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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1화 (21/100)
  • 21화

    이 사람이 내 반려라면 좋겠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각인을 그냥 둘 수는 없겠지. 나도 강제로 언약식을 하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이 사람에게 억지로 부탁할 수는 없어.

    각인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아일라가 반려가 되어 줄 사람을 찾으려면 밖으로 나가서 알아봐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머리색과 눈동자색으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왜요? 왜 안 되는데요? 그럼, 제 본래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면 나갈 수 있다는 건가요?”

    “눈에 띄어서 안 된다는 겁니다. 당신 같은 이종족에게 이 세상은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저도 당신들과 다를 거 없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과 물을 자유자재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정도다. 그러니 마린족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마린족인 것을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건 마린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말입니다. 마린족에 대해 아는 자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가둬 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벌써 이틀째 못 나가고 있는데.

    “그럼 나가게 해 줘요. 각인을 해결할 방법도 찾고 내 반려도 찾게요.”

    이 사람이 내 반려로 있어 주면 좋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 각인을 받아들일 리는 없을 것 같아. 그러니 각인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 새로운 반려를 만드는 게 좋겠지.

    “지금 상태로는 안 됩니다.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고 나가야 합니다. 마린족에 대해 아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꼭 바꿔야 하는 건가? 싫다고 하면 안 내보내 줄 것 같은 표정이네.

    “알았어요. 그럼 나가도 되는 거죠?”

    “호위를 붙여 줄 테니 데리고 가십시오. 절대로 떼어 놓으면 안 됩니다.”

    바다에서도 호위는 안 데리고 다녔는데. 제이드는 아틀란 수비대 경비 대장이기도 했지만 제 호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잔소리가 심했고 제가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을 알면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기에 그런 제이드 몰래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사람들 앞에서 물을 다루는 힘은 절대 사용하지 마십시오.”

    “······알았어요.”

    그건 할 말이 없다. 제어가 안 돼서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미카엘, 클로에는?”

    카시스가 미카엘을 보면서 묻자 그는 입구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카시스의 시선도 미카엘을 따라 입구 쪽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로 그대의 시중을 들어 줄 시녀입니다. 방으로 보내 드릴 테니 항상 데리고 다니십시오.”

    “데리고 다닐 사람들이 많네요.”

    “그대의 시중을 들고 호위할 자들입니다.”

    “몇이나 함께 다녀야 하는데요?”

    “불편할 것 같으니 그리 많이 붙여 주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들을 따돌려서는 안 됩니다.”

    “알았어요.”

    이 사람도 제이드만큼이나 걱정이 많고 잔소리가 심한가.

    “러셀 경에게 실력 있는 기사들로 둘을······ 아니, 오늘은 내가 직접 가지. 급한 일은 이미 처리했으니까.”

    그의 말에 아일라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두세 번 천천히 깜빡였다.

    “전하, 잠시만요.”

    그제서야 미카엘은 자신이 왜 카시스를 찾았는지 기억해 내고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카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절해.”

    “하지만 파르미온 공주께서 계속 대공저로 오시겠다 하시나 봅니다.”

    “다시 한번 거절하고 폐하께 내가 다시 찾아뵙겠다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전하겠습니다.”

    하-, 역시 약혼녀라는 명분을 쉽게 깰 수 없는 건가. 아직 약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내정된 약혼녀인 데다가 애초에 약혼의 명분으로 데려왔으니까.

    “이래서 싫었던 것인데······.”

    “네?”

    미카엘이 물러가고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시스의 말을 들은 것인지 아일라가 되물었다.

    “밖에 나가실 생각이라면 방으로 돌아가 준비하고 나오십시오. 방에 가면 그대를 치장해 줄 시녀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함께 나가려고요?”

    “예, 오늘은 호위 대신 제가 함께 나가겠습니다.”

    그의 말에 아일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지금의 저희 쪽 마법사가 이곳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마법 물약으로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마법 물약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꼭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꿔야 하나요?”

    별로 내키지 않는 듯 다시 묻는 아일라에게 카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이 그대에게 더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하니까요.”

    마린족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을 만날지라도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꾸고 나면 물속에서 숨을 쉬거나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을 직접 보지 않는 이상, 그녀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 * *

    아일라가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서 방으로 돌아갔을 때, 낯선 여인이 방 안에 있었다.

    “누구?”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시게 된 클로에 로체스터라고 합니다. 칼리스토 대공가에서 시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음, 인간 세상의 인사법은 잘 모르는데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거지?

    “반가워요, 아일라 아틀란이라고 해요. 그런데 저를 모신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대공 전하의 명으로 앞으로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아까 그가 말한 사람인가 보구나. 그런데 어려 보이네. 아무리 많아도 나하고 비슷한 나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나이가 나보다 많아도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아.

    “나가실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

    “이대로 나가면 안 되나요?”

    “그 차림으로는 좀······.”

    방으로 돌아온 아일라는 자신을 단장해 주겠다는 클로에의 말에 멀뚱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 차림이 뭐 어때서?

    클로에는 얇은 흰색 원피스 차림을 한 아일라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 탓에 아일라는 제 차림을 내려다봤다.

    “아가씨께서 입으신 차림은 주무실 때나 입는 차림입니다.”

    클로에의 말에 아일라는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꿈뻑였다.

    뭐? 이게 잘 때나 입는 차림이라고? 바다에서는 전부 이렇게 입었는데. 어머니나 다른 마린족은 아니었지만 저는 이렇게 입고 다녀도 아무도 안 된다며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차림으로 나가시면 안 좋은 쪽으로 시선을 끌게 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제 앞에 있는 여자도 저처럼 간편한 복장이 아니었다.

    저런 차림을 입어야 하는 건가? 어쩐지 답답할 것 같은 차림인데. 나도 저렇게 입어야 나갈 수 있는 건가.

    어쩔 수 없지, 답답해도 참는 수밖에.

    “알았어요.”

    하지만 아일라는 제 다짐을 오 분도 안 돼서 후회했다.

    “꺄아악-!!”

    이거 뭐야? 왜 이렇게 조여! 숨 막히잖아!

    “조금만 참으세요.”

    참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야! 너무 답답하고 내 갈비뼈랑 허리가 부러지겠다고! 숨도 못 쉴 것 같단 말이야!

    아일라는 몸을 비틀어 클로에와 하녀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잡아당기는 힘에서 벗어나 조여드는 압박감이 사라지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이거 풀어 줘요. 뭐가 이렇게 답답해요. 그리고 왜 그렇게 잡아당기는 거예요. 갈비뼈하고 허리가 부러질 것 같잖아요.”

    “아가씨, 코르셋을 하셔야 됩니다.”

    내 앞에 이 여자도 이걸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이런 답답한 건 왜 하는 거지. 코르셋인지 뭔지, 난 하기 싫어.

    아일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입니다. 비명이 들리던데 무슨 일이십니까?”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리자 클로에가 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설명했다. 둘이 대화를 잠시 나누는가 싶더니 방문이 다시 닫혔다.

    “아가씨께서 많이 불편하시면 코르셋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거 안 해도 된다고요?”

    “네, 아가씨께서 아직 익숙하지 않을 테니 하기 싫다고 하면 강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요?”

    “전하께서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라고 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혹시, 내가 지른 비명이 들렸나? 그렇게 크게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구나, 컸구나.

    클로에는 아일라에게 다가가 코르셋을 벗겨 주려고 손을 뻗었다. 아일라는 혹여라도 다시 제 몸을 조이지는 않을까 움찔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끈이 느슨해지며 몸이 편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옷이 없어 체격이 비슷한 클로에의 드레스를 입고 단장을 마친 뒤 방을 나갔다. 아일라가 불편한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힘겹게 복도를 지나 1층 로비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으악!”

    계단을 내려가던 아일라는 발이 꼬이면서 공중에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아일라는 이어질 충격과 통증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누군가 그녀를 받아 줬다.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아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저를 받아 준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카시스? 나를 받아 준거야?

    그녀는 바닥에 내려 준 카시스의 얼굴을 잠시 넋놓고 올려다봤다.

    “위험했습니다.”

    “어? 당신, 고마워요.”

    “괜찮으십니까?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습니다.”

    카시스는 아일라를 감싼 채로 말했다.

    “고마워요······.”

    아일라는 옅고 깨끗한 은백발과 은청색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역시 물속하고 달라. 물속이었다면 이 정도로는 다치지 않을 텐데.

    “그런데, 이런 불편한 차림을 꼭 해야 하나요? 너무 답답하고 발도 아프다고요.”

    아일라는 걷는 게 힘들다며 인간들은 왜 이런 걷기 힘든 옷을 입느냐고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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