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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5화 (5/100)
  • 5화

    처음에는 아버지도 제 말을 들어주고 슈레더와의 언약식을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시고 정신을 차리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슈레더와의 언약식을 진행할 것이라고 하셨다.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아버지께 제가 들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쓰러지고 난 후였다.

    아틀란의 경비를 책임지고 제일 신뢰하던 앤드류가의 말도 들어주지 않게 되었고, 슈레더의 아버지 바이칼 악시온의 말을 더 많이 들어주게 되었다.

    그래서 핑계도 대 보고 피하면서 겨우 언약식을 1년을 미루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모르겠어. 어머니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그런 거라고 하셨지만 단지 편찮으셔서 그런 것 같지 않아.

    “아버지······.”

    똑똑똑!

    “공주님, 왕께서 부르십니다.”

    밖에서 아버지가 그녀를 찾는다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부르신 거라면 방에서 나가도 되는 거지?

    “아버지 어디 계셔?”

    “집무실에 계십니다.”

    대답을 들은 아일라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니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아일라 온 것을 알렸고 얼마 뒤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아버지.”

    “이리 와 앉거라.”

    아일라는 다른 때와 변함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뒤로 가서 목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는 차갑게 아일라의 팔을 풀어냈다.

    “아버지····.”

    역시 아버지같지 않아.

    “앉으라고 했다.”

    “여보.”

    “당신이 너무 감싸 주니까 이리 천지 분간도 제대로 못하는 것 아니오.”

    “아버지······.”

    아일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역시 더 차가워졌다. 도대체 왜? 무엇이 아버지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보, 아슐레이.”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언약식 날짜가 잡혀서다. 더 이상 네 멋대로 구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아버지!”

    “여보. 아일라가 싫어하니까 다시 생각해 보자고······.”

    “언제까지 아일라의 막무가내를 받아 줄 거요!”

    아슐레이가 아일라의 말을 자르며 버럭 소리치자 세레스도 정말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당신······.”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소리쳤어. 이런 적은 없었는데.

    “전 싫어요. 슈레더와 언약식이라니, 싫다고요. 슈레더는 저를 이용해서 왕좌를 얻고 싶은 거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왜 제 말을 안 믿어 주시는 거예요? 어째서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건 단지 제가 슈레더와 혼인하기 싫어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듣기 싫다.”

    “아버지.”

    도대체 왜?

    아일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

    “아일라가 괜히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알아보고 신중하게…….”

    “떼쓰는 것을 받아 주는 것도 적당히 하시오.”

    “아버지는 변했어요. 어머니한테 소리치시고 제 말도 들어주시지도 않으시고.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절대로 슈레더와 언약식을 하지 않을 거예요!”

    언약식의 입맞춤으로 각인이 되고 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려. 각인이 되면 정말 혼인해야 하니까. 절대로 슈레더 악시온의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슈레더와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슈레더와 혼인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 거야!”

    파앗!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 아일라의 이마에 물방울 문양이 나타나며 빛이 났다.

    아일라의 이마에 빛이 나며 드러난 각인에 아슐레이와 세레스가 놀라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아슐레이가 일어나 아일라의 뺨을 때리자, 아일라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아일라는 자신이 맞은 것이 믿기지 않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손을 댔다. 놀란 마음에 눈물 어린 눈으로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슐레이를 올려다봤다.

    “레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아슐레이!!”

    “어, 어떻게······.”

    나, 나를 때렸어. 아무리 화가 나도 단 한 번도 손찌검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나를······ 나를 때렸어. 충격을 받은 아일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일라 괜찮니?”

    “아버지 미워요-!!”

    아일라는 목이 메여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소리치고는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아일라!”

    세레스가 아일라를 부르며 따라 나가려다가 뒤를 돌아 아슐레이를 바라봤다.

    “때릴 것까지는 없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우선 아일라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에, 레이!”

    아일라의 원망 섞인 목소리는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은 아슐레이로 인해서 끊겼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은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오······. 하아-! 내가 무슨 짓을······.”

    “레이······.”

    아슐레이가 딸을 때린 자신의 떨리는 손을 접었다 폈다 하다가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을 본 세레스는 그의 앞에 꿇어앉아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미안하오. 당신에게도 소리치고······. 내가 정신이 또 나갔었던 모양이오. 요즘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소.”

    “몸이 안 좋아서 예민해서 그런 걸 거예요. 아일라는 제가 달래 볼게요.”

    “미안하오, 세레스. 조금 쉬고 싶소.”

    “그래요. 저도 자리를 피해 줄 테니 쉬세요.”

    세레스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작년에 갑자기 쓰러지고 나서 자신의 남편이 변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쓰러진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쓰러진 직후 진료를 했지만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변해 가는 남편의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그녀는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슴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레스는 집무실 문을 닫은 채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아일라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레스마저 나간 조용한 적막감이 도는 집무실. 아슐레이는 제가 딸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에 마른세수를 했다.

    ‘하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일라에게 손을 대다니.’

    소파 팔걸이에 팔을 대고 머리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아슐레이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의 눈이 이상했다. 아슐레이의 눈은 초점이 없이 흐릿했으며 생기라고는 없이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아일라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소리 내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일라. 아일라, 이 문 좀 열어 보렴.”

    “흐윽! 싫어요, 혼자 있게 내버려 두세요.”

    “아일라,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꾸나.”

    계속되는 세레스의 설득에 흐느끼던 아일라가 일어나 문을 방문을 열었다.

    “세상에······ 얼굴이 이게 뭐람. 괜찮니?”

    딸의 얼굴을 감싼 세레스의 목소리와 손은 부드러웠다.

    “괜찮지 않아요. 아버지가 저를 때릴 줄 몰랐어요. 흑!”

    내게 단 한 번도 손찌검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어떻게 제게 이럴 수가 있어.

    “그래도 부모에게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니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란다, 아일라.”

    세레스는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엄하게 말했다.

    여태껏 손찌검 한 번 하지 않고 정말 소중하게 길렀다. 저도 속상해서 한 말이겠지만 부모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다. 아무리 소중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 혼나야 되는 일이다.

    “네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와 내 심정이 어떨 것 같니? 아무리 속상하고 화가 나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란다.”

    우는 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다잡고 세레스는 제법 엄한 목소리를 냈다.

    “네 아버지가 네게 손찌검을 하신 것에 대해서는 나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너는 이 어미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했어.”

    제 딸의 입에서는 죽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죄송해요. 아버지가 제 말을 안 들어 주시니까······.”

    “너를 혼내지 않았던 것이 이 어미의 마음을 이리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흐윽! 죄송해요.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요. 제가 정말 죄송해요. 흑!”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면 아니 된다. 알겠니?”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딸의 모습을 본 세레스는 아일라를 탁자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그 옆에 앉았다.

    “그래,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았다면 됐단다. 나중에 아버지께도 사과드리렴.”

    아일라가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면 마음을 다잡고 지금보다 더 엄하게 말하고 한 번도 내린 적 없는 벌을 내리려고 했다. 그래도 그냥 이대로 지나가면 안 되겠지.

    “너를 너무 버릇없이 기른 것은 내 잘못이니 이번에는 이 엄마도 크게 반성을 할 거란다. 그러니 너도 외출을 금지하고 자숙하며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구나. 앞으로 한 달간 아틀란을 벗어나면 안 될 거다.”

    아일라는 ‘그건 너무해요’하고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제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은 맞기에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고 아일라, 아버지도 네게 손을 댄 것을 후회하고 있을 거란다.”

    아일라를 달래며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세레스가 천천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일라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단다. 바깥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무 일 없었어요.”

    “정말 없었니? 잘 생각해 보렴. 혹시 언약의 입맞춤을 하지는 않았나.”

    “하지 않았어요. 제가 누구랑 언약의 입맞춤을 해요.”

    그것도 바다의 신 제단이 있는 곳도 아닌데.

    언약식은 바다의 신 포르세우스의 제단 앞에서 하게 되어 있다. 그건 마린족이라면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각인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아일라에게 각인이 생겨 버렸다니. 바다신의 제단 앞에서 언약식을 올려야만 생기는 각인이 이런 식으로 생긴 적은 없었어.

    세레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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