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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 그 계약은 잊어주세요-4화 (4/100)
  • 4화

    “못 합니다. 힘 조절이 안 돼서.”

    “거짓말하지 마!”

    천재라고 할 정도로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힘을 제어하는 것도 뛰어나면서 힘 조절이 안 된다고?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에 아일라는 입을 삐죽였다.

    “거짓말 아닙니다.”

    네가 힘을 조절 못 한다고? 웃기지 마. 지나가는 돌고래가 웃겠다.

    “빨리 결정하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왕께서 더 화내실 겁니다.”

    씨이, 아깝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면.

    “단검 줘.”

    아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제이드가 건네는 단검을 받아 엉킨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아까운 내 머리카락······.

    “이제 가시죠.”

    “이 사람, 죽지 않겠지?”

    “제가 알게 뭡니까. 그 인간이 죽든지 말든지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이제는 정말 돌아가셔야 합니다.”

    “못됐어, 정말.”

    “누가요? 제가요?”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라고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곤 제이드를 한껏 노려보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후에 정신을 잃고 있는 남녀를 힐끗 바라본 제이드도 바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머리카락을 잘라 내면서 그녀의 목걸이도 끊어져 그의 갑옷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을. 은혼단을 먹이려고 한 입맞춤에 서로에게 각인이 생겼다는 것을.

    그 둘이 바다로 돌아간 뒤 얼마 후, 남자 옆에 정신을 잃고 있던 여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몇 번의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 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자신의 옆에 정신을 잃고 있는 남자를 보고는 놀랐다.

    “전하? 전하 괜찮으세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여자는 남자를 흔들며 불러 봤지만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난 바다에 빠져서······.”

    “으으-.”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던 크레타는 칼리스토 대공의 신음 소리를 들은 것 같아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때마침 그들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야! 여기!”

    파르미온의 공주는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소리 높여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크레타의 목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다니엘이 먼저 도착했다. 그러고는 제일 먼저 칼리스토 대공의 상태를 살필 때 기사들이 도착했다.

    “전하는 어떠신 건가? 다니엘 경.”

    “다른 독에는 면역이 있으셔도 오로치 독에는 면역이 없으셨을 겁니다. 아무래도 몸에 퍼지는 독 때문에 가사 상태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우선 전하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바다에 빠지셨어도 내가 있으니 안심하신 것 같지만······. 대체 누가 전하와 공주를 이곳으로 옮긴 거지? 확실한 건 자신과 기사들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럼 바다에서 누가? 설마······ 저와 같은 마린족? 물 위로 올라온 마린족이 있다고 해도 전하와 공주를 구했다는 건가? 마린족은 인간들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이보게, 다니엘 경.”

    칼리스토 대공을 들쳐 업고 자리를 옮기려던 윌리엄이 바다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는 다니엘을 불렀다.

    “왜 그러는가? 지금 돌아가고 싶다고 마음이 바뀐 건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윌리엄의 뒤를 따라 그 자리를 떠났다.

    * * *

    아틀란에 가까워졌을 때 소녀가 멈추자 제이드도 같이 멈춰 뒤를 돌아봤다.

    “뭐 하십니까?”

    “아, 아버지······.”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멈춰 섰던 것이다.

    “아일라 아틀란.”

    진짜 화나셨나 봐. 표정도 목소리도 무서워.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섬뜩하다고 느끼고는 움찔했다.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아버지······.”

    아일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다시는 물 위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거늘.”

    “하지만 아버지.”

    “듣기 싫다. 바깥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특히 인간들은.”

    “아버지, 제 말 좀.”

    “듣기 싫다고 했다. 너는 언약식이 있을 때까지 외출 금지다.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생각하지 말고 근신하거라!”

    “아버지! 저는 슈레더 악시온과 언약식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뭐 하는가, 공주를 데려가지 않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시를 내리고 뒤돌아가는 아버지를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어째서? 왜 내 말은 들어 주지 않는 거야. 아버지가 이상하게 변했어. 언제나 내 말을 들어 주셨는데. 이제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으셔.

    “공주님.”

    입술을 꽉 깨문 아일라가 멀어지는 제 아버지를 바라보다 제이드가 부르는 소리에 얌전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축 늘어진 아일라의 어깨를 바라보던 제이드는 잠시 왕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더니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일라의 뒤를 따라갔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드린 아일라의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너무해······. 어떻게 아버지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슈레더 악시온은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 녀석은 단지 왕좌를 손에 넣고 싶은 것뿐인데. 아버지도 내가 싫다고 하면 강제로 혼인시키지 않는다고 하셨으면서 어째서?

    “아일라, 엄마야. 들어간다.”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러곤 물빛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땅까지 끌릴 정도로 긴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일라를 부르며 방 안에 들어온 여인은 세레스 아틀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마치 아일라의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아일라와 닮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일라가 여인을 닮았다는 말이 맞을 거다.

    “아일라.”

    세레스가 부르는데도 아일라는 대답하지 않고 움찔했다.

    “아일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물 위로 올라가지 말라고 한 건 너를 걱정해서야.”

    “알아요, 하지만!”

    “아일라. 인간들은 위험해. 제이드가 너보다 두 살이 많았었지. 제이드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을 거다. 너는 제이드와 친구니까. 너처럼 호기심에 바깥세상이 궁금해 물 위로 올라갔다가 변을 당했지.”

    알고 있다. 많이 들은 이야기니까. 제이드의 성격이 변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도 어릴 적 들려주던 이야기 속 인어 공주처럼,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요.”

    아일라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제 어머니를 바라보고 말했다.

    “아일라.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야. 종족이 서로 다르면 함께 살아갈 수 없어.”

    “그렇지 않아요. 서로 도움을 주면서······.”

    “아일라. 어릴 적 꿈은 꿈만으로 간직하고 허황된 꿈은 버리렴.”

    허황된 꿈······. 어떻게 엄마가 그런 말을.

    “허황된 꿈 같은 게 아니에요. 인간들하고 잘 지낼 수 있어요.”

    “아일라.”

    세레스의 엄한 목소리에 아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바깥세상은 네 생각만큼 좋은 곳이 아니야. 인간들은 자신과 다른 종족은 이용하거나 노예로 부리려고 할 뿐이야.”

    설마 어머니까지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던 아일라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분명 좋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제가 증명할 거예요. 제가 인간 반려를……!”

    “아일라!”

    제 딸이 하는 말이 기막혀 세레스는 다시 한번 그녀의 말을 자르며 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 너는 아틀란의 유일한 공주고 후계자야. 그런 네가 인간에게 아틀란을 가져다 바치겠다는 거니?”

    “그런 말이 아니에요.”

    “그런 말이 아니면 다시는 그런 위험한 발언은 입 밖으로 내지 말고 물 위로 올라가지도 말거라.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살 수 없단다.”

    아일라는 고개를 숙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야기이고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해 준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워 왔다. 어머니가 해 준 이야기 속의 인어 공주처럼 종족이 달라도 사랑하고 함께하는 그런 꿈.

    대화를 해 보고 싶은 사람을 봤다. 단단한 비늘을 지닌 오로치를 반토막 내던, 자신이 구해 준 강한 인간. 다시 한번 만나 서로 협력하는 것부터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이야기만 잘하면 함께 바다의 마물을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린족은 물속에서 숨을 쉬고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이외에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중하고 있으렴. 그럼 아버지의 노여움도 사라질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가 변한 것을 느끼지 못하세요?”

    아일라는 세레스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봤다.

    “요즘 계속 편찮으셨잖니? 좀 예민해지셔서 그래.”

    “단지 편찮으신 걸로 신경이 예민해지셨다고요? 아니요, 그런 거 하고는 뭔가 느낌이 달라요. 아버지가 점점 변해 가고 있다는 거,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싫다는데도 슈레더와 언약식을 올리라고 하시고.”

    “아일라.”

    “슈레더가 어떤 자인지도 모르고. 제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으세요.”

    “그렇게 싫으면 그건 아버지와 이야기해 보마.”

    제 딸을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은 세레스는 일어나 방을 나갔다.

    허황된 꿈이 아니야. 이게 허황된 꿈일 리가 없어.

    아일라는 베개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차라리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면, 저도 어쩌면 슈레더를 이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진짜 우연히 듣게 된 것이었다.

    “그 말 사실이야? 내가 좋다고 했잖아. 슈레더.”

    “어쩔 수 없잖아. 타트라.”

    “뭐가 어쩔 수 없는 건데. 넌 자신의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그런 멍청한 공주와 혼인하는 거야! 그게 그렇게 좋아?”

    “누가 좋다고 했냐? 공주와 혼인해야 왕좌를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하는 거지. 걱정 마. 내가 왕좌만 손에 넣으면 공주는 필요 없어.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는걸. 그러니 왕좌만 손에 넣으면 공주를 버리고 너와 다시 혼인할 거야.”

    “언약식에서 언약의 입맞춤으로 각인이 생기면 끝인 거 몰라? 무슨 수로 나와 혼인할 건데?”

    “방법이 아예 없는 거 아니잖아. 공주가 죽어서 각인이 끊어지거나 서로 동의하에 각인을 없앨 수 있어. 알면서 왜 그래?”

    “흥! 몰라!”

    슈레더는 자신이 그 모든 말을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타트라를 달래 주느라 애쓸 뿐이었다. 아일라는 본의 아니게 듣게 된 대화에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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