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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7화 (17/100)
  • 17화

    “네가 그 각인으로 파르미온의 공주의 약혼을 깰 생각인 것 같으니 내 하나 충고하마. 그 마린족 여인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말아라. 너도 알다시피 세간에서는 이종족과의 결합을 좋게 보지 않아.”

    “폐하.”

    킬리언의 말에 황후가 그를 불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 없습니다.”

    아무리 그녀가 제 생명의 은인이라 할지라도 그뿐이다. 그 이상의 마음은 없고 가질 생각도 없다.

    “자신하지 말아라.”

    “저는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녀를 저택에 들인 것은 각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니엘과 같은 종족을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이유뿐이다. 다른 이유 따위는 없고 자신이 그녀를 마음에 품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거라. 네 걱정을 많이 한 황태후 폐하와 로에나를 만나고 가는 것을 잊지 말고.”

    “예. 알고 있습니다.”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집무실을 나와 곧바로 황태후가 있는 장미궁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황태후가 정원에 로에나 황녀와 함께 있다는 말에 곧바로 정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의 어머니 황태후와 누이 로에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라버니!”

    카시스를 제일 먼저 발견한 그와 같은 은발 머리의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세요. 몸은 괜찮으세요? 어마마마하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걱정을 끼쳤구나.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정신을 잃었었다면서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요?”

    로에나는 그런 일을 겪고도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카시스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어서 오세요, 대공.”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황태후 폐하.”

    “무사하니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조심하세요.”

    역시나······, 나를 걱정하셨을 리가 없지.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으신 분이니.

    저를 걱정했다면 저리 담담하실 리가 없다.

    “예. 한데, 파르미온 공주도 함께 계셨군요.”

    카시스의 시선이 로에나와 황태후를 지나쳐, 그 옆에 있는 크레타에게로 향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시고 함께 오고 싶었는데 약혼자로서 그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닙니다. 간호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한데, 공주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예?”

    카시스가 무심한 말투로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묻자 로에나가 나서서 말았다.

    “왜 오다니요? 오라버니야말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오라버니의 약혼녀가 어마마마와 저를 만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듣자 하니 공주가 오라버니를 구했다고 하던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뭐라고?”

    확실히 독이 있는 오로치의 꼬리를 맞으며 바다에 빠졌을 때 다니엘을 믿고 의식을 놓아 버리기는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가 제 곁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다니엘이 저를 구한 것이 아니라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가 저를 구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갑옷 안의 기사복 단추에 걸려 있었다는 목걸이와 물빛 머리카락을 본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공주는 헤엄을 못 친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나를 어찌 구한단 말입니까.”

    “예?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전하께서 잘못 들으신 거예요.”

    “공주의 시녀가 그렇게 공주께서는 헤엄을 치지 못하신다 소리쳤다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까.”

    낯빛이 하얗게 질린 크레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잘못 들은 거예요.”

    “그 말을 들은 것이 한 명이 아닙니다. 지금 공주는 내 보좌관과 기사단장이 거짓을 말한다 하시는 겁니까?”

    “······.”

    크레타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잘못 들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도 크레타는 카시스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 합니까.”

    “······.”

    “공주.”

    카시스는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도 크레타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이가 싫소. 그리고 내 수하들을 거짓을 말하는 이로 만들지 마시오.”

    “거짓말이라고요? 크레타 공주가 오라버니를 구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 나를 구해 준 사람은 따로 있다.”

    카시스는 크레타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옆에서 묻는 로에나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

    “정말 거짓이었나요? 크레타 공주. 감히 제국의 황태후와 황녀인 저를 속인 건가요?”

    “·······.”

    “대답해 보세요. 파르미온의 공주.”

    크레타에서 파르미온의 공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 그것이.”

    “제국의 황족을 기만한 건가요?”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이에요. 파르미온의 공주.”

    “화, 황녀 전하.”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는 생각 못 한 크레타가 당황하며 괜히 제 드레스 자락만 힘주어 움켜잡았다.

    칼리스토 대공을 구한 것은 자신이다. 모두가 그렇게 믿어야 했고 대공 또한 그리 여겨야 했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크레타는 안 되겠다 싶어 황태후를 돌아봤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나는 잘못한 것 없어.

    “공주.”

    “예······ 예, 황태후 폐하.”

    “공주도 부러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리 믿고 싶은데 아니 되겠습니까.”

    “예, 아닙니다. 황태후 폐하.”

    “어마마마.”

    인자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황태후의 모습에 로에나가 그녀를 불렀다.

    “황녀, 윗사람이라면 아랫사람의 잘못을 한 번쯤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대공.”

    “·······.”

    “대공의 수하들도 한 번쯤 잘못을 할 것이고, 대공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아니라면 한 번쯤은 용서해 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를 해 주세요. 이 어미 앞에서 일국의 공주를 망신을 주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아직 대공보다 한참 어리지 않습니까. 황녀와 같은 나이이니 철이 없다 생각하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자, 이리 앉으세요. 대공, 언제까지 서 있을 생각입니까.”

    “화, 황태후 마마.”

    “왜 그러나요? 공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태후에게 뭐라 반박하려던 크레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칼리스토 대공의 나이가 스물넷. 제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칼리스토 대공보다 어리다 할지라도 고작 다섯 살 차이였다. 황태후는 그런 저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참자. 내가 대공비가 될 때까지. 대공비가 되면 대공령으로 가, 더 이상 황태후를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만날 일이 생겨도 핑계를 만들어 피하면 되는 거야.

    “같은 실수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공주.”

    황태후는 크레타를 향해 말하고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마마마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로에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태후의 말에 수긍했다.

    “식사하고 갈 건가요? 대공.”

    “아닙니다. 집에 손님이 와 있어서 돌아가 봐야 합니다. 황태후 폐하와 로에나가 걱정했다기에 무탈한 모습을 보이러 들린 겁니다.”

    대공저에 손님이 와 있다는 말에 황태후와 로에나 황녀가 놀란 듯 카시스를 바라봤다.

    “대공저에 손님이 와 있다고요? 정말로?”

    “그래.”

    “누군데요?”

    로에나가 손님이라 대공저에 와 있다는 말에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너는 말해도 모른다.”

    “제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어마마마 들으셨어요? 오라버니께서 저택에 낯선 이를 들였대요.”

    로에나는 정말 놀란 목소리로 믿기냐는 듯이 황태후를 보며 물었다.

    “정말 놀랍군요. 대공이 낯선 이를 저택에 들이다니, 아는 이도 잘 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대공이 말입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겠죠. 손님이 와 있다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돌아가 보세요.”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추고는 정원을 벗어났다. 마차가 있는 곳에 도착한 카시스는 바로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붙잡는 크레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스토 대공 전하.”

    “무슨 일입니까?”

    카시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저는 전하의 약혼녀예요.”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해 부러 따라온 겁니까?”

    이렇게 따라와 말하지 않아도 저뿐만이 아니라 플루투스 제국민과 파르미온 왕국 사람이라면 플루투스의 2황자이자 칼리스토 대공과 파르미온 왕국의 공주가 약혼할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한데, 전하께서는 제게 여전히 차가우시네요.”

    “제가 공주의 약혼자이기는 하나 살갑게 대할 정도로 좋은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필요에 의한 사이일 뿐, 저는 원래 이런 성격입니다.”

    “저는 전하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줄곧 좋아했고요.”

    크레타는 제국에 가 보고 싶어서 사신단에 숨어들어 플루투스 제국에 와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날 카시스를 보며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그때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드시 저 사람과 혼인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약혼 상대가 꿈에 그리던 플루투스 제국의 2황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말 기뻤다.

    “서로 원하지 않아서 하게 된 약혼은 언제고 깨질 수 있습니다.”

    “아니요, 약혼은 깨지지 않아요. 저는 제가 원해서 전하와 약혼한 거니까요.”

    “하아-. 아직 정식으로 약혼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간에는 이미 약혼한 것처럼 소문이 나 있지만 아직 약혼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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