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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8화 (18/100)
  • 18화

    피곤하다. 말이 약혼이지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는 아는 걸까.

    정말 제가 대공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공주, 공주는 어째서 내가 공주와 약혼으로 엮이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고 계십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고?

    “그럼 무엇이 중요하다는 겁니까?”

    “제가 대공 전하를 좋아한다는 거요. 그리고 제가 대공비가 될 거라는 거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공주. 공주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나, 공주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공주를 좋아하지도, 공주를 마음에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제가 대공 전하를 좋아하고 대공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될 테니까요.”

    자신만만하군. 볼모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하아-. 폐하께서는 왜 이런 골치 아픈 것을 내게 붙여 줘서는.

    파르미온 국왕이 애지중지 키웠다고는 하지만 정말 저희에게 순순히 협력할까? 국왕 또한 공주와 같이 헛바람을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주가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으니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약혼자라고는 하지만 나는 공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바라는 내 마음은 얻지 못할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상관없어요. 함께 하다 보면 없던 마음도 생기겠지요.”

    없던 마음이 생긴다라.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는 공주와 생각이 다릅니다.”

    “전하께서도 저와 생각이 같아지실 거예요. 저만큼 전하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공주의 생각을 내게 관철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 내가 말해도 듣지 아니할 것 같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계속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파질 것 같군.

    “들어가십시오.”

    카시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타 출발했다.

    처음부터 그는 원하지 않은 약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알아낼 것을 알아내고 서로에게 볼일이 끝나면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는 약혼 관계였다.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고 귀찮게만 안 하면 좋겠는데.”

    카시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인가······.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군.”

    그나저나 각인이라. 강제로 없애려 하면 양쪽 다 아니면 한쪽이 죽거나 미친다고 했지. 이걸 해결하는 것도 큰 문제겠군. 마린족 왕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지만, 제게 이 각인을 만들어 놓은 상대가 돌아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도 원하지 않은 약혼을 하게 되었으니까. 원하지도 않은 상대와 강제로 혼인시키려 하면 저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다. 하지만 가출한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주이니, 그쪽에서도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서 데려가려 할 테지.

    이복형인 황제에게는 저를 구한 마린족이 왕족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는 그녀를 이용하려고 데리고 와서 저택에 들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용당하게 할 생각은 없다.

    “폐하께서 나중에 아시면 숨겼다고 화내시겠군.”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이니까. 저는 그때까지 보호하며 이 각인이라는 것을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카시스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부지런히 움직여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마중 나온 사용인들을 지나쳐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다니엘과 집사장 미카엘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미카엘, 저택에 데려온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함부로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입단속시켜라. 그리고 클로에에게 그녀의 시중을 들라 해라.”

    그의 말에 미카엘의 눈이 슬쩍 커졌다.

    “예, 알겠습니다.”

    미카엘은 카시스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서 집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카시스가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레안에게 좀 오라고 연락해.”

    “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미카엘은 허리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니엘이 카시스를 보며 물었다.

    “클로에 영애라면? 로체스터 남작가의 영애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알기로 그녀는…….”

    “윌리엄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하지. 그래서 공짜로 보호해 주고 있는데 그 정도는 해 줘도 되지 않나?”

    “화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 화내 봤자 뭘 할 수 있다고? 그 녀석은 내게 아무 짓도 못해.”

    제게 화를 내 봤자. 손해 보는 건 그 녀석이다.

    카시스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다니엘, 네 입으로 공주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 정도면 대접받기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시녀 하나 없이 움직이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나.”

    분명 공주라고 했다. 인간들이 황족이나 영주가 나라나 지역 이름을 사용하듯 마린족도 그런다고 했다. 아틀란이라는 성은 오로지 왕족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라고. 그러니 이종족이라고 할지라도 왕족에게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네의 동족 아닌가.”

    “감사합니다, 전하.”

    “해결해야 할 것도 있고.”

    “각인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각인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린족 왕에게 물으면 안 되는 것인가?”

    “공주님의 말대로 죽이려 들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죽어도 각인은 없어집니다. 게다가 마린족은 인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지라면 모를까, 바다라면 아무리 강한 대공 전하라도 싸우기 힘들다. 더군다나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불리한 정도가 아니라 승산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죽음의 바다에 사는 마녀를 찾아가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그 마녀가 만든 기억을 지우는 약은 기억을 지워 강제로 각인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위험하다. 마녀의 주술로 각인을 강제로 끊을 수 있다는 말이 책에 적혀 있었지만······ 전부 한쪽이나 양쪽이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지 죽음의 바다의 검은 마녀의 손을 빌리는 건 안 될 말이었다.

    마린족 공주님이나 전하 그 어느 쪽도 위험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야 해.

    “윌리엄 경에게 실력 있는 호위를 붙이라고 해야겠어. 언제까지고 저택 안에만 가둬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다니엘이 카시스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제가 전하겠습니다.”

    “어중이떠중이 말고 실력이 있는 녀석들로.”

    “예, 전하.”

    다니엘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그의 집무실을 나갔다. 다니엘이 나가고 서류를 훑어보며 싸인을 하던 카시스의 손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쪽에 있는 테라스 문이 덜컹 열렸다.

    “문으로는 못 들어오나? 레안드로 제노스.”

    “테라스 문도 문은 문이잖아. 그리고 나 아직 안 들어갔어, 주인님.”

    “내가 그 호칭 집어치우라고 했을 텐데.”

    카시스는 의자를 돌려 앉으며 손에 든 깃펜을 테라스 쪽으로 집어 던졌다. 하지만 상대방은 자신에게 날아온 깃펜을 손으로 잡아냈다.

    “나를 죽일 생각이야?”

    “엄살은.”

    “엄살로 들려? 보통 사람이 던져도 잘못 맞으면 다쳐. 그런데 네가 던지면 아무리 이런 하찮은 깃펜의 펜촉이라도 살인 무기가 되는 거 모르냐? 카시스, 난 지금 네게 살해당할 뻔한 거다.”

    “안 죽었잖아. 거기다 막을 실력도 충분히 있고.”

    “그건 네가 나를 죽이려는 것이 진심이 아니기 때문에 막을 수 있는 거다. 네가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들면 나도 못 막아. 부른 이유나 말해.”

    “제국의 황자이면서 대공인 내게 반말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정말이지 셰도우라는 녀석들은 무서울 게 없는 녀석들이야. 황족에게 반말이나 해 대고 말이야.”

    카시스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지만 레안이라는 남자는 하루 이틀도 아니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그래? 무서운 것이 없다고. 무서운 거 있거든. 너! 우리를 박살 낸 녀석이 너라는 거 잊었냐?”

    “친구라 그나마 봐준 거다.”

    “친구? 친구라고?”

    친구라서 봐줬다는 말을 아주 잘도 하는군. 길드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는.

    레안드로는 입가를 씰룩이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제국의 황자라는 녀석이 느닷없이 쳐들어와서 전부 반죽음 만들어 놓은 주제에 말은 잘해. 내가 그때 아지트에 도착해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레안드로가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와락 구겼다.

    카시스는 안으로 들어와 건방지게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은 레안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책상에 팔을 올려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히고는 나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네가 있는 데를 말하라니까 죽일 기세로 달려드니 정당방위로 패 준 거다. 죽이지는 않았잖아.”

    “그래,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아니 아주 개 패듯 패서 반죽음을 만들어 놨지.”

    정말 죽지 않고 숨만 쉬고 있을 정도로.

    카시스가 레안드로 제노스를 처음 본 것은 아카데미 구석에서 귀족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당방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아주 반 죽여 놓았으면서.”

    “나는 네가 있는 곳을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먼저 덤벼든 건 그들이었어. 그러니 나도 대응해 준 것인데, 그것이 정당방위가 아니면 뭐가 정당방위라는 거지.”

    “아니, 그렇다고 그 녀석들을 그렇게······.”

    “그 이야기는 됐고. 어떻게 됐어?”

    “뭐가?”

    레안드로가 되묻자 카시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가? 라고.

    “‘뭐가’? 지금 내게 되물은 건가?”

    카시스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면서 되묻자 레안드로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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