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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7화 (7/100)
  • 7화

    ‘나는 카시스 반 에펜하르트 플루투스 칼리스토다. 칼리스타 영지의 칼리스토 대공이며 플루투스 제국의 황족으로서 내 이름을 걸고 너를 이용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며 너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제국의 황제인 내 형님이라도 내가 막을 것이다. 다니엘.’

    다니엘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니엘은 카시스와 함께했다.

    “전하.”

    카시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옛 생각에서 벗어나 목소리가 들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는 돌아가신 건가?”

    “예.”

    “네가 찾아보거라. 찾으면 안전하게 보호해서 데려오고. 데려오면 그때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걸로 하지.”

    “예······ 죄송합니다.”

    “그것이 네가 내게 미안해할 일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이 다니엘이 찾아낼 마린족인지는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저를 구해 줬다면 보답이라도 해서 돌려보내면 될 일이다. 뭘 원할지는 모르지만.

    “전하.”

    “왜 그러지?”

    “이마에 그것…….”

    “이마?”

    카시스는 제 이마에 뭐가 있기에 다니엘이 딱딱하게 굳어서 저러는 건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제 이마에 희미한 빛을 내면서 나타난 처음 보는 문양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자신의 이마에 예전부터 이런 것이 나타났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각인·······.”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검사의 경지까지 오른 그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각인? 그게 뭐지?”

    “그것이······.”

    다니엘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말한 그 각인이라는 건가? 이 각인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

    “다니엘.”

    “죄송합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니엘은 카시스에게 더 쉬라고 하고는 방을 나갔다. 다니엘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 거울을 다시 봤을 때는 이마에서 옅은 빛을 내던 문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것이 뭐기에 다니엘이 답을 회피하고 나간 것일까.

    서둘러 방을 나온 다니엘은 긴 숨을 토해 내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대체 대공 전하 이마에 반려의 각인이 왜 나타나는 거지. 그것은 마린족이 언약식에서 입맞춤을 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설마 전하를 구한 마린족의 짓인가. 자신이 대공 전하에게 구해져 함께 지낸 것이 벌써 3년이다. 그동안 각인됐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분명 오로치와의 싸움 이후에 생긴 거다.

    “미치겠군. 빨리 찾아야겠어. 각인에 대한 서적이 인간 세상에 있을 리도 없고 큰일이야.”

    각인은 분명 바다의 신을 모시는 제단 앞에서 언약식을 치러야만 생기는 것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전하는 바다의 신 포르세우스를 모시는 제단 근처에 간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대체 어떻게 각인이 생긴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칼리스토 대공에게 각인이 생길 일이 없었다.

    지금은 각인이 제일 큰 문제이기는 했다. 각인되면 마린족은 반드시 그 각인자와 혼인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마린족은 반려를 정할 때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언약의 입맞춤을 하지 않는다.

    각인이 사라지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각인된 상대방이 죽었을 때, 그리고 서로 동의하에 각인을 거둘 때. 하지만 후자의 방법은 오직 왕족만이 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책에서 봤던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지우는 건 불법이었다. 그리고, 기억과 감정을 지우는 일이기에 위험 부담도 있었다.

    “기억이나 감정을 지우는 그 약을 구하는 곳이 문제지.”

    기억과 감정을 지우는 것은 서로 동의하지 않고 각인을 끊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어느 쪽의 동의도 없이 강제로 각인을 끊어 내는 방법. 방법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강제로 각인을 끊어 낼 시에는 각인자들 둘 다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죽거나 미쳐 버렸다. 어느 쪽이든지 최악이었다.

    “전하께 각인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없어 피하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어.”

    우선, 전하께 각인을 만든 마린족부터 찾아서 합의를 해야 해. 설마 자신이 각인되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다니엘은 아일라가 자신에게 각인이 생긴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불행히도 알지 못했다.

    * * *

    “되었다. 몸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여기서 더 쉴 수는 없다. 수도로 간다. 깨어나고 사흘 쉬었으면 충분하다.”

    깨어났을 때 몸이 무겁지도 않았고 심한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편히 쉬고 오라는 형님과 더 쉬라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다니엘 때문에 카시스는 일도 못 하고 수도로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카시스는 차라리 수도에 빨리 다녀오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니엘, 그대는 남아서 더 찾아볼 것인가?”

    “예,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합니다.”

    역시, 폐하 말씀대로 자신의 종족 일이라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겠지. 카시스 또한 다니엘의 동족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했기에 함께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시스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은 이종족에게 썩 좋은 세상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메르바 항구 마을이었다. 메르바 항구 마을과 칼리스타는 제 영지였다. 칼리스타 남쪽 외성 문의 바로 밖이 메르바 항구 마을이었고 칼리스타 삼면을 감싸고 있는 임페리얼 숲이나 바다까지도 그의 영지에 속했다.

    메르바에 있으면서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린족만이 지니고 있다는 물빛 머리색과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없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모를 테니 머리와 눈동자색은 그대로일 거다.’

    메르바 항구 마을은 그렇게 좁은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넓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메르바에서 사흘 동안 찾지 못했다는 것은 바다로 돌아갔거나 다른 곳으로 갔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수도로 가면서 주변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 메르바 말고 임페리얼 숲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

    메르바 항구를 제외하고는 삼면이 임페리얼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오히려 임페리얼 숲으로 갔을 확률이 높고.

    카시스는 제복 겉옷을 입고 옷매무새를 제대로 매만진 후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말을 달려 숲으로 향했다.

    메르바 항구 마을을 벗어나 수도로 향하는 숲에 들어선 지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그는 가슴이 술렁이는 이상한 느낌에 갑작스레 말을 빨리 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이마에 옅은 푸른빛의 각인이 빛나고 있었다.

    * * *

    누가 봐도 외출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얇은 어깨끈에 가볍게 하늘거리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맨발로 숲을 걷고 있었다. 바로 언약식이 싫어서 도망친, 아니 가출한 아일라 아틀란 그녀였다. 그녀는 바다에서 나온 후 사흘 내내 숲을 헤매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가야 사람들이 있는 걸까?”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건 처음인데. 누군가 지나가야 물어보기라도 하지. 다리 아파.

    아일라는 땅 위로 크고 둥글게 삐져나온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두드리다 주물렀다.

    꽤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사람이 사는 곳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보석도 가져오고 혹시 몰라서 은혼단도 잔뜩 챙겨 오길 잘했어.

    처음에는 자신을 구해 준 이가 저를 찾지 않을까 싶어서 바다에서 그를 건져다 놓은 곳에서 기다리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거기서 마냥 기다리다가는 내가 빠져나온 것이 들켜서 다시 아틀란으로 잡혀갈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러니 그곳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 아틀란으로 잡혀가면 정말 꼼짝없이 언약식에 혼인까지 해야 해. 절대로 싫어. 조금 쉬었으니까 다시 걸어 보자.

    아일라가 걸터앉아 있던 나무뿌리에서 내려와 다시 걷기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일라는 처음 듣는 낯선 소리에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 끝에 작은 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점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저게 뭐지? 숨는 게 나을까? 그래 일단 숨자.

    아무리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할지라도 부모님의 말씀도 있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수풀이 길게 자란 나무 뒤에 숨었다. 나무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녀의 시야에 처음 보는 생명체가 뭔가를 끌고 나타났다. 그 위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게 뭐지? 사람들은 저런 걸 타고 다니는구나.

    아일라는 신기한 듯 말이 끌고 있는 수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쇠창살 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마치 감옥 같잖아. 사람이 같은 사람을 가둔 건가? 왜? 죄인인가? 우리들도 죄인은 감옥에 가두기도 하니까.

    어? 그런데 마차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좀 다르게 생긴 것 같은데. 귀가 조금 뾰족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저 사람들한테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거기 누구냐?”

    아일라는 고개를 홱홱 좌우로 돌려보더니 설마 자신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는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을 작고 둥글게 말아 ‘나?’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누구냐고 했다.”

    나한테로 다가오고 있어. 역시 나를 말한 거야. 그런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들, 위험한 느낌이 들어.

    왜 위험한 느낌이 들었냐고 물으면 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붙잡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아일라는 열심히 도망쳤다. 하지만 달리는 것이 마음먹은 만큼 쉽지 않았다. 자꾸만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하고, 결국엔 진짜로 넘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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