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몰라서 묻냐?”
카시스는 레안드로가 정말 모른다고 하면 죽일 기세로 미소 지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아! 그거?”
아, 그거?
“타국에서 움직이는 게 쉬운 줄 아냐? 그것도 마법 도구만 가지고 쉽게 알아낼 수 있겠냐?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정보를 준다는 목적으로 파르미온의 공주와 약혼하려던 거 아니었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볼모 겸. 그러니 별문제 없잖아.”
“문제가 생겼으니 하는 말이다.”
“무슨 문제? 오늘 저택에 들였다던 그 마린족 아가씨? 그 아가씨가 문제 될 게 있나?”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 역시나 빠르군.
“미카엘이 말했나?”
미카엘이 지금 대공저 집사 일을 하고 있지만 본래는 레안드로의 밑에 있던 셰도우의 일원이었다.
“물빛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마린족밖에 없다고 다니엘이 그러지 않았었나. 그리고 착각하지 마. 미카엘이 말한 것 아니니까. 우리 같은 암살 전문 길드도 정보가 늦으면 망하는 법이야.”
하기야, 이 녀석도 이종족 노예상을 칠 때 함께 있었지. 미카엘이 마린족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어도 다니엘이 마린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물빛 머리와 눈동자라고 하면 당연히 마린족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요즘 자꾸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내. 약혼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환영족이 파르미온 왕국 어디에 숨어들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꾸미는지. 파르미온에서 환영족과 연관되어 있는지도.”
“말을 참 쉽게 해. 그게 어려운 일이라니까.”
“너 능력 되잖아.”
“타국이라니까 타국! 제국 내에서 움직이는 것하고 같은 줄 알아? 거기다 왕궁 내는 더 힘들다고. 그나저나 약혼이 없던 일로 될 수 있다니, 네 희망 사항이냐?”
“닥쳐.”
“이 녀석은 툭하면 닥치래. 그럼 환영족을 찾아도 보고 없이 닥쳐 주면 되는 거냐?”
인상을 찌푸린 레안드로가 책상에서 내려와 책상을 짚으며 말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참 별나게 하는군. 너희는 다른 암살 집단하고 다르잖아.”
“빌어먹을 주인 같으니라고! 내가 괜히 너하고 엮여서는.”
“나를 지켜 주고 내 손발이 되겠다고 한 것은 너다.”
“그래서 후회 중이다. 지켜 줄 필요 없는 괴물 녀석을 지켜 주겠다고 했던 내가 멍청한 거지, 내가.”
카시스가 나른한 미소를 짓자 레안드로는 한 번 더 욕을 내뱉고는 나가려고 했다.
“실력 있는 녀석을 저택으로 하나 보내.”
“미카엘로 부족하냐? 아, 미카엘이 대공저에 집사 일을 해서 그러냐? 난 그 녀석을 집사로 쓰라고 보낸 것이 아닌데 말이야.”
“집사가 아니라 보좌관.”
“말이 보좌관이지 하는 일은 집사잖아. 집사장으로 있는 것도 맞고.”
카시스는 레안드로가 내뱉은 말을 정정해 줬지만 집사장 일도 겸하고 있기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데려온 손님에게도 호위 기사를 붙여 주기는 하겠지만 만약을 위해서 비밀 호위로 붙여 주려고.”
그의 말에 레안드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네가 잊은 것 같은데 우리가 다른 암살 길드와 달라도 암살 전문이다. 호위 전문이 아니라.”
“잊지 않았으니까 보내라고.”
“예, 그러죠. 누구 분부라고 거역하겠습니까.”
레안드로는 단념한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들어왔던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문으로 다니라니까, 습성은 어쩔 수 없군.”
카시스는 의자에 등을 깊게 묻고는 눈을 감았다.
레안드로가 리더로 있는 암살 집단, 셰도우. 그들은 다른 암살자 집단과는 달랐다. 다른 암살자 집단이 여기저기서 돈을 많이 주는 상대의 의뢰를 받아 암살을 한다면, 레안드로가 속한 암살 집단 셰도우는 자신이 정한 주인 한 사람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그가 다녔던 아카데미는 귀족과 평민도 입학이 가능한 아카데미였다. 평민이라도 능력이 되고 실력이 되면 누구라도 입학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귀족들은 평민보다 특별하고 월등하다는 우월감에 살아간다. 그러니 아카데미에서 평민 학생들은 그저 귀족들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레안드로 또한 그 희생양 중 하나였다. 아니, 희생양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다. 반항도 하지 않으니 도와줄 마음도 생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괴롭힘당하는 것이 언제나 제 눈에 띄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귀족이라는 것만 빼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매번 평민들과 힘없는 귀족들에게 횡포를 부리지. 도와줄까, 카시스?’
‘뭐 하러 도와줍니까. 귀찮게.’
그때는 형님과 저만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아우님은 귀찮은 것이 많아서 어떻게 사나 몰라. 숨 쉬는 것도 귀찮을 것 아니야. 나는 말이야.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을 괴롭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들이 제일 싫어.’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처맞고 있는 녀석들을 보는 것이 더 열받고 싫습니다. 그런 녀석들은 도와줄 마음도 안 생깁니다.’
‘냉정도 하셔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귀족에게 반항하면 어찌 되는지 아니까.’
잘 알고 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더 두들겨 맞거나 의외에 모습에 잠시 물러났다가도 다시 돌아와 괴롭히고 패기 일쑤니까.
하지만 상대가 귀족이라고 작은 몸부림도 안 치고 무언가를 바꿔 보려는 마음조차 없는 녀석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저렇게 맞는 것이 당연한 듯이 가만히 있는 것이 카시스를 더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본인이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않는데 도와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저는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정의감이 넘치지도 않고 귀찮은 일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카시스, 너는 도와주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 싫은 것뿐이잖아.’
‘·······.’
‘내 말 틀려?’
틀리지 않다. 저는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 싫을 뿐이다.
‘눈 마주쳐 버렸네. 눈이 마주쳤는데도 도와줄 마음이 안 들어?’
‘마음에 안 들어.’
‘카시스.’
우연히 마주친 시선을 무시하고 발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카시스는 킬리언의 부름의 멈춰 섰다.
‘너도 네 편 정도는 만들어라. 네 세력을 만들어서 키워. 그리고 너 자신을 지켜. 나를 지킬 생각하지 말고.’
‘황태자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력을 키우라니.’
‘너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그러다 죽는 수가 있습니다, 제 손에.’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아우님. 그리고 잊지 마라. 너는 에펜하르트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받았다는 것을. 그것이 내 어머니의 심기를 더 크게 건드렸지만. 너무 귀찮아하지 말고 바닥에 있는 녀석도 끌어올려 봐. 또 아냐? 저 녀석이 진짜 네게 목숨을 바칠 녀석들 중 한 명이 될지. 어차피 이곳에서 너와 내가 황족인 것을 아는 녀석들은 없어. 이사장과 호위 때문에 교사로 위장하고 있는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아, 쥐새끼는 제외. 그러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카시스는 멀어져 가는 킬리언의 뒤를 바라보다 창밖을 내다봤다.
저런 것조차 반항이야.
반항도 하지 않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녀석은 쓸모가 없어 뒤를 봐주기 귀찮기만 할 뿐이다. 카시스는 몸을 돌려 킬리언이 사라진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레안드로는 그저 상대하기 귀찮아서 맞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날 밤도 아카데미 안까지 암살자가 들어온 날이었다.
‘내 어머니이신 황후 폐하는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으신다니까. 성공하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밤손님을 보내고 말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자꾸 잊으시는 것 같아. 내가 없어도 이런 녀석들에게 당할 네가 아니지만. 열다섯에 소드마스터 실력에 가까운 아우님.’
‘형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보다 더 괴물 같은 분이.’
‘이봐, 카시스. 난 네게 괴물 같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너무하잖아.’
카시스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 내고 검집에 넣었다.
‘남말하듯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릴 적부터 마법 실력뿐 아니라 검술 실력도 뛰어나셨던 분이. 형님은 이미 소드마스터 경지에 올랐다 해도 무관하지 않습니까. 제국에서 형님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아무도 이기지 못할 거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더 이상 형님이 지켜 줄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언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자란 건지, 내 아우는.’
‘그게 같은 나이에 할 말입니까?’
‘너는 같은 나이에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부르잖아. 내 어머님께서 이제 그만 좀 하셨으면 좋겠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걸 동생이라고 낳지를 않나. 이미 에펜하르트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이어받은 네가 있는데도 그걸 빼앗아 그 녀석에게 주려고 하지를 않나. 조금만 더 했다가는 친자식인 나까지 죽이려 드시겠어. 대체 어디서 그런 녀석을 만들어 낳으셨는지.’
‘형님은 칼립스······. 정말 폐하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장담하십니까.’
‘그 아이는 폐하의 핏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 어머니가 낳은 것은 맞지만 뭐랄까, 그 녀석을 보면 가끔 섬뜩한 기분이 들어. 너하고는 달라.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게 섞여 있는 기분이랄까. 내 어머니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여기서 그만두셨으면 좋겠어. 내 손으로 어머니를 베는 패륜만은 저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그때 형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단지 그렇게 말하는 형님의 모습이 씁쓸해 보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