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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4화 (14/100)
  • 14화

    마린족은 태어날 때부터 물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 그런데 물을 제대로 조종 못하는 마린족의 왕족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 침울해하지 마십시오. 그대에게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진짜 이유는 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요?”

    “당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섭니다.”

    내 정체를 숨긴다고? 어째서? 내가 마린족이라는 것을 숨길 이유가 필요한 건가? 아까부터 계속 위험하다고만 하고.

    “폐하께 그대에 대한 말은 할 겁니다. 하나, 그대가 마린족의 공주라는 건 밝히지 않을 생각입니다.”

    “폐하라면······.”

    “마린족에게는 왕이나 마찬가지요.”

    “그런데 전부 말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그래도 되나요?”

    “·······그것이 그대를 보호하기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카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의 형님이라고 할지라도 마린족의 공주를 지키려면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정말 모르겠어. 왜지? 왜 믿으면 안 되고 전부 말하지 않고 숨기라고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다니엘까지 합류하고 열흘이 되는 날, 그들은 플루투스 제국의 수도 플란트에 들어서는 외곽 성문 앞 검문소에 도착했다. 칼리스토 대공의 영지인 칼리스타에서 플란트의 거리는 늦어도 닷새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칼리스타에서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면 간단했지만 서둘러 수도로 갈 생각이 없어서 말을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예상치 못하게 아일라를 만나게 되었고 다니엘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시간을 지체한 데다, 아일라가 힘들 것을 계산해 이동 속도를 조금 늦춘 결과였다.

    “칼리스토 대공 전하, 통과하셔도 됩니다.”

    “와-! 높다! 인간들 성은 이렇게 다 높아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전하.”

    카시스와 기사들을 통과시키려던 기사가 일행을 불러 세웠다. 갑자기 망토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성벽을 보며 감탄하는 낯선 물빛 머리의 여자 때문이었다.

    “하아-!”

    카시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가씨는 누굽니까?”

    기사의 말에 아일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작게 입을 벌려 ‘나?’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기사를 한 번 보고는 제 뒤에 있는 카시스를 돌아봤다.

    “신분패를 가지고 계십니까?”

    “내게 말하는 건가요?”

    “예.”

    “그게 뭔데? 먹는 건가?”

    아일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슬쩍 돌려 제 뒤에 앉아 있는 카시스를 힐끗 바라봤다.

    “신분패는 아가씨의 신분을 나타내는 패이며 통행증이나 마찬가지며 신분패가 없으면······.”

    아까부터 신분패니 통행증이니 뭐야 대체.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아일라가 사람들이 이동할 때 신분패나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카시스가 망토로 아일라를 가렸다. 하지만 그녀가 꼼지락거리자, 팔에 힘을 줘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데려왔는데 확인할 필요가 있나?”

    “하오나 전하, 절차상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감히 나를 막겠다는 것인가?”

    “전하는 통과하셔도 되지만 그 여인은 안 됩니다.”

    “하아-, 한두 번 오가는 것도 아닌데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지금 내가 데려온 여인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전하, 절차가 그러-.”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내가 네놈이 말한 그 절차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나.”

    스르릉-!

    카시스가 검을 빼들어 기사의 목에 겨누었다. 그러자 윌리엄과 다니엘이 놀라서 그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전하.”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말귀를 못 알아듣지.”

    다니엘이 카시스를 불렀지만, 그는 검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네는 처음 보는 기사군. 신입인가?”

    카시스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는지 윌리엄이 얼어붙은 기사를 향해 물었다.

    “예, 예······.”

    “대공 전하인 것을 알았음에도 별것도 아닌 것으로 붙잡다니 그 용기에 경의를 표하네. 하나, 목숨은 하나인데 아껴야 하지 않겠나.”

    “하오나 절차가······.”

    “감히 전하께서 데려온 여인을 의심하다니, 자네는 목숨이 여러 개인가? 뭐 하고 서 있나. 자네 선임이나 상관을 오라 하게. 당장!”

    덜덜 떨며 말하는 기사의 말을 자른 윌리엄이 소리쳤다. 그러자 기사는 상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기사가 자리에서 떠난 지 십여 분이 조금 지나자 기사 서너 명이 달려와 카시스에게 허리를 숙였다.

    “자네, 대체 기사들 관리를 어찌 하는 겐가? 교육 똑바로 못 시키나! 절차 좋지. 하나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할 것 아닌가!”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후작 각하.”

    윌리엄이 호통을 치자 제일 앞에 나와 있는 기사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 뒤에 기사 둘이 카시스의 앞을 막은 기사의 머리를 힘으로 누른 채 함께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뭐 이 정도에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겠느냐만은, 황족을 막은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앞에서 건방지게 절차를 운운하며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이는 황족을 모욕하는 것과도 같았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라.”

    “전하, 한 번은 봐 주십시오.”

    “전하, 저희 신입이 몰라서 범한 무례입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니엘의 말에 신입 기사를 힘으로 누르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한 번은 넘어가 주지만 두 번은 없다. 황족의 앞을 가로막고 입을 함부로 놀리면 어찌 되는지 확실히 알려 주거라. 황족을 가로막아도 되는 경우는 폐하의 명이 내려졌을 때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으니 이 또한 확실히 알려 주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그 자리에서 목 위에 달린 그 쓸모없는 것이 분리될 테니.”

    황족을 목숨을 걸고 막을 수 있을 때는 황제의 명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딱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바로 황족이 반역을 일으키거나 연루되었을 때 또는 반역이 일어났을 때. 카시스는 지금 그 경우를 말한 것이었다.

    “전하, 폐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알고 있다. 그만 출발하지.”

    카시스가 말을 출발시키자 다니엘과 윌리엄에 이어 기사들이 검문소를 지나쳐 플란트로 진입했다.

    “전하, 폐하께서도 알게 되실 겁니다.”

    윌리엄의 카시스의 뒤쪽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상관없다.”

    “하기야, 폐하께서는 전하께 관대하시죠.”

    “윌리엄 경, 그 기사가 전하께 무례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네. 하나, 전하의 망토 속에 있는 아가씨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면 일이 커지지 않겠나. 더군다나 저 아가씨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네.”

    다니엘의 말처럼 검문소 기사의 무례는 사실이지만, 신분이 불분명한 여인을 칼리스토 대공이 감싸고 들어왔다는 말이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의 적대 세력의 귀에 들어가면 일이 커진다.

    “그것도 문제기는 하군요.”

    “그 아가씨는 어쩌실 겁니까?”

    다니엘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윌리엄이 카시스에게 물었다.

    “우선은 대공저로 간다.”

    “예? 대공저 말입니까? 황궁으로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윌리엄이 대공저로 먼저 간다는 말에 움찔하고는 되물었다.

    “황궁에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나. 기사들도 두고 나 혼자 입궁할 것이다.”

    아일라가 망토 밖으로 쏙 얼굴을 내밀자 다시 망토 안으로 밀어 넣은 카시스가 말했다.

    “망토 안에 가만히 계시오.”

    하지만 들은 척도 않고 다시 망토 밖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그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답답해요. 구경도 하고 싶고요.”

    “구경은 다음에 하십시오.”

    “왜요?”

    “묻지 말고 지금은 가만히 있으십시오.”

    카시스가 팔을 돌리자 망토가 펄럭이며 다시 한번 아일라를 감싸자 그녀의 모습이 망토 안으로 다시금 사라졌다.

    하지만 망토가 아일라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 주지는 못했다. 아일라가 그 틈으로 계속 빼꼼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대공의 앞에 자그마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자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까지 비비며 힐끔거렸다. 하지만 카시스가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자 금세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각인 때문에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지만 이 호기심 많은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눈에 띄면 안 되는 여인이 자꾸만 호기심에 밖을 궁금해하니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칼리스타 성에 데려다 놓고 올 것을 그랬나? 아니다. 호기심 왕성한 마린족 공주님은 제가 없을 때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 옆에 두는 것이 더 안전했다.

    “전하,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으실 겁니까?”

    윌리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말할 것이다. 하나, 보일 필요는 없으니 대공저에 데려다 놓고 가겠다는 말이다. 내가 황궁에 다녀와도 될 일이니까.”

    그가 혼자 보고하면 될 일을 아일라까지 데려가서 위험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황궁은 위험한 곳이고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은 곳이다. 아무리 입막음을 해도 깨진 바가지처럼 아일라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론가 새어 나가고야 말 것이다.

    황제 폐하라면 마법으로 시야도 소리도 차단할 수 있지만, 드나들 때 마주치거나 말을 섞는 것까지 제한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그것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속도를 올리지. 이 상태로면 이튿날이 되어도 대공저에 도착하기는 틀렸으니.”

    카시스가 말의 속도를 올리자 망토 속에서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카시스를 따라 기사들도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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