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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11화 (11/100)
  • 11화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아일라가 어릴 때부터 들려준 이야기가 있지. 그래서 아일라는 언제나 인간과 내 이야기 속 인어족처럼 사랑을 하고 싶어 했어. 이야기는 언제나 행복한 결말이었지만 실은 그리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네. 타종족과의 사랑은 슬픈 일이야. 그래서 그이가 아일라의 반려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말에 반대하지 않았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전부 제 잘못이다.

    아일라에게 이야기해 준 인어 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세레스와 친했던 인어족 공주의 이야기였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이야기 속처럼 행복한 결말을 얻지는 못했다.

    인간 남자는 다른 여자와 혼인하고 그녀는 분노한 인어족 왕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인어족 공주인 그녀는 이미 인간의 아이를 품고 있는 상태였다.

    인어 공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았다. 하나, 인간처럼 두 발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는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바로 죽어 버렸다. 마린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반은 마린족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인어족과 마린족은 달랐다.

    그렇게 아이를 잃고 미쳐 버린 그녀는 몇 번의 자살 시도까지 했고, 결국 버림받고 추방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죽음의 바다에서 마녀가 되어 있었다.

    ‘너희가 감히 나를 쫓아내! 난 너를 용서하지 않아 세레스! 아슐레이 아틀란을 평생 저주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녀를 죽음의 바다로 쫓아낸 것이 바로 아슐레이와 자신이었다.

    페트라. 미쳐서 같은 동족을 죽이고 잡아먹은 마녀. 바다를 위험하게 만든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는 듯 스산한 미소를 짓는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피는 분명 살점이 뜯겨 나가 죽은 인어족의 피였다. 그녀의 손에 마린족도 상당한 피를 흘렸다.

    같은 바다를 공유하고 있지만 인간과 친하지 않듯이, 마린족과 인어족도 그리 친하지 않았다. 친했던 것은 자신과 페트라뿐.

    세레스는 페트라를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미쳐 버린 그녀에게는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마린족과 인어족에게 피해를 주는 페트라를 인어족의 왕과 합의해서 죽음의 바다로 쫓아냈다.

    그런 진실을 모르던 어린 딸은 어디서 들었는지 인어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었다. 자신은 어렸던 딸이 충격받고 무서워할 것 같아 행복한 결말로 이야기를 바꾸어 해 줬다.

    제가 해 준 이야기로 인해 아일라가 바깥세상으로 동경하고 인간과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동화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두렵다. 아일라가 페트라, 그녀와 같은 절차를 밟게 될 것 같아서.

    “아일라가 크면서 어릴 적 내가 들려준 이야기의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을 후회하네. 하나, 나는 내 딸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도 않네. 그러니 내게 먼저 알려 주게. 경은 수경을 만들 수 있으니 연락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테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멜로디도 자네와 아일라의 친구였지. 함께 가게.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세레스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정중히 예의를 갖춘 제이드가 먼저 자리를 떴다.

    내가 아일라가 빠져나갈 수 있게 틈을 만들어 준 것이 잘못일까. 제 아이가 원하지 않는 언약식을 강제로 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도와주기는 했지만,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페트라처럼 되는 것 또한 원하지 않는다.

    그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알아봐야겠어.

    세레스는 멀어지는 제이드에게서 등을 돌려 회장을 잠시 바라보다 제이드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물 위로 올라가던 제이드는 멈춰 서 뒤를 돌아봤다.

    “제이드.”

    “멜로디.”

    뒤에서 긴 생머리의 여인이 제 앞까지 헤엄쳐 다가왔다.

    “언제 출발한 거야?”

    “조금 전에.”

    “왕비님이 나하고 같이 가라고 했잖아.”

    “내가 너를 왜 계속 기다려야 하는데? 올 거면 알아서 따라오면 되잖아.”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멜로디가 고개를 돌려 작게 투덜거렸다.

    “안 올 거야?”

    “간다, 가!”

    어느새 자신보다 한참 올라가 있는 제이드의 독촉에 멜로디는 소리치고는 위로 헤엄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나를 인간들 땅에 발을 디디게 하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 찾기만 해 봐라. 공주님이고 뭐고 머리부터 한 대 쥐어박아 주고 말 테다.”

    제이드를 따라잡은 멜로디는 으득 이를 갈며 씹어 뱉듯 말하는 제이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카시스와 만난 지 이튿날 아침. 동굴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일라는 입구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대화 소리에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시끄럽네, 밖에 무슨 일 있나?

    “지금 가출이라고 하셨습니까?”

    카시스는 아일라가 그렇게 말했는데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다니엘을 쳐다봤다.

    “본인이 직접 그리 말했으니 가출한 것이 맞겠지.”

    “왜 강제로라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린족에게 인간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본인이 싫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돌려보내나. 강제로 돌려보낸다 할지라도 바닷가까지야. 돌아가는 척하고 우리가 떠났을 때 다시 나오면 어쩔 수 없네.”

    맞아. 나는 지금 당장 돌아갈 생각 없으니까.

    아일라는 동굴 입구에서부터 가까워지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구해 준 남자의 목소리에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럼 자네가 직접 데리고 돌아가 그들에게 신병을 넘겨줄 텐가.”

    직접 데리고 가서 내 신병을 넘겨준다고? 어떻게 인간은······ 아, 마린족이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 대화하는 쪽이 그 사람인가?

    “일어났군. 제가 말했던 마린족입니다.”

    “거짓말!”

    아일라는 그의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까?”

    “마린족인데 머리색과 눈동자색이 다르잖아요. 당신도 마린족이 전부 나와 같은 물빛의 머리와 눈동자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나와 같은 머리와 눈동자색이 아니에요.”

    마린족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물빛 머리와 눈동자가 아닌데 어떻게 마린족이야.

    “그건 말입니다. 마법으로 머리색과 눈동자색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마법?

    아일라가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후-’ 숨을 내쉰 남자는 손바닥이 위로 가게 하고 손가락을 조금 구부려 뭔가를 쥐고 있는 손 모양을 만들었다.

    “못 믿는 것 같으니 잘 보십시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일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남자의 손 위에 땅에 고이고 있는 물웅덩이에서 물줄기가 날아와 작은 구 모양의 물덩이를 만들어서였다.

    “이제 믿겠습니까. 마린족이라면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변형할 수 있죠.”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건 마린족 밖에 없기는 하지만······.

    아일라는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세상에 나와 살아 있는 마린족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럴 겁니다. 호기심에 물 위로 올라온 마린족은 대부분 죽었을 테니까요.”

    “다니엘의 말대로 머리와 눈동자색은 마법으로 바꾼 겁니다.”

    “다니엘?”

    “인간으로서의 제 이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이름이라고? 그럼 마린족으로서의 이름은 따로 있다는 건가?

    “저는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아가씨의 이름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도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요.”

    카시스가 다니엘의 말에 그때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하자 다니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직도 하지 않고 계셨습니까?”

    “바다로 돌려보낼 생각이었고 그럼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 할 필요가 없었지.”

    다니엘의 질책 어린 말에 카시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도 소개를 해야겠지. 나는 카시스 반 에펜하르트 플루투스 칼리스토라고 합니다. 당신 종족이 살고 있는 바다가 있는 칼리스타가 제 영지입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이오.”

    “아일라 아틀란이에요.”

    “지금 아틀란이라고 했습니까?”

    아틀란이라는 말에 다니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아주 문제가 많다. 아틀란이라는 성씨를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다니엘의 표정이 굳어지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다니엘이라고 했죠.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이름이라면 마린족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거죠? 마린족 이름이 뭐예요?”

    “마린족으로서의 이름은 버린 지 오래됐습니다.”

    “왜요?”

    아일라는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왜 마린족으로서의 이름을 버린 것인지.

    “저는 제 가족에게는 이미 죽은 사람일 테니까요.”

    어째서 죽은 사람이라는 거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그건 그렇고, 정말 당신이 아틀란입니까?”

    “그런데요.”

    아일라는 뒤늦게 놀란 듯 묻는 다니엘을 보며 눈을 껌뻑거리며 바라봤다.

    “왜 그러나.”

    다니엘의 심각한 표정에 카시스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께서는 제국의 이름을 성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어째서입니까?”

    “그 이유는 자네도 알고 있을 터인데. 그런 걸 갑자기 왜 묻나?”

    “저희 마린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틀란이란 성은 오로지 왕족이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아가씨가 아틀란의 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마린족의 왕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대, 왕족이었습니까?”

    카시스가 다니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는 아일라를 바라봤다. 제 앞에 있는 여인이 정말 마린족의 왕족이라면 다니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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