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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5화 (15/100)
  • 15화

    깊은 바다 속 아틀란. 아슐레이가 왕좌에 앉아 팔걸이를 힘주어 잡고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직도 거부하시는 겁니까. 이제 편안히 받아들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반항하면 힘들어지십니다.”

    콰드득! 빠각!

    “이런, 손이 상하지 않습니까.”

    바이칼은 아슐레이가 앉아 있는 왕좌로 다가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살살 쓸었다. 그러곤 빠진 손톱 쪽으로 손을 옮겨 지그시 누르자 아슐레이가 ‘윽!’하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만 모든 것을 잊고 변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정신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딸을 붙잡아 오면 당신을 편히 쉬게 해 드리겠습니다. 왕비 마마도 참 안되지 않았습니까? 공주를 배 속에 품고 있을 때부터 왕인 당신이 왕비와 공주를 대신해 저주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바이칼 악시온의 입에선 아슐레이를 비웃는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왕께서 숨겨서 일이 더 커진 것이지요. 그러게 왕비님과 아기에게 갈 저주를 왜 왕께서 막아서 대신 받으십니까. 그 저주 덕분에 아틀란의 왕인 당신을 제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으니 기분은 좋군요.”

    “······세, 레스······. 아, 일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정신으로 부인과 딸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자, 이제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온전히 제 꼭두각시가 되어 딸을 잡아다 바치면 편하게 쉬게 해 드리죠. 이제부터 아틀란이 우리 악시온가의 것입니다.”

    바이칼 악시온은 기분 나쁠 정도로 시커먼 액체를 아슐레이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냥 입을 벌리시지요.”

    아슐레이가 입을 벌리지 않자 바이칼은 그의 턱을 잡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해, 검은 액체를 그의 입에 쏟아부었다. 그런데도 아슐레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초점이 없고 탁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을 한 아슐레이는 뭔가에 몸이 단단히 묶인 듯 움직이지 못하고 손에만 힘을 주었다. 그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 가지 못한 검은 액체는 입가 주변으로 흘러내렸고 바이칼 악시온은 그 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이제부터 아틀란의 왕은 나다, 크하하하-!!”

    아슐레이의 집무실 안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수도 플란트에 들어선 지도 이틀째. 대공저로 돌아온 칼리스토 대공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웬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를 데려온 칼리스토 대공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 모시라는 말만 남기고 대공저를 나갔다.

    대공저의 고용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데려온 적이 없는 주인이었다. 아니, 다니엘 이후로는 외부인을 단 한 번도 데려온 적이 없던 자신들의 주인이 남자도 아닌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대로 다시 나갔다. 그러니 설명은 다니엘의 몫이었다.

    대공저 안에도 다니엘이 마린족이라는 사실과 그의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바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니 주인이 데려온 여인의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보고 다니엘과 같다는 것을 눈치껏 알아차리는 자들도 있었다.

    다니엘이 그간의 일들을 고용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사이, 아일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예요?”

    아일라는 제 앞에 놓인 음식을 가리켰다.

    “그것은 칠면조를 구워 양념장을 뿌려 놓은 것이랍니다.”

    “칠면조?”

    “새의 한 종류랍니다.”

    “인간들-.”

    “아가씨.”

    “인간-.”

    “아가씨!”

    아일라는 몇 번이나 자신의 말을 자르며 들려오는 낯선 호칭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는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때, 다니엘이 또다시 낯선 호칭을 소리쳐 부르자 아일라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나한테 아가씨라고 한 거예요?”

    “예, 지금부터 아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나를 아가씨라고 부른다고? 내가 공주인 거 알지 않나? 난 단 한 번도 아가씨라고 불려 본 적이 없는데.

    “제가 있을 테니 나가들 보십시오.”

    “하지만, 다니엘 경.”

    “나가들 보세요. 식사하는 법은 제가 알려 드려도 되는 겁니다.”

    다니엘의 갑작스런 축객령에 고용인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단호한 축객령이 떨어지자, 식당 안에 있던 고용인들은 썰물 빠지듯 식당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고용인이 나가자 한숨을 내쉬며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음식들은 아가씨께 많이 낯설 겁니다. 하지만 말은 조금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이요?”

    “앞으로 인간들이, 인간들은 같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하지 말라고요?”

    아일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예, 아가씨의 정체는 비밀입니다. 대공저 안에 제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집사나 시녀장, 그리고 몇 안 되는 인원뿐이죠. 기사들은 많이 알고 있지만 고용인들은 입이 무거운 몇 명 이외에는 모릅니다.”

    “나는 아직도 왜 숨기고 숨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전하께 들었습니다.”

    뭘?

    “이동 감옥, 아니 ‘우리’라고 하는 것이 맞겠죠. 엘프가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위험한 자들이라는 생각에 도망치다 전하와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이동 감옥? 우리? 그와 만나기 전 예쁘장한 사람들이 갇혀 있던 그거 말하는 건가.

    “맞아요.”

    “그들은 이종족 노예 상인들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이종족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 버리죠. 그리고 노예는 사람 취급도 못 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자들이 많습니다. 돈이 되면 뭐든지 하는 그런 자들이요. 아가씨께서는 모르겠지만 이종족들에게 사람만큼 위험한 존재들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예,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인간 세상에서 지내면서 봐 온 사람들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아가씨께 말을 조심하고 마린족이라는 것을 숨기라고 하는 겁니다.”

    아일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며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질수록 더 욕심을 냅니다. 그리고 한번 손에 쥔 권력과 권세를 놓기 싫어 더 욕심을 내고 놓지 않으려 속이고 빼앗고 하죠. 아틀란에서는 그런 걸 보지 못하셨습니까?”

    다니엘의 말을 들은 순간 아일라의 머릿속에 바이칼과 그의 아들 슈레더가 떠올랐다.

    권력······. 나를 이용해서 왕위에 오르고 나를 쫓아내려던, 아니 어쩌면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는 언약식 예정자였던 슈레더 악시온. 그에게서 이미 추악함을 보았다.

    “정말 없었습니까?”

    “······아니요. 있었어요.”

    “그렇게 보면 저희나 인간들이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넓은 땅에 퍼져서 살고 있죠. 어디에 위험한 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아틀란과 다른 점입니다.”

    그렇게 위험한가. 내가 구해 주고 나를 구해 준 그 사람만 봐서는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

    “각인부터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찾지 못하면 아틀란으로 가서라도.”

    “난 가지 않아요. 여기서 방법을 찾을 거고 내 반려는 내가 찾을 거예요. 난 인간들 사이에서 반려를 찾을 거니까.”

    “공주님은 위험한 발언을 하는군요. 왕과 왕비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이종족이듯 우리들에게도 인간들은 이종족이고 마린족은 대개 인간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어족이 그러듯.

    “인간들 중에서, 두 분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정하면 돼요. 그럼 허락해 주실 거예요.”

    하지만 어쩐지 점점 자신이 없어진 탓에 아일라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종족이 다르다고 반려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인간과 뭐가 다르죠. 우리는 인간과 똑같이 생겼잖아요. 우리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만 빼면 다를 게 없다고요.”

    아일라가 생각하기에 자신들과 인간들은 똑같이 생겼다.

    “물을 조종하는 건 왜 빼 놓습니까? 그리고 물빛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지닌 것은 마린족밖에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공주님뿐일 겁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럼 당신은 나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거야? 사람들과 오래 살았으면서? 대체 왜.

    “인간 세상은 공주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헛된 희망과 꿈, 망상은 버리십시오.”

    헛된 희망이라고? 꿈이고 망상이라고?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말. 대체 왜들 그렇게 말하는 거지? 대화를 하면 얼마든지 우호적으로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허황된 꿈일 뿐인 걸까.

    아일라는 고개를 푹 떨궜다.

    “식사 하십시오.”

    “안 먹을래요. 먹기 싫어졌어요.”

    “정말 드시지 않으실 겁니까?”

    “안 먹어요.”

    정말 입맛이 없어졌어.

    “그럼 방을 안내해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쉬고 계시다 혹시라도 배고프시면 말하십시오. 식사를 방으로 올려 드리라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식당 문을 열고 하녀를 하나 부른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일라는 하녀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며 자신이 생각이 정말 틀린 것인지 생각했다.

    * * *

    플루투스 황성 황제 집무실 앞, 두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마법진을 이용하면 편하게 올 것을.”

    “그렇게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동 마법진으로 움직이면 한 번에 편하게 올 수 있었지만 카시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도로 오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을 뿐이다. 칼리스타로 돌아갈 때면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이용하겠지만 올 때라면 말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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