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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20화 (20/100)
  • 20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위로를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어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먼저 돌아서서 말을 한 것은 형님이었다.

    ‘그리 볼 것 없다. 아무리 내 친모라 할지라도 지은 죄를 덮어 줄 생각은 없으니. 그리고 미안해야 하는 것은 나지, 네가 아니다. 여기는 그 녀석들을 불러서 정리하라고 하고 그만 돌아가서 쉬자고. 내일 수업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형님은 마법 결계를 해제했다.

    내가 형님께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이 자식!’

    ‘귀찮아서 맞아 줬었는데 더 이상 맞아 주는 것도 지겹다. 네 녀석들은 도가 지나쳤어. 검을 드는 사람에게 팔과 손은 소중하거든. 그런데 검을 들지 못하게 만들겠다니.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평민이 귀족인 우리에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무사할 것 같은데? 너희 실력으로는 나를 못 이기는 걸 지금 뼈저리게 느꼈잖아. 그러니까 평민이라고 무시하지 말지 그랬어.’

    ‘대단한데. 그 녀석들 네가 그렇게 만든 건가?’

    그때 레안드로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는지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하고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얻어맞고 있기에 그저 그런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 귀족이 평민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은 봐주는데 평민이 귀족에게 상해를 입히는 건 안 봐주거든.’

    ‘빌어먹을 제국법.’

    ‘그래, 아주 빌어먹을 제국법이지.’

    킬리언은 레안드로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

    ‘너, 너흰 또 뭐야?’

    ‘우리? 알고 싶어? 안 그래도 집안만 믿고 설치는 것이 꽤 거슬려서 손 한 번 봐 주려고 했는데 대신 손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뭐?’

    ‘내가 누군지 알고!’

    ‘난 네가 어느 집안이고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아.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난 너 같은 녀석들이 싫거든.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쓰레기들을 꼭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

    ‘네 녀석들이! 고작 평민 따위가 우리 집안을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말끝마다 평민, 평민. 지겹군. 네가 어떤 집안이든 저 녀석은 몰라도 우리에겐 손 못 대. 왜냐하면-.’

    ‘황태자 전하! 황자 전하!’

    킬리언의 말을 자르며 멀리서 두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황자 전하!’

    ‘쯧! 언제 알아채고 오려나 했더니만 언제나 늦는다니까.’

    ‘화, 황태자와 황자라고?’

    킬리언이 제 발밑에 쓰러져 있는 녀석의 손을 발로 짓이겼다.

    ‘으아악! 황태자와 황자가 우리 아카데미에 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당연하지, 비밀이니까. 물론 머리색도 바꾼 것이고. 그런데 아까부터 말이 짧은데? 우리가 누군지 알았으면 전하를 붙이고 존대를 해야지. 제국의 황태자와 황자가 네 녀석의 친구는 아니지 않은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형님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 이제 저 녀석, 네 편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 들었어? 카시스. 귀족에게 반항했잖아. 반항도 하지 않는 녀석은 구해 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은 너였어.’

    킬리언이 제 뒤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안드로와 카시스를 번갈아 봤다.

    ‘별로. 귀찮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여전합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실력이 있으면서도 당하고 있던 것이 마음에 안 듭니다.’

    ‘하아, 내 아우님은 핑계도 참 좋아. 시스, 내 눈에는 네가 그냥 네 세력 만들기 싫어서 트집 잡는 걸로 보인다.’

    ‘정답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죠. 형님.’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은 질색이다. 저를 죽이려고 하는 암살자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피곤한데 거기서 더 일을 늘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제 세력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 * *

    카시스는 서류에 사인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큰 아치형 창문으로 밖으로 내다봤다.

    조금 전부터 제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였다.

    후원에 있는 나무들을 전부 부러뜨릴 생각인가? 후원은 연습장이 아닌데.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내가 분명 물을 다루는 힘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는데도 말도 안 듣고. 아무리 후원을 가꾸지 않고 방치해 둔 상태지만 저 상태라면 정리를 해야 할 정원사만 불쌍하군.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이제 그만 가서 말려야겠어.

    카시스가 내려다보는 후원은 없앨 생각이라 관리하고 있지 않아, 피어 있는 꽃은 없었다. 하지만 풀과 나무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나무는 그냥 둘 생각이어서 정원사가 와서 관리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스는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난간을 잡고 뛰어내렸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야! 잘 날아가다가 왜 휘냐고!”

    “힘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대공저 안에서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카시스의 목소리를 들은 아일라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이곳은 후원이지, 그대가 힘을 제대로 다루는 연습을 하는 연습장이 아닙니다.”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연습하려다 보니까······ 미안해요. 이곳을 엉망으로 만들어서요.”

    “제게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 나무와 정원사에게 미안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으-.”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는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물은 저기 있는 우물에서 끌어와 사용한 거겠군.

    카시스의 시선이 한쪽에 있는 우물을 힐끗 바라봤다.

    “힘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사용하는 겁니까.”

    “힘을 제대로 못 다루니까 제대로 제어하기 위해서 연습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좋아졌습니까?”

    “······아니요.”

    아일라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저도 알아요. 이 정도면 재능이 없다는 거······.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아틀란이니까. 마린족의 왕족이니까.’ 하고 아일라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린족이 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것도 왕족이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괜찮아질 것이라 말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표적을 겨냥해 맞추는 연습보다 다른 것을 먼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거 뭐요?”

    “표적을 맞추는 연습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대는 먼저 그 힘을 제대로 제어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다니엘에게 배워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 정말 마린족 맞아요? 마법으로 바꿨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머리와 눈동자색이 다르니 자꾸 마린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니엘이 마린족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보다 뭍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인가?

    아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힘을 제대로 다루고 각인에 대해 아는 것을 보면 마린족이 맞기는 한데. 머리색과 눈동자색 때문인지 아일라는 자꾸 의심이 들었다.

    아일라는 바다 속에서만 살아서 물 밖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마법이라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물을 다루는 것을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겁니까? 머리와 눈동자색을 마법으로 바꿨다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단지 머리와 눈동자색이 달라서만은 아니에요. 그래요, 그 머리와 눈동자색을 마법이라는 것으로 바꿨다고 쳐요. 그런데,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저와 같은 마린족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고요.”

    “그건 다니엘이 인간 세상에 오래 있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제가 다니엘을 구한 후, 그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자신과 만나기 전까지 십 년이 넘는 시간을 갇혀 있었고 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그래서 분위기 같은 것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요?”

    “제가 다니엘과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에게 듣기로는 아마 십 년 이상은 뭍에서 지냈다고 하는군요.”

    물론 그 십 년 이상의 시간 동안 갇혀서 지낸 것이지만. 카시스는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제가 보호하는 한, 다니엘과 같은 일을 당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천천히 말해도 되겠지. 아니, 본인이 마린족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아도 이 세상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걸로 충분할 거다. 굳이 다니엘이 겪은 일을 말해 줘서 충격을 줄 필요는 없겠지.’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그런데 후원은 꼴이 왜 이렇습니까?”

    미카엘의 말에 아일라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내가 그랬어요.”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제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아마 마린족에서 물을 다루는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건 저밖에 없을 거다.

    아일라는 속상함에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니엘에게는 내가 말해 둘테니 그대는 그만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방으로 돌아가라는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저기, 잠시만요.”

    아일라가 있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힐끗 그녀를 쳐다본 미카엘이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일라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언제까지 밖에 못 나가는 거죠?”

    “밖에 나가고 싶은 겁니까?”

    밖에 나가고 싶냐고? 나가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여기에 갇혀 있으려고 물 밖 세상으로 나온 게 아니란 말이야. 나도 모르는 새 생긴 각인을 끊을 방법도 찾고 반려도 찾아야 한다고. 여기서 이렇게 갇혀 지낼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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