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다리와 발이 아팠지만 검을 든 남자가 다가오자 위기감을 느낀 아일라는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물, 물이 없어. 물이 없으면 힘을 사용할 수 없어.
“뭐 하고 있어, 붙잡아.”
“거기 서!”
서란다고 서는 바보가 어디 있어. 바다라면 헤엄치는 데는 자신 있으니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달리는 아일라의 이마에 각인이 다시 나타나 빛이 나고 있었다.
아일라는 도망치다 발을 헛디뎌 옆으로 굴렀다.
아파······ 나 잡히는 거야?
“드디어 잡았다, 이년!”
히이잉-!!
아일라의 뒤를 쫓던 남자가 검을 치켜들고 아일라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그녀의 바로 코앞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땅에 넘어진 채로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일라 앞에 아까 감옥 같은 것을 끌고 있던, 처음 보는 생물이 서 있었다.
“······.”
아일라는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올려다보며 손으로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가렸다.
얼굴이 안 보여.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이보시오. 그 계집을 이리 넘기시오.”
“지금 그 말, 내게 한 것인가?”
남자는 넘어져 있는 아일라를 내려다보다 검을 들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무심하게 물었다.
“그럼 당신 말고 또 있소?”
“이봐, 잡았어?”
검사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 올린 남자는 말 위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면서 맨땅에 철커덩거리는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때 아일라를 뒤쫓아 온 검사의 뒤에서 또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 한 명을 검을 지닌 자들이 쫓는 이유가 뭘까?”
그 남자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니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상관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댁이 뭔데!”
“전하! 전하!”
검사의 말은 남자의 뒤로 그를 부르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들로 인해서 막혔다.
“뭐, 뭐야? 기사잖아.”
“그런데 방금 전하라고 하지 않았냐?”
“제길 도망쳐! 칼리스토 대공이야! 지금 제국에서 전하라고 불리는 건 2황자인 칼리스토 대공밖에 없어!”
“이제야 알아보는군. 하지만 늦었어.”
카시스가 짙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일라의 뒤를 쫓아온 남자들이 도망치고 곧이어 기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전하, 갑자기 달려가면 어쩌십니까?”
“잘 따라왔으면 됐지 않나. 내가 누구에게 쉬이 당할 실력이던가. 쫓아. 뭐 하는 자들인지 알아내라.”
무슨 걱정이냐는 듯 말하는 그의 명에 윌리엄이 눈짓하자 기사들이 그 뒤를 쫓았다.
“괜찮습니까? ······물빛?”
기사들이 도망치는 자들을 쫓는 것을 바라보다 아일라에게 손을 내밀고 허리를 숙였던 카시스는 그때야 아일라의 머리와 눈동자 색을 보고는 흠칫했다.
“아앗-!! 당신, 그 오로치를 두 동강 냈던 그 사람!”
그제서야 카시스의 얼굴을 확인한 아일라도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카시스는 그것이 무슨 소린가 싶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오로치라는 말을 되새기고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오로치를 두 동강 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을 구한 이가 맞는 것 같았다. 저를 구하지 않았다면 모를 사실일 테니까.
“당신이군요, 나를 구했던 사람이. 다니엘이 메르바에 남아서 찾아볼 필요는 없었겠어. 윌리엄 경, 메르바로 사람을 보내 다니엘에게 연락하도록. 힘들게 더 찾을 필요 없이 이리로 오라고 전하게. 내 생명의 은인을 찾은 것 같다고.”
명령을 내리는 카시스를 올려다보던 아일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만 갸웃했다.
목숨을 구해 줬으니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를 건져 올린 곳에서 기다려 볼까 말까 한 것은 맞지만 저를 추적해 올 자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찾았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있어 나를 보지 못했을 텐데 찾았다고? 왜?
“나를 찾은 거예요? 왜요?”
“목숨을 빚졌으니 보답을 하고 바다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바다로 돌려보내? 내가 왜 가출했는데!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그를 올려다보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아일라가 벌떡 일어나더니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십시오!”
아일라가 도망치자 미간을 좁힌 카시스가 소리쳤다.
“꺄아!”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아일라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게 뭐야? 물속하고는 역시 달라. 해안가에서 걸을 때도 안 넘어졌는데, 왜 자꾸 넘어지는 거야.
“하-. 괜찮은 겁니까?”
하나도 안 괜찮아. 아파······. 창피하다고!
“일어날 수 있으면 일어나십시오.”
아일라는 뒤돌아 앉아 제게 손을 내밀고 있는 카시스의 손을 ‘탁!’ 쳐 내고는 나무뿌리에 걸렸던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어루만졌다.
나를 바다로 돌려보내겠다고? 절대로 안 돌아가. 돌아갈 수 없다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거기를 다시 돌아가.
“어디 좀 봅시다. 얼마나 다친 건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일라의 앞에 앉은 그는 그녀가 어루만지는 발목에 손을 가져갔다. 아일라가 만지지 말라고 그의 손을 쳐 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발목에서 풀어내고 발목을 살피더니 자신의 망토를 풀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꺄! 뭐,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 줘요!”
“가만히 계십시오. 떨어지면 다칩니다. 그리고, 그 발로 걷는 것은 무리니 말입니다.”
당황해서 소리치고 발버둥 치던 아일라가 카시스의 말에 얌전해졌다.
발목뿐 아니라 발바닥까지 쓰리고 아팠다.
“전하. 그 아가씨 머리색이······ 설마 그 아가씨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윌리엄 경.”
“내려 줘요!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 바다로 데려갈 생각이면 난 안 가요!”
안 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왜 그렇게 돌아가기 싫어하는 겁니까?”
카시스는 발버둥 치며 소리치는 아일라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당신들에게 바깥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나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는 그녀에게 전혀 해를 입힐 생각이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대에게 제일 안전한 곳은 그대의 집이 있는 바답니다.”
마린족에게 이 세상이 안전할 리가 없다. 다니엘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다니엘을 처음 만난 곳이 이종족 노예장 가장 깊숙한 곳이었으니까.
“그러니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나한테 바다로 돌아가라고?
싫어, 절대로 싫어!
“바다도 마물이 나타나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예요.”
“그대에게는 인간이 마물보다 더 위험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어째서냐고? 조금 전 도망쳤으면서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까 그 사람들한테서는 왜 도망친 겁니까?”
왜 도망친 거냐고? 그거야······. 감옥 같은 곳에 조금 다르게 생긴 사람이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괜히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그 사람들은 그냥 위험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귀가 뾰족한 굉장히 예쁜 사람이 감옥 같은 데 갇혀 있기도 했고요.”
아일라의 말을 들은 카시스의 미간이 꿈틀댔다. 그녀의 말 중 귀가 뾰족한 예쁜 사람이 갇혀 있다는 거슬리는 말이 들렸기 때문이다.
“사람 같지 않게 무지 예쁘고 귀가 뾰족했다는 말입니까?”
“한 이 정도로.”
아일라가 자신의 양쪽 귀로 손을 가져가 크기를 가늠하며 말하자 카시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엘프로군.”
아일라의 설명을 들은 카시스는 아일라가 본 것이 엘프라고 단정 지었다. 사람 같지 않게 예쁘고 귀가 그 정도로 뾰족한 종족이라면 엘프밖에 없다.
엘프? 그건 또 뭐지?
“아무리 처리를 해도 어디서 자꾸 나오는지. 윌리엄 경, 기사를 더 보내라. 불법적으로 이종족을 파는 노예상들이다. 잡아 와라. 반항하면 죽지 않을 정도로 제압해서 끌고 와도 좋다.”
엘프를 잡아 가두는 것은 이종족 노예 상인이거나 이종족을 노예 상인에게서 산 귀족들뿐이다. 어느 쪽이든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국 내에서 노예 거래는 금지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이종족일 경우에는 발각될 시 엄벌에 처해진다.
“아니, 자네가 직접 가.”
카시스의 서늘한 목소리에 윌리엄이 고개를 숙이고는 호위할 인원을 남겨 놓은 채 말에 올라타 기사들을 끌고 갔다.
아일라는 양발에 붕대를 감은 채 바위 위에 앉아 은색 갑옷을 입고 있는 카시스와 기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번에 상처가 있나 살펴보려고 벗기려다가 실패한 무겁고 벗기기 힘든, 바로 그것이었다.
저런 걸 대체 왜 입는 거지? 안 무거운가? 아니 벗을 수나 있는 거야? 인간들은 저걸 평생 입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보기만 해도 불편해 보여.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지금 제게 물어본 거예요?”
“빤히 보시기에.”
카시스의 물음에 아일라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렇게 티 났나? 내가 빤히 보기는 한 것 같지만.
“그게 뭐예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고 불편해 보이는데요.”
아일라는 제게 다가와 말을 건 카시스가 입고 있는 갑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갑옷입니다.”
“갑옷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저게 갑옷이라고? 인간들의 갑옷은 참 불편하게 생겼네.
아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린족도 물론 갑옷을 입는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마린족 병사들이나 아버지께서 입는 갑옷은 저렇게 무거운 느낌도 움직이기도 불편해 보이는 갑옷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