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악시온······, 왜 그 이름이 낯설지가 않지.
‘꼬마야, 바깥세상에 흥미가 있어 보이는구나.’
‘네, 흥미가 있어요.’
‘그럼 물 위 바깥세상에 나가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버지께 혼이 날 거예요.’
‘내가 네 부모님에게 잘 이야기해 주마. 너는 바깥세상이 궁금한 것이 아니냐. 물 밖 세상은 신기한 것이 많단다.’
‘그런가요?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악시온이라고 한단다.’
이 기억은 뭐지? 어릴 적의 기억인가?
악시온······, 악시온······. 왜 잊고 있었을까. 어릴 적 제가 바깥세상에 흥미를 가지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를 부추긴 사람도 있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붙잡고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에 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인을 없앨 다른 방법은?”
잠시 딴생각을 하던 다니엘은 카시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없습니다. 전하, 제가 말한 방법이 제일 안전한 방법입니다.”
“제일 안전하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 아닌가?”
“······.”
“다니엘.”
다니엘이 대답이 없자 카시스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너무 위험합니다.”
“누구에게?”
“두 분 모두에게입니다.”
강제로 각인을 끊으려 한다면 양쪽 다가 아니면 한쪽이 죽거나 미쳐 버린다. 서로의 동의하에 약을 사용해서 한쪽이나 양쪽 모두의 기억을 지운다면 각인을 끊을 수 있지만, 그 또한 위험하고 강제로 각인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결과가 생길 확률이 높다. 만약에 죽거나 미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약을 만드는 자는 위험한 금지 구역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께 수없이 듣기도 했다.
검은 바다 또는 죽음의 바다라고 불리는 곳에 사는 마녀 페트라.
“꼭 이 각인이라는 것이 된 사람과 혼인해야 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곤란하군.”
“예, 곤란합니다. 전하께서는 약혼녀까지 계시니까요.”
“하아-, 내가 원한 약혼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파혼 선언을 쉽게 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지. 그렇다고 강제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카시스가 아일라를 힐끗 보며 말하자 아일라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폐하께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골치 아프군. 하아-.”
제 이복형인 황제에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네가 원하지 않은 약혼이니 내 여기서 이 황좌를 걸고 약속 하나 하지.’
‘제정신입니까? 황좌를 아무렇게 걸지 마십시오.’
‘너니까 하는 말이야. 네가 환영족이 파르미온 왕국에 숨어 있는지, 또는 파르미온 왕국이 제국의 대해 불손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해도 좋다.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파혼에 힘을 써 주도록 하지.’
사랑이라-. 자신이 그런 걸 정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저는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어진다.
‘원하지도 않은 혼인이라······. 원하지도 않은 약혼을 하게 된 내 처지와 똑같군.’
이 각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지 않아도 나도 저 마린족 공주라는 여자도 원하지 않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원하지도 않은 혼약을 두 번씩이나 하기 싫은 것은 마찬가질 테니. 뭔가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리고, 한동안 데리고 있는 것이 낫겠지. 보호라는 명목으로.
“다니엘. 이 각인이라는 것을 위험하지 않은 방법으로 없앨 수 있는지 따로 알아봐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각인을 없앨 방법을 찾을 때까지 제가 보호해 주겠습니다.”
또 귀찮은 것을 떠맡아 버린 기분이지만 각인이라는 것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마린족 아가씨를 마냥 혼자 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
“당신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마린족에게 인간 세상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는 것으로 하십시오.”
카시스가 아일라의 말을 가로채 잘라 냈다.
“물 밖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맞습니까?”
“맞아요, 물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바닷가 주위만 맴돌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말은 타 본 적이 없겠군요. 우선은 식사부터 하는 것으로 하지요.”
“제가 이리로 가져오겠습니다. 기사들이 이미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카시스의 말에 다니엘이 뒤돌아 동굴 입구로 향했다.
“공주라고 했습니까?”
“네, 그래요.”
“내가 주의해야 할 것을 몇 가지 알려 주겠습니다. 첫째,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아무나 믿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제가 함께 가자고 했어도 거절 정도는 하십시오. 당신을 도와주는 저 또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엥? 이게 무슨 말이지? 자기가 나를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믿지는 말라고?
“당신이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도망칠 생각도 안 하고 여태껏 가만히 있는 겁니까?”
카시스는 심각한 얼굴로 또다시 아일라의 말을 잘라 냈다.
“이틀 동안 제게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건 그대를 속이기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습니까?”
‘그런가?’
아일라는 옆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느낌 전혀 안 들었는데. 나는 이래 봬도 감이 꽤 좋다고.
“둘째로 이제부터는 절대로 단독 행동은 안 됩니다. 호위를 붙여 줄 테니 반드시 데리고 다니십시오. 인간 세상은 당신 같은 이종족에게는 위험합니다.”
“혼자 다닐 수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위험하다고 하네.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는 것일까?
아버지와 어머니도 위험하다고만 했었지.
“조금만 구슬리면 위험한 자인지도 모르고 잘 따라갈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요!? 지금 말 다 했어요?”
카시스의 이어지는 말에 아일라는 발끈해 소리쳤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셋째, 당분간은 내 허락을 받고 외출해야 할 겁니다.”
“잠시만요. 지금 저를 가둬 두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가둬 둘 생각은 없습니다. 지켜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당신은 사람들 눈에 많이 띌 겁니다. 그 머리와 눈동자색. 마린족을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전부가 모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는 위험한 자들이 더 많고요. 그러니 말하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그대를 찾는데 시간이 걸리고 지켜 줄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당신이 살던 곳과 다르니 멋대로 행동할 거면 당장 돌아가십시오.”
“나도 마린족이에요. 그것도 공주라고요. 위험해지면 물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모면할 수 있어요.”
아일라는 ‘물만 있으면.’이라고 덧붙여 작게 중얼거렸다. 표적에게 제대로 날아가다 도중에 휘어 엉뚱한 데로 도달하는 게 문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제어가 잘 안 돼서 속상했다.
“나도 내 몸은 지킬 수 있다고요. 아마도?”
“그 끝에 아마도는 뭡니까?”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아마도, 라고 한다.
카시스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갔다.
“······.”
“마침 비도 오니까 보여 줄게요.”
아일라는 카시스의 물음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뭔가 꺼림직한 느낌을 받았지만 아일라의 뒤를 따라갔다.
아일라는 동굴 입구에 고인 물웅덩이로 손을 뻗자 물 덩어리가 떠올랐다.
“내가 저 나무를 맞춰 볼 테니 잘 봐요.”
이번에 잘할 수 있을 거야. 맞출 수 있어. 표적을 제대로 보고 집중해서……!
아일라는 왼쪽 어깨 위쪽으로 오른손을 오므렸다가 힘 있게 팔을 뻗으며 손바닥을 물 덩어리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물 덩어리가 물줄기가 되어 그녀가 가리켰던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좋아, 이번에는 잘 날-. 어?
아일라가 나무를 향해 쏜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휘었다. 그리고,
“으아악!”
히이잉-!
기사 한 명이 그것을 재빠르게 피하자 그 뒤에 있던 기사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을 맞고 날아가 말 앞에 떨어졌다. 그러자 말이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갈래로 갈라진 물줄기 중 하나가 아일라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카시스는 순식간에 검을 뽑아 그 물줄기를 내리그어 막아 냈다.
아이씨-, 또야. 왜 나만 조종이 잘 안 되는 거람?
“하-, 그 아마도의 의미가 이겁니까?”
“그, 그게-.”
아일라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져 눈을 피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일라는 분명 나무를 맞추려고 했다. 게다가 처음엔 표적으로 정확하게 날아갔다. 표적에 닿기도 전에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방향을 바꾸고 말았지만.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제 통제를 벗어나 버린다.
“넷째, 앞으로 그 힘을 절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왜요?”
“지금 ‘왜요?’라고 했습니까?”
카시스의 한쪽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지금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대가 힘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크게 다칠 것 같습니다.”
“연습 많이 하면 잘 될 거예요.”
“그동안 연습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결과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 말은 연습을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로 알아들어도 되겠습니까?”
아일라는 할 말이 없었다. 이래서 바이칼 악시온이 제 아들과 저를 혼인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 상태로라면 자신과 혼인한 반려에게 모든 권한이 넘어가 왕권을 마음대로 휘둘릴 수 있었다.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걸고 넘어지며 왕권을 빼앗으려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