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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2화 (12/100)
  • 12화

    “제 아버지가 왕이고 어머니가 왕비님이시기는 하죠.”

    아일라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카시스의 미간은 단박에 찌푸려졌다.

    한마디로 공주가 맞는다는 말이었다.

    “하-, 왕족이라는 말이군. 그럼 공주님이 가출을 했다는 말인데.”

    “아틀란에서 난리가 났겠군요.”

    “역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군. 골치 아파지기 전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족이······ 공주가 가출을 하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어요!”

    아니,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 돌려보낸다 만다야. 나는 절대로 이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야.

    카시스와 다니엘의 대화를 들은 그녀가 소리쳤다.

    “제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지낼 곳도 없으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구해 줬으니까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저도 그대를 한 번 구해 줬으니, 그것으로 목숨 빚진 것은 없는 것이라고 저도 말했던 것 같습니다만.”

    카시스의 말에 아일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면 정말 강제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라. 바닷가에서 이들이 떠나고 다시 나오면 되겠지만 만일 아틀란에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꼼짝없이 다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싫어! 절대로 싫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해. 악시온 가문은 왕좌만 손에 넣으면 나를 죽일지 몰라.

    아일라가 주먹을 바르쥐고 소리치자 이마에 각인이 나타나 옅은 빛을 냈다. 그와 동시에 카시스의 이마에도 아일라의 이마에 나타난 각인과 같은 각인이 나타나 빛을 내기 시작했다.

    카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다니엘이 아일라와 카시스의 이마에 나타난 각인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가요?”

    “각인 말입니다.”

    응? 각인?

    “아앗!? 당신 이마에 그거!”

    다니엘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던 아일라는 카시스의 이마의 나타난 각인을 보고는 놀라서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한 발짝 물러난 아일라가 카시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신 이마에 그거! 그거 뭐예요?!”

    “이것 당신이 나를 구해 주고 나서 생긴 겁니다. 지금 다니엘이 말한 그 각인이란 것이겠죠. 지금 당신의 이마에도 내 것과 같은 물방울 문양이 나타나 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같으면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아일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손으로 이마를 더듬었다. 그렇다고 각인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눈동자까지 위로 올려 뜨자 자신의 이마에서 빛이 나는 것이 보일락 말락 했다.

    아일라는 포기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다니엘이 자신의 손에 모여든 물로 수경을 만들어 아일라에게 직접 확인하라는 듯 내밀었다.

    “이게 뭐야!!? 왜 각인이 생긴 거야? 나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각인이 생길 리가 없다. 하아-, 설마 자신한테 각인이 생긴 것을 모르고 있을 줄이야.

    다니엘은 아일라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자 이마를 짚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 무슨 짓인가 했나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정신을 잃고 있던 것은 저이니 무슨 일을 당했다면 당신이 아니라 제쪽이 아니겠습니까.”

    카시스가 ‘저는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말입니다.’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언약의 입맞춤을 하지 않았으니까. 언약의 입맞춤은 언약식 때 바다의 신 제단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공주님.”

    흐음, 내가 공주라는 걸 믿는 거야?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이마에 각인이 문제야. 그리고 내가 도와줬던 은발 머리 남자, 저 사람 이마에 마린족 왕족에게만 나타나는 문양의 각인이 생겼다는 것은-. 역시 나인가? 하지만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데.

    “아!”

    “생각난 겁니까?”

    “이거요!”

    아일라는 품을 뒤지다가 주머니 하나를 열어 그 안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고 가리켰다. 그 안에는 작은 진주알같이 생긴 것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건-.”

    “은혼단이에요. 그때 은혼단을 먹이려고 했는데 삼키지 못하기에 입으로······.”

    아일라는 얼굴이 붉어져 시선을 피하고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때인가? 하지만 그건 언약의 입맞춤이 아니었다. 바다 신의 제단 앞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각인이 생길 수 있는 건데. 설마, 어머니도 내게 각인이 생긴 것을 알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셨던 걸까?

    “입으로 먹이신 겁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그게 언약의 입맞춤도 아니고······.”

    바다의 신 제단에서 한 것도 아닌데 왜 각인이 된 거야?

    “하지만 전하와 공주님이 각인됐다면 그 이유밖에 없겠군요.”

    “이건 말이 안 된다고요. 그건 진짜 언약의 입맞춤이 아닌데. 왜 각인이 생기냐고요.”

    아일라는 카시스와 다니엘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다니엘, 저번에도 그렇고 그 각인이 대체 뭐기에 그렇게 심각한 거지.”

    “전하, 그것이…….”

    다니엘은 말해도 되는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내 일이지 않나. 말하게.”

    다니엘은 카시스의 말에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전하, 저는 육지에서 오랫동안 갇혀 있었지만 마린족의 지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마린족은 자라면서 저절로 습득되는 지식과 책으로 얻는 지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인은 저희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어린 나이에 저절로 습득이 되는 지식 중 하납니다. 마린족에게 각인된 상대란 혼인을 해야 하는 상대입니다.”

    다니엘이 말이 이어질수록 카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해 갔다.

    “각인이 생기면 그걸로 끝입니다. 각인된 사람과 혼인하지 않으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하가 아니라 마린족이 말입니다. 각인은 언약식 때 언약의 입맞춤을 했을 때만 나타납니다. 이종족 간에 각인이 된 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 각인에 대해 적힌 서적에도 이종족과 각인이 되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인간에게 마린족이 이종족이듯 마린족에게도 인간은 이종족이다.

    “없었다고?”

    “예,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입맞춤이 아닌데도 각인되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일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다니엘을 바라봤다.

    저렇게 잘 알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마린족인건가? 마법이란 걸로 머리와 눈동자색을 바꿨다는 말이 사실인가?

    마린족이 아니고서야 각인에 대해서 알 리가 없으니 맞겠지, 라는 생각이 들지만 머리와 눈동자색을 보면 마린족이라는 것을 믿기 어렵단 말이야. 정말 마법이라는 걸로 저렇게 바꿀 수 있는 건가?

    다니엘이 마린족이 맞나 계속 의심하던 아일라는 각인에 대해 알고 있는 듯이 말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각인이라는 것을 없앨 방법은?”

    “아십니까?”

    카시스는 다니엘에게 물었건만 다니엘은 아일라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묻자 카시스의 시선도 자연스레 아일라에게로 향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하지만 아일라는 각인을 없앨 방법을 왜 자신에게 묻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왕족이지 않습니까? 어릴 적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서로 동의를 하면 왕족이 각인을 없애 줄 수 있다고. 왕족만이 각인을 거둘 수 있다고 있다고 적혀 있지만 당신도 왕족이니 알 것 아닙니까.”

    “저는 모르는데요.”

    왕족이 각인을 끊을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모른다고요?”

    아일라는 다니엘이 되묻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왕족만이 서로 동의하에 각인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돌아가셔서 왕께······.”

    “안 돌아간다니까요! 돌아갈 수 없어요. 강제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요.”

    돌아가서 왕께 여쭤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일라가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돌아갈지 않는다니까, 이 사람들이 정말!

    “어차피 공주님이 전하와 각인된 이상, 하기 싫다고 말하신 그 혼인 못합니다. 그러니 우선 각인을 끊고 나서…….”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인간이 내 각인자라는 것을 알면 아버지나 악시온가에서 내 각인자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상대가 죽으면 각인은 끊어지니까요.”

    각인자 중 한 명이 죽으면 각인은 저절로 끊어지게 되어 있어. 당신도 마린족이라면 알 것 아니야.

    “왕께서는 자비가 없으신 분이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왕께서는 마물에게만 자비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다니엘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가 단 한 번 만났던 왕을 떠올렸다.

    “예전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아버지는 변했어요. 아틀란의 경계를 맡고 지키는 앤드류가를 멀리하시려 하고 악시온가를 가까이 두시기 시작하면서 그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딸인 제 말도-.”

    아일라는 목이 메여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나를 슈레더 악시온과 강제로 각인시켜 혼인하게 만드실 생각이라고요.”

    “싫다고 말은 해 봤습니까?”

    “했어요. 하지만 제 말은 들어 주지 않아요. 매번 실패했는걸요. 그리고, 단 한 번도 제게 손찌검한 적 없었는데 손찌검까지 하시고.”

    저는 분명히 싫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슈레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듣기 싫다며 역정을 먼저 내셨다.

    아일라는 아슐레이에게 맞았던 왼쪽 뺨이 얼얼해지는 착각이 들어 손을 들어 뺨에 대었다.

    맞은 뺨이 아픈 것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다니엘이 악시온이라는 말에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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