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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6화 (16/100)
  • 16화

    자신과 마주 앉은 아우의 말에 킬리언은 혀를 찼다.

    “그렇게도 오기 싫더냐? 황태후 폐하와 누이가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도 말이다.”

    “그리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외상은 없었지. 독이 있다는 오로치의 꼬리에 당해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독이 있는 오로치의 꼬리를 맞고 바다에 빠졌는데 한참 동안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는지 아느냐는 말이었다.

    “걱정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송구한 줄 알면 너 자신을 더 아껴라. 칼리스타에서는 급히 돌아오느라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분명 너 혼자 마물과 싸웠겠지. 안 봐도 다 안다, 이 녀석아.”

    “대공령에 바다가 포함되어 있어도 발을 디딜 곳이 없으면 싸우기 힘든 곳이 바다다. 배가 먼저 가루가 됐으면 어쩔 뻔했어.”

    “그 전에 끝낼 생각이었습니다.”

    “쯧. 기사들이 있으면 뭐 하나,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오로치는 바다에서도 재앙급 마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것이 칼리스타 앞바다에 나타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저도 그런 거대한 뱀은 처음 봤습니다. 비늘이 단단해 검을 그냥 튕겨 냈습니다.”

    카시스는 오로치의 껍질에 검이 닿았을 때 단단한 합금속과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마검사가 아니었다면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왜 갑자기 그런 재앙급 마물이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물에 대한 것은 대책을 세워야겠어. 잠잠하다가 또다시 극성을 부리는 것 같으니. 그런데 내 아우님은 약혼녀 될 공주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군.”

    황제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카시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무심해서야. 아무리 싫더라도 지금은 네 약혼녀나 마찬가지니 관심 좀 가지거라. 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아느냐.”

    “송구합니다.”

    “황태후 폐하와 로에나를 만나 보고 가거라. 이미 네가 입궁한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니.”

    황제가 자리를 뜨는 것을 허락했음에도 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

    “카시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너답지 않게 뜸 들이지 말고.”

    “······폐하. 찾았습니다.”

    “무엇을?”

    난데없이 찾았다는 말에 무엇을 찾았다는 것인지 알지 못해 황제가 되물었다.

    “저를 구해 준 마린족을 말입니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공저에서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칼리스타로 돌아갈 때도 함께 데려가려 합니다.”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잠깐, 칼리스타로 돌아갈 때도 데려간다고 했느냐?”

    “예, 지금으로서는 바다로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안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억지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기사들을 시켜서 데려다줘도 돌아가는 척하다가 다시 나올지도 모르고 위험해질 수 있으니 잠시 자신이 보호하고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각인이라는 것도 해결해야 하니까.

    “별일이구나. 내가 다니엘 경도 있으니 마린족 하나 더 는다고 달라지지 않느냐고 했을 때는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본인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그것이······ 하아-!”

    그녀가 마린족의 공주라는 것은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각인에 대해서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일지 카시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일이기에 내 앞에서 한숨인 게냐.”

    “폐하, 제국의 달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카시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할 때, 문밖에서 황후 폐하께서 오셨다고 고하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킬리언은 시종장의 목소리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후를 들라 하게.”

    문이 열리며 백금발의 여인이 들어왔다.

    “빛과 어둠의 수호룡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제국의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빛과 어둠의 수호룡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오랜만에 뵙네요, 칼리스토 대공.”

    황후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스가 예를 갖추었다. 이를 본 황후는 눈을 휘며 웃었다. 황제는 황후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황제에게 다가간 그녀는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저번에는 영지까지 직접 오셨는데 얼굴도 비추지 않고 배웅도 못 해 드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후후. 아니에요. 막 깨어난 분께 예를 갖추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방해가 된 건가요? 대공이 들었다 하여 이제 어떤지 보려고 온 것인데.”

    “이제 괜찮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정말 이 녀석만 보러 온 건가?”

    “그럼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황제는 제 옆에 앉은 황후의 등 뒤로 한 발을 소파 등받이에 올렸다. 그러고는 몸을 그녀가 앉은 방향을 향해 살짝 틀어, 다리를 꼬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 황후는 참 너무하는군.”

    그러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폐하, 칼리스토 대공이 보는 앞입니다.”

    “카시스, 네 앞에서 짐이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보기 싫은가?”

    그 말을 들은 카시스의 미간이 좁혀지며 눈썹 끝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폐하.”

    “꼴 보기 싫으면 혼인을 할 테니.”

    “폐하.”

    황후의 표정이 굳든지 말든지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아, 소신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의 애정 행각을 보러 입궁한 것이 아닙니다.”

    황후가 황제를 타박하듯 다시 불렀지만, 카시스는 황제 부부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쯧!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더 할 말이 있던 것이 아니냐? 네 집 안에 들인 새로운 마린족에 대해서.”

    “마린족이면······.”

    “그렇소, 황후. 이 녀석 집에 있는 다니엘과 같은 종족이오.”

    “한데, 무슨 문제가 있, 대공.”

    묻던 황후는 놀란 듯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더니 카시스를 불렀다.

    “예.”

    “이마에 그건 뭔가요?”

    말을 하던 황후의 호박색 눈동자가 끔뻑 눈꺼풀 속으로 숨었다 드러났다. 그녀의 말에 황제가 ‘이마에 뭐?’하고 봤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닌 황후 폐하께는 못 당하겠습니다.”

    설마, 지금은 드러나지 않은 각인까지 보일 줄이야.

    “황후. 대체 카시스 이마에 무엇이 있다 그러시오.”

    “폐하, 안 그래도 약혼을 뒤로 미루는 것뿐이 아니라 파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하지도 않은 약혼을 파해 달라고? 분명 제국에서 약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데려온 것 아니었나. 혼인할 여인이 생긴 것이냐? 내 네게 혼인할 사람이 생기면 그때는 파혼할 수 있게 해 주겠다 했다. 네가 원하지 않은 약혼을 억지로 시킨 책임이 있으니. 그러니 말해 보거라.”

    “아닙니다.”

    절대로 제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럼 파혼을 입에 담은 연유가 무엇이냐.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도 있는데.”

    “······.”

    그 해결 못한 일이란 환영족의 잔당을 잡는 일이었다. 정말 파르미온 왕국에 숨어든 것이라면 제가 함부로 들어가 휘젓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파르미온 공주와의 형식적인 약혼으로 목줄을 채워, 그들에게 협력하라고 압박하는 일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해. 말을 해야 나도 어떻게든 결론을 내리고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냐.”

    “······.”

    “카시스.”

    카시스가 대답을 하지 않자 킬리언은 제 아우의 이름을 불렀다.

    “황후가 네 이마에 보인다는 것 때문이냐.”

    하지만 카시스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아니, 좀 늦게 대답이 들려왔다.

    “······예, 맞습니다.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각인이라고 하더군요.”

    “각인?”

    “예, 마린족은 혼인하기 전 언약식을 하는데. 언약의 입맞춤을 하면 각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마린족은 각인된 상대와 혼인을 한답니다.”

    “카시스······. 너, 나 몰래 언제 그런 것을 한 것이냐?”

    “안 했습니다!”

    저가 언약식 같은 것을 했을 리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제 이마에 이상한 문양이 생기는 것을 알았으니까. 황당한 것은 저를 구해 줬던 그 마린족도 각인이라는 것이 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고?”

    “지금 대공저에 있습니다.”

    “설마, 너를 구했다는 그 마린족이더냐.”

    “예. 각인을 푸는 방법을 알 때까지 제가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카시스는 각인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했다. 지금으로서는 각인을 풀어낼 방법이 없다는 것과 강제로 각인을 끊으면 생길 위험까지 전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황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 이후로도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해서 그 마린족 아가씨와 혼인이라도 할 생각이냐? 네 책임이 아니니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을 테고, 너는 어찌하고 싶은 것이냐.”

    “혼인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제가 보호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지금 당장 파혼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파르미온 왕국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환영족 잔당을 잡는 데 도움을 주고 파르미온 왕국에서 누군가 협력한다면 정보를 주고 협조한다는 조건이었는데.”

    “송구합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하나, 지금 바로 약혼을 없던 일로 하는 건 곤란하다.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어차피 네가 원한 것이 아니었으니. 여차하면 그냥 쓸어버리면 된다 할지라도 일단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니 말이다. 짐도 방법을 찾아볼 테니, 너는 너무 개의치 말거라. 내 어미를 내 손으로 폐위시키고 사형대에 올린 나다. 동복아우도 죽인 내가, 파르미온 왕국이 반기를 든다고 눈 하나 깜짝할 성싶더냐. 하지만 네가 걱정이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카시스는 킬리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없어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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