로 오겠다는 말을 했다는 전갈을 받고부터 하던 생각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움직이던 마차 안에서 생각을 마친 듯 카시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파르미온 공주와의 약혼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생각해 봤는데 저와 거래를 하지 않겠습니까?”

    “거래요?”

    “당신이 저를 구해 줬듯이 저도 당신을 구해 줬습니다. 그것으로 서로 진 목숨 빚 계산은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인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당신이 바다로 돌아가기 전까지 제가 계속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 저택에 계속 머물러도 됩니다. 그러니 각인이 해결되고 그대가 바다로 돌아가기 전까지 제 연인 역할을 해 주십시오.”

    “······네?”

    아일라는 갑작스런 카시스의 말에 놀라 눈을 천천히 깜빡이더니 조금 늦게 되물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제 연인 역할을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왜요?”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사정상 제가 약혼을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약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약혼을 명분으로 데려왔는데 그 약혼을 없던 일로 만들기도 어렵고요. 그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파혼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지금 아직 약혼식을 정식으로 올리지 않았으니 파혼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작은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제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제국의 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약혼을 한다는 설정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저를 사랑하세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말에 카시스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하아-. 아닙니다. 그대를 사랑하게 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건가요?”

    “말했듯이 제가 원하는 약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약혼녀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일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싫습니다.”

    사람은 필요에 의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가 하지 않은 일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꾸며 거짓말하는 사람을 카시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약혼녀가 거짓말을 했나요?”

    “아직 약혼식은 치르지 않았으니 정식 약혼녀는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에게는 기정사실이지만, 이라는 말이 들렸다.

    귀족들과 사람들은 이미 내 약혼녀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약혼식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신이 도와주면 약혼을 깨기 쉬워질 듯합니다.”

    이번에는 아일라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맞으니 도와줄까? 그 집을 나오면 갈 데가 없기도 하고. 각인 문제도 해결해야 진정한 내 각인자를 찾기도 할 테니까.

    “좋아요, 내가 뭘 하면 될까요?”

    “한 달 후 황궁에서 연회가 열릴 겁니다. 파르미온 공주를 환영하는 연회라는 명분이지만, 사람들은 대외적으로 제 약혼식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정신을 잃었던 데다 부러 늦게 도착하기 위해서 이동 마법진이 아니라 말을 타고 왔더니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날 저와 함께 황궁 연회와 참석해 제 옆에 계시면 됩니다.”

    “그거면 되나요?”

    “예, 그거면 됩니다. 그리고 함께 칼리스타로 가면 됩니다.”

    “칼리스타?”

    “제 영지입니다. 계속 비워 둘 수 없으니 한 달 후 영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칼리스타에서도 제 성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

    “믿어도 됩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귀족과 기사에게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명예하고도 연관이 있고요.”

    “알았어요. 대신 당신도 저를 도와주세요. 당신도 원하지 않은 약혼을 한다니 남 일 같지 않네요. 그리고 저와의 반려 각인도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니니, 억지로 제 반려가 되어 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각인을 해결할 방법은 저도 열심히 찾아볼게요. 그러니, 제 반려를 찾는 것을 도와줘요. 저는 반드시 인간에게서 제 반려를 찾고 싶어요. 그리고 마린족과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맺고 싶어요.”

    그 비늘이 단단한 재앙급 마물을 두 동강 냈으니, 이 남자와 관계를 잘만 유지하면 바다의 마물을 없애는 데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제가 도움을 먼저 청했으니 그 정도는 도와드리죠.”

    “그럼 이걸로 계약 관계가 된 건가요?”

    “네, 서로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라고 해 두죠. 자세한 계약은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기로 하죠. 마차가 멈춘 것 같군요.”

    대화를 하느라 몰랐지만 어느새 마차는 멈춰 서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아일라가 마차 손잡이를 잡은 순간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왜요?”

    “제가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걸 드십시오.”

    카시스는 제 가슴께에서 작은 물약 병을 꺼내 아일라에게 내밀었다.

    “이 물약이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꿔 줄 겁니다.”

    그의 말에 아일라는 물약을 받아 가만히 바라보다 뚜껑을 열고 물약을 마셨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색은 짙은 갈색으로, 눈동자는 연보라색으로 변했다. 마차 창문에 비친 변한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본 아일라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나라고? 진짜로 변했네. 신기해라.

    “이제 됐습니다. 내리십시오.”

    카시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일라가 고개를 돌리니 카시스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효력이 좋은 마법 약이니 앞으로 여덟 시간은 효력이 있을 겁니다. 우선 드레스와 구두를 먼저 맞추도록 하죠.”

    여덟 시간? 꽤 오랫동안 이 모습으로 있는 거네. 그나저나 옷은 불편하고 신발이라는 건 발이 아파서 걸음을 더 못 걷겠어.

    카시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아일라는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카시스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줬다.

    “조심하십시오.”

    “이거 꼭 신고 걸어야 되나요? 발도 많이 아프고 걸음을 제대로 못 걷겠어요.”

    익숙해져야 된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신발은 발을 보호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필히 신고 다니는 데 익숙해지십시오.”

    발을 보호해 준다고? 이것 때문에 발이 더 고생하는 것 같고 더 다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이 사람 말대로 인간 세상에서 지내려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적응이 잘 안 될 것 같은데.

    카시스는 구두에 익숙하지 않아 자꾸 넘어지려는 아일라를 데리고 샵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 칼리스토 대공 전하?”

    카시스와 아일라가 샵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나와 인사를 하더니 아일라를 힐끗 쳐다봤다.

    “마담은 내 옆에 여인은 보이지 않는가?”

    “송구합니다. 한데, 누구신지.”

    “내가 같이 올 사람이 있던가?”

    로에나가 성화를 해서 두어 번 함께 온 적은 있어도 다른 여인과 온 적은 없었다.

    “아, 그럼 약혼하실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님이시군요.”

    마담의 말에 카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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